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230화 (1,230/1,497)

< 1230화 > 1230. 광명승천도

머리를 쓸 줄 아는 놈과 함께하니 확실히 몸이 편하긴 했다. 함정을 피하기도 쉬웠고, 어쩌다 마주친 입소자는 설득해서 전투 없이 헤어졌다. 요괴와 마주쳐 전투할 때도 도움이 되었다. 다만, 결계는 좀 빨리 설치해줬으면 했다.

“123번."

"뭐지?"

우리는 평형대 수준으로 폭이 좁은 길을 걷고 있었다. 옆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양옆의 구덩이에는 가시가 삐죽삐죽 솟아있다.

그러나 나와 제갈모순은 여유로웠다. 우리는 출지의 경지에 이른 고수다. 고수에게 있어 평형대 걷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뛰어다닐 수도 있다.

"88번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랬지."

대충 2개월 전의 일이다.

나는 비공식적으로 천유운과 대련했고 패배했다. 천유운에게 도움받은 적도 있고, 천유운의 실력에 감명도 받았기에 내친김에 충성을 맹세했다. 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다.

"어떻게 알았지? 88번이 말했나?"

"당신의 태도를 보고 유추했습니다. 태도가 미묘하게 변했더군요."

과연 제갈모순이다. 훗날, 마뇌라고 불리는 마교의 두뇌가 될 남자다웠다.

"그것만이 아니겠지. 너도 88번을 섬기기로 했겠지. 그러니 내가 충성을 맹세한 걸 짐작할 수 있었을 테고."

"눈치가 제법이시군요. 예. 맞습니다. 저는 88번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너무 대놓고 말하는군. 입마소장의 말로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던데."

"괜찮습니다. 전 딱히 천마신교를 배신하는 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88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 자체가 천마신교에 충성을 다하는 일이죠."

"88번의 정체를 알고 있나 보군."

"모르는데 충성을 맹세했겠습니까?"

"뭐가 궁금한 거냐."

"충성의 이유. 저는 88번에게서 가능성을 봤습니다. 그가 천마신교의 주인이 될 가능성을 말이지요."

·88번은 나보다 강하다. 나는 그의 힘을 인정했다. 단지, 그뿐이다."

"어처구니없군요. 그 말을 믿으라고요? 당신보다 강한 사람은 이 신교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당장 입마소장만 해도 당신 따위는 10합 만에 죽일 수 있겠지요."

"입마소장에게는 88번처럼 압도적인 무언가가 없다."

“그 무언가가 뭡니까?"

“말로 설명하기 힘들군. 그런 게 있다."

"뭐, 좋습니다."

뒤에서 제갈모순의 손이 내 어깨를 잡는다. 그가 손에 힘을 줘서 내 몸을 미는 것만으로도 나는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질것이다.

"무슨 짓이지?"

"123번. 미리 경고해두겠습니다. 저와 88번의 발목을 잡지 마십시오. 당신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선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제갈모순을 바라봤다. 그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이다.

"내가 할 말이다, 제갈모순. 많은 사람이 너를 제갈세가의 첩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걸 잊지 마라."

"그건 차차 증명하겠습니다."

그는 내 어깨에서 손을 뗐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겁니까. 앞으로 가십시오, 123번."

나는 눈을 찡그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바닥에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나와 제갈모순은 그들에게 다가가 상처를 살폈다. 피로 젖은 옷과 달리 상처는 심각하지 않았다.

"검상이군. 아직 살아있다.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다."

"215번, 307번, 421번. 누구에게 당한 겁니까?"

제갈모순이 차분한 음성으로 그들에게 물었다. 번호가 불린 그들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대답을 한 것은 가장 덩치가 큰 남자였다. 초점없는 눈을 한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악귀, 악귀에게 당했다…."

"악귀? 요괴 말입니까?"

"요괴가 아니다! 놈은 인간이다! 악귀는 가면을 쓰고 두 개의 검을 쥔… 무인..…!"

“좀 더 자세하게 말해주시죠! 215번! 215번!!"

215번은 정신을 잃었다. 죽은 건 아니고 잠든 것 같았다. 제갈모순은 307번과 421번을 돌아봤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정신을 잃었다.

"갑자기 기절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아니, 이건 기절이 아니라."

"수면제군."

"예. 수면제를 사용했습니다. 이들이 말한 악귀의 짓이겠죠."

제갈모순이 내 등을 힐끗거린다. 내 등에 악귀 문신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니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저와 같이 있었지 않습니까."

"네 눈이 마음에 안 든다."

제갈모순은 코웃음도 치지 않으며 쓰러진 자들을 살펴보다가 일어났다.

"좀 더 철저하게 경계해야겠군요."

"묘하게 여유롭군. 악귀에 대해 알고 있나?"

"모릅니다. 다만, 추측은 가능하지요. 악귀는 이들을 쓰러뜨리고 잠재웠습니다. 악귀는 아마도 천마신교의 무인일 겁니다. 입마소장이 투입했겠지요."

"왜?"

“이번 기수 입소자들의 수준이 높기 때문이겠죠.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됩니다."

우리는 쓰러진 자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갈림길이 나왔다.

오른쪽과 왼쪽 모두 똑같이 생겼다. 나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오른쪽에서 물소리가 들리는군. 왼쪽에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흐음. 오른쪽으로 가죠."

"이유는?"

"정보의 차이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물이 흐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편이 더 나으니까요. 거기에다가 물이 흐르는 곳입니다. 근처에 출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오른쪽으로 향했다.

곧 흐르는 물과 마주쳤다. 문제는 물이 아래로, 지하 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하가 얼마나 깊은지 눈에 시선을 집중해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뭐야, 123번이랑 366번이었잖아."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여자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290번 서문소려와 567번 연예하였다. 서문소려의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는데, 그녀의 피는 아닌 듯했다.

"여기서 여러분과 만나게 될 줄이야… 운이 좋군요."

제갈모순이 씩 웃었다.

"너희 흑목주는 찾았어? 우린 아직 못 찾았어. 흑목주부터 찾아야 해."

서문소려가 말했다. 목소리에는 약간의 초조함이 담겨 있었다. 옆에 있는 연예하는 조용했다. 여기서도 무표정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저희는 흑목주를 찾았습니다. 네 번째 시험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 천천히 움직이며 출구와 흑목주를 찾으면 됩니다. 우선 물을 좀 마시고 계획을 짜도록 하죠."

제갈모순이 말을 끝낸 순간이었다.

우리들은 동시에 고개를 획 돌려 우리가 왔던 길을 돌아봤다. 그곳에 악귀 가면을 쓴 남자가 있었다. 양손에 검 한 자루씩 쥐고 있다.

우리는 동시에 숨을 삼켰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기세에 한순간 압도당했다. 저놈은 최소 오기(五氣) 이상의 실력자다.

우리 중에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연예하였다. 그녀가 검을 빼 들고 악귀 가면을 향해 돌진한다. 나는 한발 늦게 그녀의 뒤를따르며 제갈모순에게 말했다.

"366번! 결계를 쳐라!"

"알겠습니다. 시간을 벌어주십시오!"

제갈모순은 강철 막대기를 땅에 꽃기 시작했고, 서문소려는 내 뒤를 따른다. 우리 셋은 합을 맞추며 악귀 가면을 상대했다.

악귀 가면이 여유롭게 검을 휘두르며 대처한다.

'젠장. 딱 보니 견적 나오는군. 오기 중반 정도인가?'

다행인 점은 놈이 우리를 적당히 상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놈이 진짜로 우리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나도 금제를 풀어야 했을 것이다.

연예하의 검에서 백색 검기가 치솟는다.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 검의 궤적이 일그러지더니 시야를 어지럽힌다. 뛰어난 환검(幻劍)이다. 그러나 악귀 가면은 손쉽게 연예하의 공격을 쳐냈다.

카앙!

폭음과 함께 연예하가 뒤로 날아가 바닥을 구른다.

나와 서문소려는 서로에게 눈짓하며 동시에 악귀 가면의 양옆으로 파고들었다. 악귀 가면이 검을 들고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회전한다. 나와 서문소려가 파고들지 못할 정도로 회전이 엄청났다.

나는 바닥에 툭 솟아 있는 부분을 발로 찼다. 돌멩이가 회전하는 악귀 가면에게 날아간다. 돌멩이는 회전하는 검에 닿는 순간 먼지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됐습니다! 결계를 발동합니다!"

후우웅.

제갈모순의 결계가 발동한다. 공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진다. 악귀 가면이 회전을 멈췄다.

우리는 악귀 가면을 경계하며 한곳에 모였다. 악귀 가면은 가만히 있었다. 작전을 짤 시간을 줄 모양이다.

“결계가 놈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 겁니다. 놈을 이길 수 있습니까?"

"이기는 건 불가능해요.”

연예하가 단언했다. 나와 서문소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의견에 동의한다. 악귀 가면을 이기려면 연예하 수준의 고수가 5명은 더 있어야 한다.

“그럼 도망치는 편이 최선이겠군요. 우선 여러분이 놈을 상대해주십시오. 약간의 시간만 끌어주시면 됩니다."

"시간을 끌어서 어쩔 생각이지?"

내가 물었다.

"결계를 강제로 축소시켜 놈의 움직임을 봉할 생각입니다. 결계와 진법은 제 전문이 아니지만.… 놈에게서 도망갈 시간은벌 수 있습니다."

"알겠다. 네 의견에 동의한다."

연예하와 서문소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악귀 가면의 검기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놈을 주시하고 있던 우리는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지며 검기를 피했다.

제갈모순을 제외한 우리는 바로 악귀 가면에게 달려들었다. 결계의 영향인지 악귀 가면의 대처가 느려졌다. 그렇다고 해도 놈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먹일 수 있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카앙! 캉! 카아앙!

지난 시간 동안 우리는 함께 수련했다. 그 덕분에 우리 셋의 합은 어느 정도 맞았다.

악귀 가면의 태도가 변했다. 방어 일색이던 그의 검술이 공격적으로 변한다.

"아아악!"

서문소려가 비명을 토하며 벽을 향해 날아갔다. 그녀의 왼쪽 어깨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이 새끼가!"

악귀 가면의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참귀도법(斬鬼刀法) 역귀추(逆鬼追).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칼날.

악귀 가면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으로 손쉽게 피했다. 하지만 진짜 공격은 내 뒤에 있었다. 나를 방패 삼아 악귀 가면의 시야에서 몸을 감추고 있던 연예하가 내 어깨를 밟고 악귀 가면에게 쇄도했다. 그녀의 백색 검기가 순간적으로 4개로 늘어나 허공을 뒤덮으며 악귀 가면을 공격한다.

악귀 가면이 당황한 듯 두 눈이 커졌다. 그는 양손에 쥔 두 개의 검을 교차시켜 휘둘렀다. 악귀 가면의 몸에서 기파가 일어나 나와 연예하를 날려버린다. 바닥을 구른 나와 연예하가 동시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금입니다! 도망치십시오!"

제갈모순이 소리친다. 땅에 박혀있던 강철 막대기들이 악귀 가면에게 쇄도해 움직임을 막는다.

제갈모순은 서문소려와 함께 뒤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567번! 우리도 도망가야 한다!"

"아뇨, 조금 늦었습니다. 맞서야 합니다."

"뭐?"

쾅!

악귀 가면이 어느새 우리 앞에 다가왔다. 그의 몸에는 호신강기가 불꽃처럼 피어올라 있었다. 호신강기로 제갈모순의 결계를 이용한 속박을 막은 것이다.

그가 두 개의 검을 휘두른다. 나와 연예하는 동시에 검을 세워 그의 검을 막았다. 또 충격파가 발생했다. 나는 상체를 숙여 가까스로 충격파를 견뎌냈지만, 연예하는 아니었다. 그녀의 몸이 위로 뜬다. 악귀 가면은 자비 없이 검을 치켜들었다.

'찰나!'

찰나를 이용해 연예하의 몸을 잡아당겼다. 악귀 가면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연예하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찰나! 찰나! 찰나!'

연예하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며, 연속으로 찰나를 사용해 흐르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악귀 가면이 도약한다. 그의 검이 물속에 떨어졌다. 물기둥이 천장까지 치솟았으나, 우리는 물의 흐름에 몸을 맡겨 악귀 가면의 공격을 피했다.

나는 이어질 그의 공격을 대비했으나, 그는 가만히 서서 이쪽을 쳐다보기만 했다.

뒤늦게 놈의 몸을 보호하고 있던 호신강기가 사라지고, 없어진 줄 알았던 제갈모순의 결계가 그의 몸을 속박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나와 연예하는 물길에 휩쓸려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풍덩!

지하의 넓은 호수에 떨어졌다. 나는 연예하를 들고 헤엄쳐 뭍으로 올라갔다. 입안에 들어간 물을 뱉으며 연예하를 바라봤다. 물에 흠뻑 젖은 연혜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123번. 당신이었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