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1화 > 1221. 광명승천도
선가장, 염구석이 돌아가고 난 직후의 접견실 공기는 무거웠다.
선가장주인 선해도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허공을 바라봤다. 그의 망막은 방금 자신에게 선전포고를 던지고 선가장을 박차고 나간 사내의 모습을 재생하고 있었다.
선해도가 직접 느낀 염구석의 경지는 출지 2단이었다. 그리고 선해도의 경지는 오기 2단. 차원이 다른 경지였다. 선해도와 염구석이 맨손으로 싸웠을 때, 선해도는 염구석을 3합 내로 있다. 선해도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면 1합 내로 결판을 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방금 본 염구석은 달랐다. 벌레 죽이듯 단숨에 죽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선해도는 오히려 염구석에게 압도당했다.
그 농도 짙은 살의는 어중이떠중이가 내뿜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수천…. 아니, 수만 명 이상을 죽인 자의 그것이다.
‘…더 위험한 건 염구석의 마공이다.’
선해도는 염구석의 몸에서 흘러나왔던 시커먼 마기를 똑똑히 보았다. 그 처음 보는 마기를 보는 순간 선해도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출지의 무인에게 공포를 느껴 다리를 떨다니… 수치스럽군.’
그는 염구석의 마공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마공 중의 마공. 무공이라 부르기도 뭐한 기괴한 무공. 예를 들면 인육을 먹으면서 빠르게 강해지는 마공 같은 것.
‘어느 쪽이든 그놈은 위험하다. 아직 입마소를 수료하지 않았음에도 출지의 경지에 이른 천마신교인이다. 그놈의 재능은 누가 뭐라 해도 진짜다. 시간이 지나면… 선가장은 정말로 위험해질 수 있다.’
삭주굴근(削株堀根)
선해도의 머리에서 그 네 글자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한동안 아무도 없는 접견실에서 호흡하며 떨리는 몸을 진정시킨 뒤 밖을 향해 소리쳤다.
“거기 누구 있느냐?!”
“예. 가주님!”
호위무사의 우렁찬 대답이 돌아왔다. 실제로는 호위무사 보다는 업무를 보좌하는 자에 가깝다. 현대로 치자면 개인 비서다.
“추저 공(公)과 만나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지금 당장 추저 공을 접견실로 데려오거라.”
“예. 가주님!”
얼마 지나지 않아 접견실 문이 열리고 젊은 청년이 들어왔다. 이제 막 약관이 지났을 법한 이 남자가 바로 염구석의 임무 목표인 추저였다.
겉모습에 속아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추저는 저래 보여도 90대에 가까운 나이였다. 그는 모습을 바꾸는 성형술을 이용해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성형술은 불로 같은 게 아니다. 겉모습만 바꾸는 술법의 일종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늙어가기에 젊음을 유지하고 싶다면 주기적으로 성형술을 받아야 한다.
참고로 경지에 이른 무인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젊음을 유지하는 방법이 많고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술법이 있으며, 늙지 않게 하는 무공도 존재한다. 신묘한 영단을 통해 젊음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
그리고 술법, 무공, 영단 없이 자연스레 젊음을 유지하는 자들도 있다. 고수의 육체는 정신의 모습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정신의 모습이 젊으면 육체 또한 그 영향을 받아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을 겪으면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도 성장한다. 그게 세상의 이치였다. 수십, 수백 년을 살면서도 젊은 정신을 유지하는 건 깨달음을 얻은 고승도 힘든 일이었다.
“앞에 앉게.”
추저는 염구석이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그는 선해도의 뒤편을 봤다. 녹차로 젖은 벽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박살 난 찻잔 조각이 흐트러져있다.
“선가장에 누가 찾아왔는지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
“저를 죽이기 위해 천마신교의 무인이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주께서 놈을 쫓아냈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가장은 식객을 쉽게 내치지 않네. 자네가 선가장을 위해 애써왔는데 헌신짝처럼 내다 버리겠는가.”
“이 추저, 가주님께 깊은 은혜를 느끼고 있습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은혜를 반드시 갚겠나이다!”
“역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군.”
흐뭇하게 웃던 선해도는 곧 표정을 지우고 말했다.
“허나 일은 끝나지 않았네. 놈은 자네를 죽이려 할 걸세. 놈은 입마소 출신이고, 놈이 받은 임무는 자네를 죽이는 것이니.”
“…입마소 출신. 지금 시기를 생각하면 세 번째 시험이겠군요. 놈은 입마소로 돌아가야 하니 앞으로 열흘 정도만 버티면 될 것입니다.”
“버티는 것으로는 안 되네.”
선해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진지하고 결의에 찬 목소리에 추저는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놈은 보통 놈이 아니야. 이대로 놈을 내버려 두면, 자네뿐만이 아니라 선가장까지 위험해질 수 있네. 삭주굴근이라…, 놈이 하가시에 머무는 동안 일을 끝내야 하네. 내가 직접 나서서 놈을 죽여버리고 싶으나…. 나는 선가장의 가주네. 내가 직접 나서면 천마신교와 사생결단을 치러야 할 수도 있네.”
“가주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제가 직접 나서서 놈을 죽여버리겠습니다.”
“자네 혼자서 힘들 걸세.”
“저를 믿어주십시오. 제 진심을 가주께 증명하고 싶습니다.”
“나는 자네를 믿네. 허나 천마신교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건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놈은 천마신교의 비수다. 무엇보다 날카롭고, 무엇보다 강력하지.”
“……후. 맞습니다. 천마신교. 제가 그놈들을 잠시 얕봤군요. 가주, 선공대를 빌려주십시오.”
선공대(先攻隊).
30명의 무인으로 이루어진 선가장 최고의 무력 부대다. 정예 중 정예다. 선공대 대원은 최소 입식 5단 이상의 경지를 가졌다.
“미안하네만, 이 일에 선가장이 직접 나설 수 없네. 내 입장을 이해 해주게.”
“…이해합니다. 아무리 선가장이라 하더라도 부담스러울 테니…. 하지만 다른 방법은….”
“추저 공. 내 계획을 들어보게. 나는 병살단을 이용할 생각이네.”
병살단(竝殺團)은 하가시를 포함해 그 주변 일대에서 활동하는 살문(殺問)이다. 즉, 살수 단체다. 그들은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병살단이 의뢰를 받겠습니까? 그놈들이 돈에 환장하긴 해도 천마신교를 적으로 돌릴 정도로 멍청하지 않을 겁니다.”
“그놈의 상황은 현재 특수하네. 천마신교의 임무를 받았으나, 천마신교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지.”
“…입마소의 세 번째 시험…!”
“그렇네. 그리고 나는 놈들을 이용해 그놈을 죽일 생각이 없네. 놈을 죽이는 건 자네여야 하네. 병살단은 놈을 괴롭힐 걸세. 아주 지독하게.”
“……제가 할 일은 약해진 상태의 놈을 죽이는 거군요. 제가 죽여야 천마신교는 조용할 테니까.”
선해도는 잠깐 숨을 삼켰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괴로움을 연기했다.
“……자네에게 이런 말 하는 내 심정은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네만…, 이 일이 끝나면….”
“그런 괴로운 표정을 지을 실 필요 없습니다. 놈을 죽이고 하가시를 떠나겠습니다. 그동안 저를 거둬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추저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천마신교가 자신을 찾은 이상 계속 선가장에 머물 수 없었다. 그는 말로는 선해도를 추켜세웠지만, 실제로는 선해도를 믿을 수 없었다.
선해도는 선가장의 가주였다. 양민들의 생각과 달리 그는 공명정대한 대협이 아니었다. 천마신교가 공식적으로 추저를 요구하면, 선해도는 주저하지 않고 추저를 천마신교에 넘길 것이다. 추저를 죽이라면 죽일 것이고.
추저로서는 선가장과 좋은 인연을 가지고 떠나는 게 최선이었다.
“일이 끝나고 어디로 갈 생각인가?”
“천마신교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남쪽으로 떠날 생각입니다. 원래부터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돈은 충분히 모았나?”
“덕분에 많은 돈을 모으긴 했습니다만… 약간 부족합니다.”
“걱정 말게. 여비는 내가 넉넉하게 챙겨주겠네.”
“감사합니다, 대협!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후우. 할 일이 많군. 이만 일어나지.”
•••
나는 오후에 보이루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밤에는 다른 기루를 찾아갔다. 모처럼 온 도시다. 다른 기루가 어떤지 궁금했다. 다른 기루의 기녀들도 맛은 한 번 봐야 하지 않겠나.
보이루에서 다른 기루를 추천받았다. 하가시의 기루들은 서로 경쟁하기보다는 협력을 유지하고 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기업 담합이었다. 당연히 현대에서는 불법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딱히 그렇지 않았다. 단속하는 자들이 적었다.
‘애초에 이 세계는 황제가 관리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무림 문파를 이용해 도시를 관리하는 곳이니까. 가게 간의 담합 정도야 애교 수준이지.’
황제가 무능하다. 라는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황제는 유능하다. 이런 방식을 정한 건 그의 영토인 대륙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이다. 이 대륙 내에 있는 도시는 수천 개가 넘고, 인구수는 수백억에 달한다.
그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비해 문명 수준은 중세에 가깝다. 간혹 오버 테크놀로지가 등장하긴 하나, 그건 정말 드물다.
‘여긴 컴퓨터도 없는 세계야. 황제 혼자 대륙 전체를 관리하는 건 불가능하지. 뭐, 이 문파를 이용한다는 시스템을 황제가 만든 건 아니지만.’
본래부터 문파가 지역을 관리해왔다. 황제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대륙을 통일하며 무림을 자신의 아래로 거뒀을 뿐이다. 무림은 황제의 법에 따르고, 황제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걸어가던 나는 멈칫했다. 오늘은 달이 뜨지 않는 날이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저 멀리 기루에서 나오는 불빛이 보이긴 하나, 너무 멀다.
“…….”
쐐애애액.
어둠 속에서 비수가 무광의 비수가 날아온다. 어둠에 섞여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름을 찢는 소리가 그 위치를 알려줬다.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비수를 위로 쳐냈다. 비수가 허공에서 빙글 돌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떨어진 비수를 화풀이하듯 발로 차며 어둠을 직시한다.
[천안(天眼)을 개안합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놈들이 보인다.
모두 검은색 옷과 복면으로 모습을 가리고 있다. 허나 놈들이 모르는 게 있다. 천안은 술법 등으로 막지 않는 이상 투시가 가능하다. 놈들의 얼굴을 확인한다. 전부 모르는 얼굴들이다.
‘보이는 것만 6명이군. 기척을 숨기는 솜씨가 뛰어나다. 선가장의 무인이 아니라 살수로군.’
누가 살수를 고용해 내게 보냈는지는 뻔하다. 선해도.
‘천마신교 때문에 직접 나서지 못하니 이렇게 나오시겠다?’
칼자루를 꽉 쥐었다. 선도해를 생각하니 짜증을 치솟는다. 천만다행히도 눈앞에 화풀이 대상이 있었다.
‘모조리 죽인다…!’
살수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