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219화 (1,219/1,497)

< 1219화 > 1219. 광명승천도

저 앞에 작은 도시가 보였다.

풀을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던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품에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펼쳤다. 지도를 확인하며 도시의 특징을 확인한다.

‘도시 서쪽에 흐르는 강을 보니 맞게 찾아왔군.’

천마신교 입마소의 세 번째 시험. 그 내용은 개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입소자들은 저마다 받은 임무를 일정 기간 내에 완수하고 입마소로 돌아가야 한다. 기간 내에 귀환하지 못하거나, 임무에 실패하면 강등되거나 퇴소당한다.

임무는 입소자들의 성적에 따라 배분되었다. 가장 쉬운 임무는 물건을 전달하는 종류의 심부름이다. 그 임무들은 위험하다기보다는 시간이 촉박하다. 비교적 간단한 임무인 대신에 잠까지 줄여가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임무다.

내가 받은 임무는 하가시(河歌市)의 실질적인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선가장(先家莊)의 추저란 이름의 식객을 죽이는 일이다.

2년 전부터 선가장에 신세를 지고 있는 식객인 추저의 정체는 천마신교의 배반자다. 그는 천의맹과의 전투 때 동료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후에 얼굴을 바꾸고 잠적했으나, 천마신교의 전문 추적자들이 그를 찾아냈다.

추저의 경지는 출지 2단. 천마신교의 전투 부대가 나서서 그를 죽이기에는 애매한 경지라 할 수 있었기에 내 임무로 하달된 것이다.

‘원작과 좀 달라졌군. 원래 염구석은 천마신교 근처에서 활동하는 살수를 찾아내 죽이는 임무를 받았는데.’

내가 원작의 염구석보다 더 좋은 실력을 보여서 임무 난이도가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같은 이유로 연예하의 임무도 원작과 바뀌었다. 그녀는 현재 천마신교 근처에 있는 요괴들을 토벌하고 있을 것이다.

‘상황은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좋아.’

하가시는 천유운, 제갈모순, 서문소려의 임무와 관련 있는 곳이니까.

두루마리에 적힌 임무 내용을 재차 확인한 나는 뇌전을 일으켰다. 파지직. 두루마리를 타고 시퍼런 전류가 흐른다. 전류는 곧 불꽃으로 변해 두루마리를 불태웠다. 나는 손바닥에 묻은 재를 털어낸 뒤 도시로 향했다.

도시 입구는 5명의 무인이 입구를 통제하고 있다. 그들의 감색 무복 가슴팍에는 선(先)이라는 문자가 적혀 있다. 선가장 소속의 무인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입구에서 도시 출입자 명단을 작성 중이다. 이 도시가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기에 얌전히 줄을 서서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내 앞에 있던 상인이 도시 내부로 들어가고 내 차례가 왔다.

“무인이시군요. 출신이 어떻게 되십니까?”

멀끔하게 생긴 무사가 다가왔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다. 느껴지는 기운으로는 대충 입식 6단. 젊은 나이로 보이니 제법이라 할 수 있었다.

“꼭 말해야 하나?”

“이해해주십시오. 저희는 20년 전부터 명부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20년 전에 큰일이라도 생겼나?”

“저희 선가장에겐 치욕적인 일입니다만,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일이니 말씀해드리겠습니다. 무영신투(無影神偸). 소협도 그 이름은 들어보셨겠지요?”

“물론 알고 있다.”

그 얼굴도 알고 있었다.

“저희 선가장은 20년 전에 무영신투에게 당한 적 있습니다. 그 이후부터 출입 명단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무영신투는 은퇴했다는 소식이 돌더군.”

“곧 새로운 무영신투가 나타날 겁니다. 강호에선 늘 그래왔으니까요.”

강호는 역사가 길다. 강호의 기원을 따지면 몇만 년은 따져야 한다.

우스운 것은 몇만 년이 지났음에도 문명의 발전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혁명은 일어나지 않고 과학 기술은 여전히 천대받는다. 강호는 그저 반복하며 흐르고 있었다.

무영신투란 별호는 당대 최고의 도둑놈에게 주어지는 별호다. 황제의 비고를 훔친 도둑이 또 나타난다면 그가 곧 새로운 무영신투가 되겠지.

“겨우 이런 출입 명단을 확인하는 거로 무영신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막기 힘들겠지요. 하지만 이 명단이 의외로 도움이 됩니다. 최근에도 이 명단 덕분에 상단에서 횡령을 저지른 상인을 붙잡고, 밀수를 시도하는 놈도 잡았지요. 그 외에도… 뭐,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됩니다.”

“…그렇군.”

그때였다.

뒤에서 불만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거, 빨리 좀 들어가시오! 뒤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안 보이시오?!”

중년 상인이었다. 평범한 상인이라 하기엔 기골이 장대했고 얼굴에 칼자국이 있었다. 입식 3단. 무공을 익힌 상인이다.

“지금 나한테 말한 거냐?”

놈은 내게 눈을 부라렸다.

“지금 여기 당신 말고 누가 있소?”

“네놈에게 목숨을 건 비무를 신청한다.”

“…….”

사방이 조용해졌다.

설마하니 내가 다짜고짜 비무를 신청할지 몰랐던 모양이다. 상인은 내 행태를 훑어보고는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지금 장난하시오? 난 상인이오. 내가 옛날에 무공을 익히긴 했으나, 이미 손을 털었소.”

“그러니 무인이 아니다? 무공을 익혔으면 무인이다. 네놈 허리춤에 걸려있는 검이 그 증거다. 검을 뽑아라.”

“내가 왜 당신과 비무를 해야 하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무인이 아니오!”

“네놈의 비무 거절을 내가 거절한다.”

나는 허리에 걸어둔 칼에 손을 가져갔다. 상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검자루를 쥐었다.

“이런 미친놈이! 오냐! 오랜만에 칼춤 한 번 추자!”

상인이 고함치며 기백을 터트렸다.

누구도 나와 상인을 막지 못했다. 도시 입구를 지키는 선가장의 무인들도 이 상황을 관망하고만 있었다.

상인이 비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비무는 중세시대의 결투와 비슷했다. 그리고 무인들끼리의 다툼은 강호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멍청한 상인 놈은 내 실력을 잘못을 파악했다. 내가 입식 초반의 경지라 짐작한 것이다. 실력을 숨긴 게 이럴 때 도움이 됐다.

“좋다! 내 오늘 옛날의 나로 돌아가서 애검에 네놈의 피를 먹여야겠구나!”

상인이 소리쳤다. 주변을 의식한 외침이었다. 모두가 흥미롭게 지켜보는 와중에, 나는 조용히 칼을 뽑았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참귀도법(斬鬼刀法) 일풍반진(一風反眞).

나는 바람이 되어 상인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 박자 늦게 상인의 목에 붉은 혈선이 그어지더니 몸과 머리가 바닥으로 쓰러진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시시하게 끝나버린 비무.

구경꾼들은 내게 야유를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경외감이 담긴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현대였다면 비명을 지르고 경찰을 부르며 난리가 났겠지만, 여긴 현대가 아니다.

“…대단하십니다.”

선가장의 무인이 진심으로 감탄한 듯 말했다.

“별거 아니다.”

“빈말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말입니다만, 전 소협의… 아니, 대협의 움직임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대협의 참격은 그야말로 번개와 같더군요.”

“칭찬해줘서 고맙군. 뒷정리를 부탁해도 되겠나? 대신 저놈이 가진 재산을 네가 가져도 좋다.”

“물욕에도 초탈하셨군요. 뒷정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대협. 이름과 출신이 어떻게 되십니까?”

잠깐 멈칫했다.

내 이름을 밝혀도 되는가? 임무를 재차 확인한다. 신분을 숨겨야 하는 조건은 없었다.

“내 이름은 염구석. 천마신교에서 왔다.”

“……천마신교입니까, 과연. 그 실력을 보고서도 믿지 않을 수 없지요. 대협, 하가시에 찾아온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말해야 하나?”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제 업무인지라….”

“여행이다. 하가시에는 미모가 뛰어난 기녀들이 많다더군.”

“예. 하가시의 기녀들이 뛰어나긴 하죠. 특히 강에서 기녀들과 함께 하는 뱃놀이는… 정말이지 신선놀음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입맛을 다셨다.

강에서 최상급 기녀들과 뱃놀이를 한다? 이건 못 참지. 계획 수정이다. 일단 오늘은 뱃놀이를 하고 내일 오후쯤에 임무를 수행해야겠다.

“이제 들어가도 되나?”

“에. 본래는 통행료를 받아야 합니다만….”

그는 죽은 상인을 쳐다봤다. 그의 동료들이 죽은 상인의 짐을 털고 있었다. 한 동료는 묵직한 돈주머니를 손에 들고 씨익 웃고 있다.

“이미 받을 만큼 받았으니 그냥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렇군. 수고해라.”

“아, 대협. 별호는 어떻게 되십니까?”

“별호 같은 건 없다.”

“그럼 제가 붙여도 되겠습니까? 대협의 실력을 확인한 사람들이 많으니 별호는 자연스레 붙여질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먼저 대협께 별호를 붙여드리고 싶습니다.”

“…좋은 별호라도 있나?”

“섬전도(閃電刀). 대협은 앞으로 섬전도라 불리게 될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별호군.”

좆같은 별호를 붙였으면 비무를 신청했겠지만, 나름 마음에 드는 별호였기에 조용히 도시 안으로 걸어간다.

그는 날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내 옆으로 달려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협. 저기 강 쪽에 있는 건물로 가십시오. 하가시 최고의 기루인 보이루(甫伊樓)입니다. 양민들은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비싼 곳이지만, 그만큼 보이루의 기녀들이 뛰어납니다. 재색을 겸비했으며, 화끈하게 놀 줄도 압니다.”

“고맙다.”

아주 좋은 정보였다. 보이루에 대한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나는 바로 그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

나는 강에서 보이루의 최상급 기녀들과 밤새워 놀다가 새벽에 잠들었다. 정오가 되어서야 눈을 뜬 나는 비몽사몽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따. 음식과 술, 알몸의 기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기녀 다섯 명의 몸에는 내 정액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과연 도시 최고의 기루답군. 후회 없는 밤이었다.’

뱃사공을 시켜 도시로 돌아간다.

보이루의 관계자들이 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꼴을 보니 보이루와 연관된 흑도 문파로 보였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바로 허리를 꺾어 인사했다.

“지난밤은 즐거우셨습니까?”

“만족했다.”

그들에게 돈주머니를 던졌다. 돈은 이미 선불로 지급했고, 이건 일종의 팁이었다.

“감사합니다, 대협! 나중에 또 저희 보이루를 이용해주십시오!”

“아, 내가 이런말하기 뭣하지만, 이름을 바꿀 생각은 없나?”

“네?”

“보이루라하니 남색을 떠올리게 하는군. 걸루라 부르면 더 좋을 거다.”

“그게…”

“이름이 마음에 안 드나? 걸루가 아니면 몰루도 괜찮겠군. 어감도 좋지 않나.”

“지금 이름을 바꾸기에는 좀 여러 가지로 문제인지라. …대협의 의견을 무시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제가 나중에 루주께 대협의 의견을 건의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길 좀 묻지. 선가장으로 가는 가장 빠른 어디지?”

“저기 보이시는 대로로 도시 중앙으로 가시면 됩니다. 하가시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곳이 선가장입니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대로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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