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9화 > 1209. 광명승천도
뇌전을 일으키기 전에 뇌천류(雷天流)가 먼저 내 의지에 반응했다.
파지지지지직!
손바닥에서 발생한 전류가 놈의 몸을 훑었다.
“끄르르르르르르르!”
놈이 절명하기 전에 서둘러 손을 뗐다.
나는 상당히 놀랐다. 설마하니 뇌천류가 이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전류의 위력이 내가 생각하는 만큼이라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놈은 정보를 내뱉기도 전에 죽었으리라.
불쾌했다.
나는 방금 뇌천류를 완벽히 제어하지 못했다. 뇌천류가 내 의지에 반응한 건 좋으나, 잘못했다가 놈을 죽일 뻔했다.
‘낙월산에서 뇌천류를 수련할 때 이런 일이 없었던 걸 보면… 지금 내 몸에 걸린 금제 때문인가? 나중에 금제 상태에서도 뇌천류를 수련해봐야겠군.’
나는 몸을 떨고 있는 놈을 바라봤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눈동자가 간신히 제자리를 찾았다.
“내 질문에 대답해라. 어디 소속이냐?”
“으… 으으….”
“난 내 말을 무시하는 놈을 싫어한다.”
다시 놈에게 손을 뻗는다. 기겁한 놈이 뒤로 기어가 내게서 도망치려 했다. 벽에 가로막혀 얼마 가지도 못했지만.
“히이이익! 도, 도양문(刀陽門) 소속입니다!”
도양문.
원작에서 나온 흑도 이름이었다. 내가 제대로 찾아왔다는 말이기도 했다.
“도양문에 대해서 말해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 무엇을 말입니까.”
“전부 말하라고 했다. 도양문의 위치, 도양문의 전력, 도양문의 역사. 네가 아는 도양문의 모든 걸 말해라.”
“마, 말하면 살려주실 겁니까?”
“내 이름을 걸고 살려주지.”
“대, 대협.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 새끼. 쫄면서 물어볼 건 다 물어보는군. 내 이름은 염구석이다.”
“염 대협! 전 염 대협을 믿겠습니다!”
놈은 땅바닥에 무릎 꿇고 앉았다. 그리고 최대한 공손하게 도양문에 대해서 말한다.
30년 전, 백산성에서 수련하던 도양산군(刀陽山君)이 하산해 도양문을 만들었다. 도양문은 기존에 백산성에 있던 흑도 무리들을 공격하고 흡수한 끝에 백산성 유일의 흑도 문파가 되었다. 허나 도양문은 백산성의 유흥가와 도시 외곽만 관리했다.
“도양문은 백산성 유일의 흑도 문파라는 거군.”
“자잘한 놈들은 있긴 한데… 그놈들은 문파라는 이름도 아까울 정도로 세력이 작습니다.”
“그 정도 크기라면 다른 곳도 관리할 수 있지 않나? 도양문은 왜 유흥가와 외곽만 관리하는 거지?”
“문주는 주제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상을 넘보면 백산금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돌연 놈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무언가를 말할지 말지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뇌기를 끌어냈다. 파지직. 시퍼런 전류가 손가락을 타고 흐른다. 놈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네가 알고 있는 도양문의 모든 걸 말하라고 했을 텐데.”
“이, 이게 확실하지 않은 정보인지라….”
“말해라.”
“…문주가 백산금가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백산금가가 도양문을 토벌하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원작대로라면 이 소문은 진실이다.
“그렇군. 도양문의 정확한 위치와 전력을 말해라.”
놈은 15분에 걸쳐 알고 있는 모든 걸 말했다.
“대, 대협. 전부 말했습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나는 내 이름을 걸었다. 너는 내 이름을 못 믿는 거냐?”
놈의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하,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 협…?”
푹.
놈의 가슴팍에 칼을 찔러 넣었다. 놈을 살려둘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놈은 내가 뇌기를 쓰는 걸 봤다. 그리고 원작의 염구석은 뇌기를 쓸 줄 모른다. 괜히 놈을 살려뒀다간 내가 곤란해지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
“너한테만 특별히 가르쳐주지. 내 이름은 염구석이 아니야.”
칼을 뽑아낸다. 피 분수가 위로 치솟았다.
“이런 개새….”
놈이 바닥에 쓰러지며 절명했다.
•••
도양문을 찾아갔다. 도양문은 유흥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찾는 건 의외로 쉬웠다. 다른 건물들과 비교해서 컸기 때문이다.
‘도양문은 흑도지만, 문파를 자칭하고 있다. 그러니 굳이 숨을 필요가 없지.’
흑도가 문파를 자칭하고, 그 문파는 시간에 지남에 따라 자연스레 녹아들어 하나의 문파로 탄생한다. 마공도 배척하지 않고 인정하는 이 세계에선 흔한 이야기였다.
나는 도양문의 정문을 열고 당당히 안으로 들어갔다. 염구석은 원작에서 도양문주에게 비무를 신청하고 무력으로 굴복시킨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대놓고 정문을 열었는데도 누구 한 명 나타나지 않았다.
“이리 오너라!!”
있는 힘껏 소리쳤다. 커다란 목소리가 문파 내부에 쩌렁쩌렁 울린다.
그제야 도양문의 문파원들이 부랴부랴 무기를 챙겨 밖으로 튀어나왔다. 보통 문파라하면 규율이 있기 마련인데 흑도 출신이라 그런지 도양문에서는 느슨함이 느껴졌다.
“누구지? 적인가?”
“혼자서 쳐들어왔다고?”
“엄청난 고수일지도 모르지.”
“젠장. 이런 적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공격해야 하나?”
“기다려라. 문주님이 나오실 거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나를 포위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대부분이 어중이떠중이들이다. 제대로 무공을 익힌 놈들은 2할 정도다. 그마저도 입식(入式) 초반 수준이다. 이 정도면 힘을 금제한 지금 상태에서도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다.
“너희들 같은 어중이떠중이들에게 관심 없다. 도양문주를 데려와라.”
내 질문의 답은 그들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내가 도양문주 은태망이다.”
그는 산군이라는 별호처럼 거친 외모였다. 2m에 달하는 거구는 근육질이고, 얼굴에는 수염이 마구잡이로 자라있었다. 손에든 참마도는 무려 3m에 달한다. 말이 아니라 산을 단숨에 베어버릴 것 같다.
“과연. 보통 기세가 아니군.”
“내가 할 말이다. 너 정도의 무인을 보는 건 오랜만이다. 어디 출신이냐?”
“적수문(赤水門)에서 온 한수평이다.”
천마신교가 준비해준 가짜 신분을 댔다.
“적수문? 처음 들어보는 문파군.”
“남쪽의 붉은 물이 흐르는 곳에서 왔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지.”
“그렇게 말해도 못 알아듣는다. 쳐들어온 목적이나 말해라.”
“당분간 이 도시에서 지내게 됐다. 도시를 한 번 둘러봤는데 마땅히 머물만한 곳이 없더군. 그러다 머물기 딱 좋은 건물을 발견했지.”
“흐흐. 미친놈. 여기서 머무시겠다?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솔직하게 말해라. 내 명성과 돈이 목적이라고!”
“그것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지. 도양산군 은태망. 나, 적수문의 한수평이 네놈에게 비무를 신청한다.”
“하하하! 비무라… 15년만인가? 나쁘지 않군. 그 패기는 인정해주마. 허나, 내겐 네놈과 비무를 할 이유가 없다.”
은태망이 왼손을 들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철성진을 준비해라.”
그의 부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진형을 갖췄다. 강자를 상대하기 위한 진법이었다. 이대로 은태망과 놈의 부하를 상대하게 되면 일이 성가셔진다.
나는 상자에서 손바닥만한 목함을 꺼냈다. 목함의 뚜껑을 연다. 단약 하나가 부드러운 천 위에 놓여 있었다.
“난 비무에 오인단(五引丹)을 걸겠다.”
오인단은 오기의 경지에 오를 때 도움을 주는 영단이다. 이게 있고 없고의 차이는 꽤 크다. 오기의 벽을 넘을 확률을 무려 3할 정도 올려주니까.
꿀꺽.
은망태의 목울대가 한차례 움직였다. 출지의 경지인 그는 언젠간 오기의 벽에 닿을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오인단을 가지고 싶을 터.
“…떨어져 있음에도 느껴지는 이 영롱한 영기… 오인단이 확실하군. 네놈, 제정신이냐? 그게 어느 정도의 보물인 줄 알고 비무에 거는 거냐.”
“너 또한 걸어라.”
“…뭘?”
“도양문.”
“…….”
은망태의 두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린다.
도양문과 오인단. 둘 중 가치가 높은 것은 오인단이다.
도양문 수준의 흑도 문파는 사람만 대충 모으면 창설할 수 있다. 그러나 오인단은 아니다.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영단이다.
“하, 하하. 멍청한 놈. 진심으로 내가 비무를 받아들이리라 생각하는 거냐? 우리는 네놈을 죽이고 오인단을 빼앗을 수 있다. 얌전히 오인단을 넘겨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지.”
나는 목함에서 오인단을 꺼냈다.
“비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오인단을 먹겠다.”
“머저리냐. 그 귀한 걸 지금 먹겠다고?”
“네놈에게 빼앗기는 것보다 낫지.”
“이 새끼….”
나는 입을 벌렸다. 오인단이 내 입과 가까워진다.
“멈춰!”
은태망이 외쳤다. 내 손도 우뚝 멈췄다.
“좋다. 네놈과 비무하겠다. 오인단을 목함을 넣어라. 오인단이 조금이라도 상처 입는다면… 널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내게 명령하지 마라. 오인단은 아직 내 거다.”
나는 집어 던지듯이 목함에 오인단을 넣었다. 은태망의 표정이 구겨진다.
“이 자식들아! 뭐해! 당장 판을 준비해라!”
“예! 문주님!”
그의 부하들이 비무 준비를 위해 흩어진다.
은태망이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뭐냐?”
“다시 생각해보니 오인단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진짜인지 확인할 테니 오인단을 꺼내라.”
“개수작 부리지 마라. 오인단은 날 이기고 가져가라.”
“쓸데없는 짓을 벌이는군.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은태망. 건방지게 굴지 마라. 곧 내 노예가 될 텐데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난 기회를 줬다. 넌 비참하게 뒈질거다. 팔과 다리를 자르고 연못에 던져주마. 내 귀여운 물고기들이 오랜만의 고기에 기뻐할 모습이 눈에 선하군.”
“넌 내 부하가 되는 순간 거세부터 하게 될 거다. 그리고 네 부하들이 네 똥구멍을 맛있게 따먹겠지. 우욱. 상상만으로 역겹군….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하늘이시여….”
“미친 새끼.”
곧 비무 준비가 끝났다.
건물 옆편에 있는 수련장을 비무장으로 바꾼 것이다. 비무장에 오른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은태망의 부하들이 빙 둘러싸고 있다. 놈들은 적의 가득한 눈으로 날 노려본다.
‘은태망이 비무에서 질 것 같으면 덤벼올 수 있겠군.’
이곳에서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넘기며 몸을 풀었다. 지금 내가 염구석을 연기하는 게 아니었다면, 당장 금제를 풀고 천마신공으로 다 죽여버렸을 것이다.
은태망이 비무장에 나왔다. 아까와 달리 갑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 갑옷이었는데 그 재질이 강철이 아니었다. 강철보다는 곤충의 갑각과 비슷해 보인다.
‘…요괴의 사체를 재료로 이용해 만든 갑옷인가.’
일종의 법기로 보면 될 것이다.
“오인단을 꺼내 저곳에 내려놓아라. 설마 오인단을 가지고 싸울 생각은 아니겠지? 나는 네놈의 비무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제 네놈이 최소한의 신뢰를 보일 차례다.”
“그러지.”
그가 턱짓으로 비무장 중심을 가리켰다. 나무 탁자가 있었다.
나는 품에서 목함을 꺼냈다. 뚜껑을 열어 오인단이 들어있음을 확인시켜주고 나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은태망은 몽롱한 눈으로 오인단을 바라보다가 나와 거리를 벌리며 비무를 준비했다. 나는 칼을 뽑아 양손으로 쥐었다.
그의 부하 한 명이 준비를 끝낸 우리 둘을 보고 외쳤다.
“비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