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199화 (1,199/1,497)

< 1199화 > 1199. 광명승천도

나는 의원에게서 치료받고 입마소장 배택주와 면담해야 했다.

좁은 공간에서 단둘이서 서로를 마주했다. 그러나 우리는 평등하지 않았다. 나는 자유로운 그와 달리 손과 발이 묶여 있었다. 배택주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압박을 느끼고 있다.

“123번. 왜 정 교관을 공격했나?”

배택주의 저음은 벽에 부딪혀 반사되어 메아리처럼 울렸다.

“공격이 아니라 대련 중에 일어난 사고입니다.”

“정 교관의 단전이 부서졌다. 무인의 단전이 부서졌다. 그 의미를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압니다. 무인으로서의 인생이 끝장난 거나 다름없죠.”

“그래. 너는 정 교관을 죽인 거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살아는 있지 않습니까.”

“왜 그랬지?”

“몇 번이나 말하지만, 사고였습니다. 대련을 먼저 시작한 건 교관이었습니다. 제게 칼을 쥐여준 것도 교관이었습니다. 의심스럽다면 1조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목격자는 100명이 넘습니다.”

“…….”

“그리고 저도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교관이 사용한 열양장에 화상을 입었죠.”

나는 배택주에게 보란 듯이 왼팔을 꿈틀거렸다. 손이 묶여 있어 왼팔을 들기 쉽지 않았다.

의원에게서 치료받았기에 붕대를 휘감고 있었다.

“아까 봤는데 진물과 녹은 피부 때문에 아주 징그러웠습니다. 원하신다면 보여드리겠습니다.”

“됐다. 의원의 말로는 약을 발랐다고 들었다. 흉터는 남을지언정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라더군.”

“다행이군요.”

“…정 교관은 너 때문에 입마소를 나가야 한다.”

“신교를 나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신교 내에서 알아서 살아가겠죠.”

이 세상에서 무인은 선망받는다. 무공은 힘이었고, 경지가 높아질수록 수명이 늘어난다. 평범한 사람들은 무인을 두려워하면서도 동경한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가 무인이 되는 건 아니다. 비율로 따지면 무인의 수는 5%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중에서 실력 있는 무인은 더욱더 적다. 대부분은 농부로서 살아간다. 이건 천마신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슬슬 배고픈데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합니까?”

“…123번. 경고하지. 얌전히 지내라. 교관의 명령을 무시하지 말고 대들지도 마라.”

“네. 알겠습니다. 근데 이번 일은 진짜 사고입니다. 그리고 이건 제 생각인데…. 첫날에 제가 한 놈을 눈깔 병신으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정 교관은 그놈의 사주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 일은 따로 조사해보겠다. 너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기서 대기해라.”

“여기서요? 밥은요? 제가 밥을 굶으면 좀 날카로워지는지라. 목욕도 하고 싶군요. 청결은 유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닥치고 여기서 대기해라.”

배택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여전히 구속당한 채였다.

‘배택주는 정신적으로 날 몰아붙이려고 했으나, 물리적으로 날 구타하진 않았어. 일은 잘 풀리고 있군.’

나는 붕대를 감은 왼팔을 바라봤다. 고통이 몰려왔다. 팔이 아프다. 완전 회복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안 돼. 지금 화상이 사라지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일주일… 아니, 사흘 정도는 다친 척해야지.’

그리고 나는 저녁 무렵에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듣기로는 나와 싸웠던 그 교관은 입마소에서 나갔다고 한다.

•••

“123번. 나와 대련하지 않겠나?”

88번, 소천마 천유운이 내게 접근하며 말을 걸었다.

교관의 단전을 작살 낸 사건 이후로 나와 대련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교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도 은근히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교관과 내 실력의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것도 한몫했다.

나는 대외적으로 입식 9단의 경지고, 입마소 교관의 평균 경지는 입식 8단 정도였다. 1조 교관의 평균은 출지 2단이다.

“나와 대련하겠다고? 88번 제정신이냐?”

“하하. 저번에 있었던 대련을 신경 쓰는 건가? 그건 사고일 뿐이었다. 내가 알고 다른 자들도 안다.”

천유운은 대인배처럼 굴었다. 실제 성격은 대인배가 아니다. 그저 대인배로서 모습이 남들에게 호감을 쌓기 쉽기 때문에 연기할 뿐이다. 천유운은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뒷공작을 부리는 놈이다.

지금 내게 다가온 이유도 내가 염구석이라는 걸 확신했기 때문이겠지. 그러라고 어제 은근슬쩍 상의를 벗어 등에 새긴 붉은 악귀 문신을 천유운에게 보여줬으니까.

원작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천유운은 염구석의 재능을 알고 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측근으로 만들려고 하겠지.

나는 처음에는 그와 대립하다가 나중에 충성을 맹세하면 된다. 놈이 원작 정보를 이용하듯, 나도 원작 정보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천유운은 검을 들었고, 나는 대도(大刀)를 잡았다. 화련비도와 달리 칼신이 넓적했다.

내겐 조금 어색한 무기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작의 염구석은 이 무기로 참귀도법(斬鬼刀法)을 펼치니까.

교관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천유운과 나를 주시하며 대련 시작을 알렷다.

나는 천유운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원작 초반 염구석의 전투법이었다.

“매섭군.”

천유운이 다리에 힘을 주며 내 칼을 쳐냈다. 그의 표정에 여유가 가득했다. 내가 금제로 힘을 감추고 있듯이, 놈도 힘을 감추고 있었다. 감추고 있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긴 힘들었으나, 오기(五氣)의 경지에 달했을 거라 짐작된다.

카앙! 캉!

검과 칼이 부딪치며 불똥이 튀었다. 힘으로 밀어붙이는데, 압도하기는커녕 도리어 내가 밀리고 있었다.

‘힘이 아니라 기술로 날 상대하고 있군.’

적당히 힘을 흘리면서 방어하고 있다. 내 입장에선 잡기술 수준이다. 내가 진심으로 나선다면 천유운의 기술을 파훼하고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안 돼. 여기선 내가 져야 한다.’

나는 치솟는 짜증을 억지로 억눌렀다. 여기선 계획대로 움직여야 한다.

천유운이 일부러 빈틈을 보였다. 미끼다. 일부러 보이는 틈이다. 저기에 파고드는 순간 대련은 내 패배로 끝난다.

‘그렇다고 안 들어갈 수는 없지. 지금 내 수준으로는 저 빈틈이 허수라는 걸 알아볼 실력이 없어야 하니까.’

천유운의 의도대로 움직여야 했다. 나는 약간 어설픈 참귀도법의 보법을 밟으며 그에게 파고들었다.

천유운이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회전시키더니 내 칼을 정확하게 쳐낸다. 손목이 그대로 꺾인다.

‘…완벽하게 당해주는 건 내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말이야.’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칼자루를 억지로 붙잡아 아래로 내리그었다. 칼끝이 천유운의 어깨를 스쳤다. 약간의 피가 튀었다. 천유운이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땡그랑!

손에 쥔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손목을 보며 혀를 찼다. 칼을 억지로 휘두른 대가는 확실했다. 손목이 완전히 부러졌다.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내가 졌다.”

나는 부러진 손목을 보며 씹어 뱉듯이 말했다. 교관이 달려와 나와 천유운의 사이를 막았다.

“…그 상태에서 칼을 휘두를 줄이야. 깜짝 놀랐다. 과연 대단하군.”

“대단하다고…? 놀리는 거냐? 난 패배자일 뿐이다.”

“진심으로 감탄했을 뿐이다. 나중에 또 대련하지 않겠나?”

“…….”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천유운을 바라봤다. 천유운은 씨익 웃고 있었다. 나를 향한 탐욕이 느껴진다. 놈은 이걸로 염구석의 재능을 확신한 것이다.

“그때는 이렇게 쉽게 당하지 않을 거다.”

“하하. 기대하고 있지.”

이날을 계기로 나와 천유운은 조금씩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천유운이 내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일은 잘 풀리고 있었다.

•••

입마소에 입소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입마소의 훈련 기간은 1년이고, 3개월 마다 시험을 치른다. 입소자들은 시험 성적에 따라 강등되어 낮은 조로 들어가거나, 최악의 경우 입마소에서 퇴출당할 수도 있었다.

입마소장 백태주는 입소자들을 광장에 모아놓고 말했다.

“지금부터 입마서고(入魔書庫)를 개방한다. 너희는 입마서고의 무공 중 하나를 익혀야 한다. 한 달 뒤에 입마서고의 무공을 얼마나 익혔는지 시험할 것이다.”

입마서고는 무공서적을 모아놓은 곳이다. 그러나 나는 특별히 기대하지 않는다. 입마서고는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무공만 모아놓은 곳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상승무공은 입마서고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다수가 고급 무공을 익힌 1조는 무덤덤했다.

2조는 긴장했다. 한 달 뒤의 시험으로 1조로 승급할 수 있고, 강등당해 3조로 내려갈 수도 있었다.

3조는 눈을 빛내며 기대했다. 그들은 1조와 2조와 달리 변변찮은 무공을 익힌 놈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입마서고의 무공은 기회였다.

“1조부터 들어간다. 입마서고를 둘러보고 교관에게 선택한 무공을 말해라. 저녁에 선택한 무공의 필사본을 줄 것이다. 입마서고 내에 있는 무공서는 그대로 두도록.”

내가 속한 1조가 먼저 입마서고에 출입했다. 나는 시큰둥했다. 여기에 있는 무공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숨겨진 기연? 아쉽지만 입마서고에 기연 같은 건 없다.

나는 혼자서 입마서고 내부를 돌아다녔다.

한 무공서적이 눈에 들어온다.

참귀도법(斬鬼刀法).

염구석이 익힌 도법이다. 그리고 내가 염구석을 연기하기 위해 익힌 도법이기도 했다.

참귀도법은 흔한 무공이었다. 적당한 돈만 있으면 암시장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오히려 무공을 구하는 것보다 암시장에 들어가는게 더 어려울 정도다.

‘이 지역 근처 산적놈들이 익히는 도법 중 하나가 참귀도법이지.’

나는 참귀도법을 지나쳤다. 참귀도법은 내가 이미 익히고 있기에 선택할 수 없었다. 익히지 않은 새로운 걸 선택해야 한다.

“네겐 이 보법을 추천하지.”

천유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천유운이 책장에 기대며 무표정한 미녀와 대화하고 있었다. 567번, 검마의 딸인 연예하다. 그녀는 현재 알음알음 마교제일미라 불리고 있으며, 훗날에는 명인마후(明刃魔后)라 불리며 천마신교 내에서 손꼽히는 강자가 된다.

“이유는 뭐죠?”

연예하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가 익힌 참정마신검(斬情魔神劍)의 효과 때문이다. 감정을 버리는 대신 강력한 힘을 얻는 마공이다.

“유령보(幽靈步)는 기척을 숨기는데 특화되어 있다.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보법으로 보여도, 익혀둬서 나쁠 건 없다. 언젠간 필요한 순간이 올테니까. 어쩌면 그게 가까운 미래일지도 모르지.”

“그렇군요.”

“어디까지나 내 추천일 뿐이다. 억지로 익힐 필요는 없다.”

“아뇨, 익히겠습니다. 입마서고의 무공들을 한 번 훑어봤는데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더군요.”

“그래. 후회하지는 않을 거다.”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예하는 그대로 떠났다.

천유운이 고개를 획 돌리더니 나를 봤다. 그가 씨익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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