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5화 > 1195. 광명승천도
하승희를 도와주며 며칠이 지났다.
나와 하승희는 거의 2주 동안 던전을 함께 드나들며 HB-1을 테스트했다.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치명적인 부작용은 없었다. 던전에서 HB-1을 사용하면 땅과 주변 식물의 양분을 모두 빨아들이지만, 던전에서만 그렇다. 던전의 특수한 환경이 영향을 끼친 모양이다.
‘헤빌의 촉진제는 안 그러는데.’
헤빌의 촉진제와 그 복제품인 HB-1에는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었다. 어느 한쪽이 눈에 띄게 뛰어난 건 아니다. 다만, 효율적인 면에서 오리지널인 헤빌의 촉진제가 약간 더 뛰어났다.
“이제 HB-1을 유통하는 일만 남았나?”
“아뇨. HB-1의 테스트는 아직 안 끝났어요. HB-1으로 키워진 식물들을 연구하고, 다른 것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지 테스트해봐야 하죠.”
“그럼 언제쯤 시장에 선보이려고?”
“최소 한 달. 어쩌면 두 달?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해요.”
“…난 네가 잘할 거라고 믿어.”
“믿어 줘서 참으로 고맙네요.”
하승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마 하승희는 모든 준비를 끝마친 뒤에 시장에 내보일 것이다. 한 달이나 두 달? 어림도 없지. 아마 내년 1분기쯤에 선보이지 않을까 싶다.
“그놈의 정체를 알아냈어?”
첫날.
던전에서 우리를 습격한 남자. 결국에는 자결한 놈.
“조사해봤는데 의미 있는 정보는 얼마 없어요. 그나마 출신 정도는 알아냈지만요.”
“어디 출신인데?”
“중국 소수 민족 출신이에요. 그의 나무 피리는 아티팩트였어요. 소리를 증폭하고 조종하는 능력이 있었어요. 객관적으로 가치가 높은 아티팩트는 아니에요.”
“…중국이 배후에 있는 거야?”
“습격자가 중국 출신이라고 중국이 배후에 있는 건 너무 일차원적인 생각이에요. 지금 중국은 자국 내의 상황을 살피느라 여유가 없어요.”
“요컨대 알아낸 게 없다는 거군.”
“지금 당장은요. …아티팩트를 추적하고 있어요. 아마 시간은 걸리겠지만, 성과는 나올 거예요.”
“그래.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고.”
나는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
[광명승천도를 선택했습니다.]
[유희를 시작합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광명승천도 세계에 들어왔다.
그동안 간간이 이 세계에 들어오고, 자동진행도 자주 이용했다. 이 세계는 시간적으로 여유로워서 자동진행을 이용하는 데 부담이 없다.
아니, 자동진행은 필수였다. 이 세계는 한 번 수련에 집중하면 년 단위가 획획 지나가니까.
‘자동진행이 없었다면, 지루한 시간을 넘기며 도만 닦았겠지.’
나는 낙월산 정상 부위를 바라봤다.
처음 낙월산에 왔을 때와 비교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낙월신녀 위유가 사용하던 낡은 건물은 온데간데 없고, 미국 부자의 저택을 떠올리게 하는 화려한 건물이 위치해 있다.
나와 미령이 편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만들었던 건물은, 우리보다 위유가 훨씬 빠져들었다. 최소 수백 년 동안 수준 낮은 문명에서 살던 그녀는 높은 수준의 문명 맛을 보자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큰 저택을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미령의 부탁과 조력이 있더라도 건물을 세우고 수영장을 만드는 건 귀찮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설령 그게 조립식 건물이라 하더라도. 위유의 명령같은 부탁이 아니었다면 적당히 즐기면서 살았을 것이다.
나는 저택으로 다가갔다.
후우우웅.
무언가를 통과한 느낌이 든다. 미령이 설치한 특수한 결계다. 이 결계 덕분에 멀리서 낙월산 정상을 보면 평범한 산 정상으로만 보인다.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이상 저택이 들킬 일이 없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오면 위유가 나설 것이다.
나는 위유가 어느 정도 경지인지 모른다.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 세계는 나이가 많을수록 강하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수명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인경(人境)은 총 7개로 나뉜다.
입식(入式) ‣ 출지(出志) ‣ 오기(五氣) ‣ 삼정(三頂) ‣ 조화(造化) ‣ 만상(萬象) ‣ 등선(登仙).
만상의 경지에 이르면 총 1,200년의 수명을 얻게 된다. 위유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최소 조화의 경지다. 나와 미령은 위유가 만상의 경지가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어쨌든 지금 이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평화롭기도 했고, 스승인 그녀에게 배우는 것들도 많았다.
‘어떻게 해야 위유를 따먹을 수 있을까.’
영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이어가며 앞으로 걸었다. 나는 낙월산 밑에 내려갔다가 오는 참이었다. 나는 주기적으로 낙월산 밑의 마을로 내려가서 필요한 것들을 사 온다. 식료품은 다른 세계에서 가져오면 되지만, 약초 종류는 이 세계에서 얻는 편이 훨씬 낫다.
저택 문을 열기 전에 고개를 올려 2층 테라스를 바라봤다.
선글라스를 낀 위유가 선베드에 여유롭게 앉아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파란색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하얀 피부와 탄탄한 몸매가 드러났다. G컵… 아니, H컵 가슴은 얼굴을 파묻고 싶을 정도로 풍만했다.
‘덮치면 1초만에 내가 죽겠지.’
그 꼰대 같던 여자가 현대 문명에 타락해 이렇게 변하다니…. 현대 문명은 엄청난 것 같았다.
“제자야. 시선이 따갑구나.”
위유가 칵테일이 든 유리잔을 들며 말했다.
“스승님의 아름다움에 잠시 눈이 멀었습니다.”
위유가 피식 웃는다.
“너도 남자니 어쩔 수 없는 본능이겠지. 이해하마.”
그녀가 칵테일을 쭉 들이켜더니 선글라스를 벗고 날 바라봤다.
“허나, 군사부일체라고 했다. 나는 여자니, 너의 어머니의 가깝지. 설마 어미에게 욕정을 품는 것이냐?”
우리 엄마 강원도에 있다.
그 말을 목 끝까지 올라왔으나, 애써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스승님은 제가 불편하십니까?”
“어제 본 영화가 근친에 관한 거였지. 꽤 충격적이더구나. 그 영화가 너무 인상 깊어서 한 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 거라.”
“물론 신경 쓰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미령의 말로는 위유가 브라질리언 왁싱에 흥미를 느꼈다는 말을 들은 지가 일주일이 지났다. 어쩌면 지금 위유의 보지는….
천안(天眼)을 사용해 투시해보고 싶은 기분을 꾹 눌러 참았다. 위유 정도의 실력자라면 내 시선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을에는 별일 없더냐?”
“네. 평소와 같았습니다. 아, 근처에 산적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돋더군요.”
“산적의 출몰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지. 약초는 창고에 넣어두거라.”
“네. 스승님.”
“그리고….”
위유는 옆에 놓인 테이블에서 스마트폰을 쥐었다. 능숙하게 시간을 확인한다.
“40분 뒤에 내게 오거라. 영천류(影天流)와 천단뢰결(天斷雷結)의 연구가 끝났다.”
“드디어 말입니까!”
“그래. 아 참, 올 때 모히또 한 잔 부탁하마.”
위유는 다시 선글라스를 끼며 느긋하게 햇빛을 즐겼다. 그러나 그녀의 새하얀 살결이 햇볕에 그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햇빛 따위에게 당하기엔 그녀가 너무 강했다.
나는 저택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부는 무척 넓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거실을 돌아다니던 로봇청소기들이 내 발길을 피해 사방으로 달아났다.
술법이 걸려 있는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남궁설이 창고 내에 있었다. 그녀는 약초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남궁설은 최근에 위유로부터 연단술을 배우는 중이다.
“가가! 왔어?!”
다다다다다.
남궁설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작달막한 체구는 점점 성숙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하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방금 왔지.”
“가가가 없어서 너무 외로웠어.”
남궁설이 무언가를 원하듯 나를 바라본다. 허나 지금 나도 바쁜 몸이었다.
“스승님이 날 불렀어. 수련하러 가야 해. 여기 이것들은 마을에서 사온 약초야.”
“스승님이 부르셨다면 어쩔 수 없지.”
“남궁린과 미령은?”
“린 언니는 항상 같아. 수련하고 있어. 미령 언니는 방에 들어가 있고.”
“게임이나 하고 있겠지.”
나는 남궁설의 허리를 안으며 입을 맞췄다. 입술이 비벼지고 혀가 섞인다.
“앗, 으응… 가가….”
남궁설의 가슴을 만졌다. 뒤늦게 발육이 시작된 가슴은 예전보다 커졌다. 나는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다가 떨어졌다.
위유는 몇 년 전에 해가 떠 있는 동안 낙월산에서 섹스 금지를 선언했다. 몰래 하면 되지만, 걸리면 일주일 동안 강제 폐관 수련에 처하게 된다. 그때 그녀가 한 말이 가관이었다.
-여기가 내 집인지, 섹스촌인지 모르겠군.
미령을 따라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더니 입담에 거침이 없어졌다.
나와 남궁설은 가볍게 키스만 하고 떨어졌다.
나는 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위유가 주문한 모히또를 제작… 하지 않고 [백환] 세계에 들어가 메이드에게 모히또를 만들게 시켰다. 그렇게 모히또 한 잔을 들고 위유가 있는 2층 테라스로 들어갔다.
“10분 만에 왔군. 설이와 만났을 텐데.”
“하하. 설이와 인사는 나눴습니다.”
“평소였다면 아슬아슬하게 왔겠지. 그 시간을 고려해서 40분을 준 거다만…. 뭐, 됐다.”
위유는 우아한 손으로 모히또를 가져갔다.
팔을 약간 움직였을 뿐인데 비키니 수영복에 감싸인 가슴이 출렁인다. 가슴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위유는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실제로는 나를 유혹하는 게 아닐까 하고. 이럴 때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독심술이 간절해진다.
“맛있구나.”
그녀는 모히또를 마시면서 어느 한 공터를 바라봤다. 그곳에서 남궁린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위유는 2년 전에 남궁린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위유의 말로는 싹수가 보여서 그렇다는데… 내가 볼 때는 그냥 정이 들어서였다.
덕분에 족보가 엉망이 되었다. 공식적인 내 아내인 남궁설이 위유의 첫째 제자고, 내가 둘째, 남궁설의 언니인 남궁린은 막내였다.
“영천류와 천단뢰결이 기대되느냐?”
“예. 기대로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으니까요.”
나는 선베드에 기대어 반쯤 누워있는 위유의 몸매를 곁눈질로 훔쳐보며 말했다. 연기 특성 덕분인지 그녀는 내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너무 기대하지 말거라.”
“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위유는 모히또 한 잔을 전부 마시고 선베드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건물 내로 들어가며 말했다.
“잠깐 기다리거라.”
5분 정도 기다리자 그녀가 나왔다.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포니테일로 묶었다. 목에는 호루라기를 불었고, 아까와는 다른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그녀는 선글라스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가자, 제자야.”
“어디로요?”
“별빛이 떨어지는 곳으로.”
위유가 있어 보이게 말했지만, 그곳은 낙월산에 있는 폭포였다.
성광 폭포.
높이 80m의 폭포다. 물놀이가 땡길 때 자주 찾는다. 여기 폭포 아래는 수영장과는 다른 맛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