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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193화 (1,193/1,497)

< 1193화 > 1193. 테스트

놈을 발견했다.

놈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바위 위에 앉아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은 곱슬했고, 두 눈은 움푹 파여있었다. 놈은 우리를 보더니, 입에 대고 있던 나무 피리를 내렸다.

“B등급 헌터 성유진, 세진 그룹의 하승희. 맞나?”

날카로운 목소리는 어딘가 어색한 한국어를 말했다. 일부러 어색하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알면서 찾아왔으면서 뭘 확인하고 있는 거지?”

“예전에 타겟이 아닌 무고한 헌터를 죽인 적이 있었다. 나는 타겟이라 믿었다. 근데 아니었다. 한국인 얼굴은 다 비슷비슷하더군.”

“나는 성유진이다. 그쪽은?”

“알 필요 없다.”

“이 새끼가!”

놈에게 화련비도를 휘둘렀다. 검기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놈은 백스텝을 밟으며 가볍게 검기를 피했다.

그의 몸놀림을 본 나는 혀를 찼다. 못해도 B급이다.

“성질이 급하군.”

“그게 킬러가 할 말이냐?”

“일단 진정해라. 나는 너희를 죽일 생각이 없다.”

“그게 말이야, 방구야? 이쪽은 너 때문에 죽을 뻔했다.”

“그래서 죽었나? 포그네이크의 습격은 내가 보내는 인사다. B등급 헌터인 네가 있는 이상 포그네이크 수백 마리 따위로는 어쩌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좆같은 인사였어. 어느 나라 출신이냐?”

“…….”

놈이 입을 다물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는 철저히 숨길 생각인 것 같았다.

‘저놈이 정말로 우릴 죽일 생각 없이 포그네이크로 조종해 우릴 공격했다면… 그 목적은 내 힘을 조금이라도 빼는 거겠지.’

물론 나는 놈의 말을 믿지 않는다. 끝까지 놈을 경계한다.

‘…어느 나라 출신이지? 동남아시아 쪽은 아니고… 중국과 일본 쪽인 것 같은데… 어쩌면 한국인일지도 몰라. 일부러 한국말을 어눌하게 하는 거지.’

나는 생각을 끊었다. 의심이 의심의 꼬리를 잡는다. 이런 생각을 계속 이어나가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답은 눈앞에 있다. 놈을 붙잡아 심문하면 될 일이다.

놈의 시선은 하승희에게 향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다. 순식간에 식물을 키우는 약. 그 약을 내놓는다면 너희를 건들지 않겠다. 이대로 우리는 아무 일 없이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아무 일 없기는 개뿔이.”

여기서 HB-1을 넘겨주는 순간 하승희의 계획과 꿈은 박살 난다. 나는 그걸 바라지 않았다. 하승희는 야망을 위해 자신의 몸을 걸고 나와 거래했다. 그녀가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였다. 여기서 저놈에게 굴복하면, 그녀의 가치와 매력이 손상된다.

‘찰나.’

지면을 힘껏 박차며 도약했다. 놈의 눈동자가 한 박자 늦게 내 뒤를 쫓는다. 내 움직임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놈이 나무 피리를 양손으로 꽉 쥐었다. 화련비도의 붉은 칼날이 그의 오른쪽 어깨에 떨어진다.

쾅!

충격파가 일어났다. 내 몸이 뒤로 날아간다. 나는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리며 바닥에 착지했다.

‘…바람?’

충격파가 일어나기 직전에 봤다. 놈의 몸을 감싸고 있는 바람의 존재를. 바람이 놈의 몸을 지키고 있었다.

놈이 나무 피리를 입에 가져갔다.

파지지직.

내 몸에서 전류가 튀었다.

직후, 하늘에서 벼락 한 줄기가 놈에게 떨어진다. 놈은 벼락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피하지도 않는다. 그의 몸을 지키고 있는 바람의 갑옷이 벼락까지 막아냈기 때문이다.

‘진세영과 같은 바람 조작 능력인가?’

놈이 나무 피리를 불었다.

포그네이크를 조종하는 것처럼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게 아니었다. 그건 연주였다. 피리를 통과한 바람이 음악이 되었고, 음악은 귀를 통해 머릿속으로 파고든다.

“아아아아악!”

하승희가 비명을 지르며 귀를 붙잡았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던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새끼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우선 하승희부터 구해야 한다.

나는 손아귀에 뇌전을 모았다.

영천류(影天流) 극기(極技) 산뢰(散雷).

뇌전을 허공에 뿌린다. 뇌전이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퍼졌다. 공간에서 요동치던 마나가 산뢰에 내몰리며 사라졌다. 귀를 막고 있던 하승희가 손을 내렸다. 그녀의 표정도 아까보다 편해졌다.

“이 주변의 마나를 일시적으로 몰아낸 건가? 대단하군.”

무뚝뚝하게 말한 놈은 다시 피리를 연주했다.

아까와 소리가 달랐다. 놈의 몸을 감싸고 있던 바람이 압출을 해제하듯 뿜어져 나온다. 바람은 연주 소리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아직 뻗어 있는 하승희를 힐끔거렸다. 보이지 않고, 직선이든 곡선이든 자유롭게 움직이는 바람으로부터 그녀를 지키는 일은 요원한 일이었다.

‘스톰브레이커.’

내 앞에 거창이 소환되었다. 나는 한 손으로 거창을 쥐고 하승희에게 던졌다. 하승희가 깜짝 놀랐다. 그녀가 거창을 막으려는 듯이 정면으로 손을 내민다. 거창은 그녀의 손을 꿰뚫기 직전에 조각조각 분해되더니,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갑옷이 되었다.

스톰브레이커의 방어력은 내가 인정하고 있다. 이걸로 하승희에 대한 걱정을 덜어도 되겠지.

“…유진 선배. 이런 물건이었다면 미리 말씀해주셔야죠. 전 선배가 절 죽이려는 줄 알았어요.”

“그럴 시간 없었어.”

바람이 불어온다.

칼을 쥔 손의 피부가 바람에 베이더니 핏방울이 튀어나왔다. 나는 서둘러 마나를 움직여 육체를 강화했다.

“선배. 이거 갑옷인데 의외로 착용감이 나쁘지 않네요. 갑옷이 아닌 것 같아요. 제게 팔지 않으실래요?”

“안 돼. 그거 하나밖에 없어.”

놈의 연주가 더 격렬해진다. 그에 호응하듯 바람 또한 강력해진다.

‘천안.’

[천안(天眼)을 개안합니다.]

바람에 섞인 마나가 보였다. 바람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바람과 마나는 피리 소리에 맞춰 확산하고 있다.

나는 칼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화련비도가 떨렸다. 붉은 칼날에 파란 검기가 서린다.

형태가 없는 바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벨 수 있다.

칼을 내리그었다.

내 정면의 바람이 사라진다. 길이 열렸다. 망설임 없이 길로 뛰어들었다.

놈이 당황하는 얼굴이 보였다. 놈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나를 비추었다. 놈의 손가락이 다급하게 피리를 연주했다.

바람 장막이 생겨난다. 끊어야 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마나의 흐름.

‘여기다.’

칼을 휘두른다. 바람 장막은 손쉽게 사라진다.

삐이이이이이익!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발아래의 땅이 위로 솟구쳤다. 천안 덕분에 미리 알아차렸다. 솟구치는 땅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놈에게 달렸다.

‘찰나.’

주위가 느려진다.

나는 놈의 몸을 감싸고 있는 바람 갑옷의 시작점을 확인했다. 놈의 바람 갑옷은 가슴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놈의 능력은 바람이 아니라 소리야. 소리로 바람과 땅, 몬스터와 사람을 조종하는 거지. 아마 조건이 있겠지.’

바람 갑옷의 정체는 심장 박동이다. 그 일정하면서도 미세한 소리가 바람 갑옷을 유지하고 있다.

‘이 새낀 날 너무 얕봤어. 내가 B등급이긴 해도 실력까지 B등급인 건 아니지.’

놈의 어깨를 향해 칼을 내린다.

바람 갑옷이 칼날을 밀어내려고 한다. 충격파가 일어난다. 알고 있는데 당할 수 없었다. 나는 억지로 버티며 힘을 주었고, 칼은 바람 갑옷을 뚫고 놈의 오른쪽 어깻죽지를 그대로 잘라냈다.

“끄윽….”

놈은 새어나오려는 비명을 삼켰다.

‘…음?’

비명을 삼킨 게 아니었다.

비명을 모으고 있었다. 놈의 목울대가 몇 차례 꿈틀대고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놈은 이어 입을 크게 벌리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소리는 곧 물리력이 되었다. 나는 주변에 있던 나무와 함께 뒤로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괜찮다. 이 정도는 약간의 타박상일 뿐이다. 몸을 일으켜 세운다.

발 옆에서 덩굴이 튀어나오더니 내 발목을 붙잡았다.

“…몬스터?”

발을 올려 덩굴을 뜯어냈다.

콰콰카캉!

지면에서 붉은 꽃봉오리가 튀어나왔다. 3m에 달하는 거대한 꽃이 피어난다. 꽃 속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했고, 꽃 아래에는 덩굴 촉수 20개가 채찍처럼 사방을 훑는다.

알락스.

식물형 몬스터다.

이 던전의 보스급 몬스터다.

삐이익! 삐리리릿, 삐리릭!

놈이 피리를 계속 불었다. 그에 맞춰 알락스가 내게 다가온다. 알락스도 놈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쯧. 혀를 찼다. 알락스가 다가오는 반면에 놈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알락스로 날 붙잡게 만들고 도망칠 생각이다.

‘보스 몬스터라 단번에 죽이는 건 힘든데…. 그렇다고 놈을 놓치면 HB-1의 정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겠지.’

어느 쪽이 더 급한가.

고민할 것도 없다. 나는 알락스를 무시하고 놈을 향해 뛰었다. 알락스의 덩굴이 내 등을 노린다.

파직.

뇌전으로 알락스의 덩굴을 태우려고 할 때였다. 하승희가 내 등 뒤에 나타나 능력인 보이지 않는 손톱으로 덩굴을 잘라냈다.

“저 남자. 잡으세요. 이 괴물은 제가 맡을게요.”

“보스 몬스터인데 괜찮겠어?”

“이 갑옷, 정말 좋네요. 입고 있으니 힘이 넘쳐나요.”

스톰브레이커의 성능은 주인의 실력에 따라 달라진다.

하승희가 스톰브레이커를 걸치고 있으나, 주인은 여전히 나였다. 즉, 내 마나로 스톰브레이커가 유지되고 있으며, 그 성능은 내가 직접 걸쳤을 때보다 약간 떨어지는 정도다.

그리고 그 정도면 알락스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부탁한다.”

알락스를 그녀에게 맡기고 도망치는 놈을 뒤쫓았다.

‘가속.’

가속을 썼는데도 놈을 잡는 건 쉽지 않았다. 놈은 바람을 이용해 거의 날아가고 있었다. 거기에 나를 따돌리기 위해 땅의 흔적을 바꾸고 있다. 천안이 아니었다면 속았을지도 모른다.

‘팔이 잘린 상태니 멀리 못 도망칠 거다.’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놈의 등이 육안으로 보였다.

영천류(影天流) 뇌섬(雷閃).

뇌전을 머금은 검기를 날렸다. 검기를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베어 가르며 날아가 놈의 등에 닿았다. 놈이 피를 토하며 고꾸라진다. 그의 나무 피리가 흙바닥을 굴렀다.

“이제야 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군.”

놈에게 다가갔다. 엎드린 놈의 옆구리를 걷어차 정면으로 눕혔다.

“콜록, 콜록!”

놈이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놈이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간다. 나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놈의 오른팔을 자르고 검기가 등을 베긴 했으나, 헌터 입장에서 이 정도로 심각한 치명상은 아니었다. 놈은 B급 헌터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독을 먹었나?”

“정보는… 줄 수 없다.”

포션이 있어도 놈을 치료할 수 없다. 포션은 독을 없애지 못한다. 해독제? 범용 해독제가 통할 정도로 쉬운 독을 자결용으로 가지고 다닐 리 없다. 거기다 이놈은 이미 심장이 파괴됐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심장을 파괴한 것이다. 독과 심장 파괴. 둘 다 사용할 줄이야. 용의주도한 놈이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죽으면 모은 돈도 못 쓰잖아. 아니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너는 어떤 정보도 갖지 못한다.”

“네 얼굴 봤어. 네 시체는 많은 걸 말해줄 거야. DNA 검사라고 아냐?”

“내 정보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놈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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