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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192화 (1,192/1,497)

< 1192화 > 1192. 테스트

나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한차례 둘러봤다.

단단한 땅과 묵직하게 솟은 나무, 그리고 새하얀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특별한 건 없었다. 하승희가 왜 이 장소를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지켜봤다.

하승희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렸다. 듣기로는 비싼 아티펙트라고 한다. 가방의 용량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고, 무게도 줄여준다고 한다. 얼핏 듣기로는 가격이 1,000억이 넘는다던가.

하승희의 가방은 전혀 부럽지 않았다. 내게는 하승희의 가방보다 더 편리한 인벤토리가 있으니까.

그녀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녹색 액체가 든 유리병을 꺼냈다. HB-1. 헤빌의 촉진제의 복제품이다. 겉모습은 원본이랑 다를 바 없었다.

“여기서 테스트한다고? 아무것도 없는데? 나무에 쓸 생각이야?”

“뭘 모르시네요. 저기에 벨라푸릭이 있잖아요.”

“벨라… 뭐?”

그녀가 수풀을 뒤적거렸다. 풀때기를 하나 발견하고 씨익 웃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땅을 긁으며 풀때기를 캐기 시작했다.

“벨라푸릭. 던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초 중 하나죠. 해열 효과가 탁월해요. 특히 뿌리는 포션의 재료 중 하나예요.”

“……포션의 재료면 꽤 비싸겠는데.”

“네. 보통 12만 원에 거래되죠.”

벨라푸릭을 채취한 그녀는 뿌리를 갈기갈기 찢더니 사방에 흩뿌렸다. 그리고 HB-1 한 병을 땅에 들이붓는다.

갈기갈기 찢어 버렸던 뿌리 조각이 꿈틀대며 재생한다. 뿌리는 땅 아래로 내려가고, 윗부분은 줄기가 되어 자라기 시작했다 나와 하승희는 뒤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봤다. 벨라푸릭이라는 약초가 자라기까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벨라푸릭의 열매가 땅에 떨어지고, 땅에 떨어진 열매가 자라며 번식한다.

3분이 지나자 주변 일대가 벨라푸릭으로 가득했다.

“이 정도면 대충 300포기 정도 되겠네요. 만족스러워요.”

“12만 원이 300개면….”

“3,600만 원이요.”

“HB-1은 얼마에 팔 생각이야?”

“개당 5,000만 원에 팔 생각이에요.”

“그렇게 비싸게?”

“싼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개당 50만 원 이상 하는 약초의 종자만 구하면 몇 배나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어요. 뭐, 약초 가격은 더 내려가겠지만요.”

“네가 HB-1을 독점하고 약초를 키워 판매하는 건? 그럼 돈을 더 벌 수 있잖아.”

“독점은 문제가 생겨요. 가장 큰 문제는 쓸데없는 적을 만들게 된다는 거죠. 전 기왕이면 적보다 아군을 많이 만들고 싶어요.”

스으으으윽.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나와 하승희는 주위를 둘러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벨라푸릭을 제외한 식물들, 나무와 수풀이 비쩍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부작용이 강하긴 하네. 지구에서도 이랬어?”

“…아뇨.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벨라푸릭은… 무사하군요. 던전에서만 이러는지, 아니면 벨라푸릭이라는 약초가 특별한지 알아내야겠어요.”

그녀는 나무 상자를 꺼내 벨라푸릭을 보관했다. 상자에서 마나가 느껴진다. 특수한 효과를 가진 상자인 모양이다.

“가져가려고? 버리긴 아깝긴 하지.”

“이것도 연구해야 해요. 겉은 멀쩡하지만… 내부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우리는 다시 움직였다. 다른 약초를 발견했다. 아까처럼 HB-1을 이용해 약초를 순식간에 재배했다. 결과는 벨라푸릭 때와 똑같았다. 주변의 식물들이 단번에 말라비틀어졌다.

“…다른 던전에서도 똑같이 테스트해봐야겠어요. 도와주실 거죠?”

“그래.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나는 정면을 바라봤다.

잔잔한 호수가 있었다. 지름만 1km는 될 것 같은 호수다. 수면 위에는 분홍색 연꽃이 떠 있었다.

신비롭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허나 나와 하승희는 호수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이 보기 좋은 호수면 아래에는 D등급 몬스터인 포그네이크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포그네이크는 개구리의 머리와 다리를 가진 뱀이다. 놈들은 길쭉한 혀로 공격한다. 혀끝은 송곳처럼 날카롭고, 독이 있다.

“선배. HB-1을 물에 뿌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요?”

“물에 뿌려본 적이 없어서 몰라.”

“물에 희석되면 효과가 작아져요. 물이 너무 많으면 효과가 사라져버리고요.”

“HB-1을 여기에 뿌려도 효과는 없겠네.”

“그건 아직 몰라요. 여긴 던전이잖아요.”

하승희는 가방에서 HB-1 3병을 꺼냈다. 그녀는 HB-1 3병을 단번에 호수에 부었다. 녹색 액체는 희석되는가 싶더니 근처에 있는 연꽃에 흡수되었다. 변화가 시작되었다. 연꽃잎이 떨어지고, 연꽃 받침에서 연씨를 뱉어낸다. 연씨는 그대로 호수 바닥에 가라앉더니 빠르게 성장했다.

“다른 약초들과 반응이 똑같군요.”

문제가 발생했다. 주위에 있던 다른 연꽃이 말라비틀어져 죽은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물이 오염되어 탁해진다. HB-1의 영향을 받은 연꽃들만이 고고한 자태를 뽐냈다.

하승희가 연꽃을 채취하기 위해 손을 뻗는다. 나는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물속에서 포그네이크 한 마리가 튀어나와 하승희의 머리가 있던 허공에 혀를 쭉 내뻗었다. 혀의 길이는 무려 1m가 넘었다.

“포그네이크?! 호수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갑자기 왜…?!”

“물이 오염돼서 빡쳐나 보지.”

앞으로 나가며 허리춤에서 화련비도를 뽑아 휘둘렀다. 포그네이크의 혀를 자르고 대가리를 쳤다. 쉽게 죽였다. 포그네이크는 기습만 피하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다.

‘그 기습이 피하기 힘들어서 문제지.’

나는 화련비도를 칼집에 넣지 않고 경계했다. 한 놈만 공격해오리라는 법은 없었다.

“유진 선배. 연꽃 좀 채취해주세요.”

“알았어. 1개면 돼?”

“5개요. 연구용으로 필요해요. 뿌리까지 뽑아주세요.”

호수 가까이 다가가 왼손을 뻗는다. 연꽃을 잡아당겼다. 뿌리까지 뽑는 건 실패했다. 줄기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걸로 만족해.”

“…뿌리는요?”

뿌리까지 뽑으려면 호수에 직접 들어가야 했고,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네가 직접 하던가.”

“……도와주기로 했으면 제대로 도와주시죠?”

“물에 들어가기 싫어.”

“그래요? 오늘 예약한 호텔은 욕조가 훌륭하기로 소문이 나 있는데… 선배가 욕조에 들어갈 일은 없겠군요.”

“……욕조 플레이인가. 나쁘지 않지.”

나는 호수로 발을 넣었다. 포그네이크 몇 마리가 헤엄쳐서 기습해온다. 칼을 물에 휘둘렀다. 물과 함께 포그네이크들의 시체가 위로 솟구쳤다.

‘귀찮군.’

파지직.

손아귀에서 뇌전이 번뜩인다.

“번개는 쓰지 마세요. 연꽃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알았어.”

연꽃을 뿌리부터 조심스럽게 캐낸다.

‘이런 허드렛일은 노예들이나 하는 일인데….’

귀찮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생한 만큼 오늘 밤에 하승희가 서비스해 줄 것이다.

‘이렇게 날 부려먹었으니… 오늘밤엔 하승희의 발정 댄스를 봐야 수지가 맞겠어.’

삐이이이이이익.

네 번째 연꽃을 채취하고 있는데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울렸다.

피리 소리 같았다. 연주 없이 그저 강하게 불어대는 피리소리.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잇!!!

소리의 발생지를 확인한다. 여기서 300m 정도 떨어진 숲속.

‘이 던전에 저런 소리를 내는 몬스터는 없어. 사전 조사가 잘못됐나? 그게 아니면….’

몰래 던전에 들어온 누군가의 짓이거나.

생각에 거기 닿는 순간, 나는 손에 쥔 연꽃을 갖다버리고 호수 밖으로 나가 하승희 곁에 썼다.

“선배?”

“…온다.”

하승희를 내 등 뒤로 밀어내고 정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면에서 포그네이크 수십 마리가 튀어나와 달려든다.

파지지지지직.

손바닥에 모인 뇌전을 방전했다. 수십 개의 뇌전 줄기가 포그네이크를 휩쓴다. 감전당한 포그네이크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삐이이이익, 삐이이이이이잇!

또 피리 소리가 울렸다.

수십 마리의 포그네이크가 호수 밖으로 튀어나온다. 뱀의 몸통에 개구리의 다리를 가진 놈들은 땅 위에서 활동할 수 있다. 더 끔찍한 건 뱀처럼 기어 다니지 않고 개구리처럼 뛰어다닌다는 것이다.

“…피리 소리가 울릴 때마다 포그네이크가 나타나고 있어요. 피리 소리에 조종당하는 건가요?”

헌터의 능력은 가지각색이다. 피리 소리로 몬스터를 조종하는 능력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몬스터를 조종하는 피리라거나.

“우리 몰래 던전에 들어온 모양이야.”

“…던전 입구에 협회 직원들이 지키고 있었어요.”

“빈틈을 노려 안에 들어왔겠지. 입구 지키던 협회 직원 수준은 다 거기서 거기더구만, 뭐.”

파지지지직.

뇌전을 뿌리며 달려드는 포그네이크 수십 마리에 대항한다. 다행히 놈들은 전기 내성이 없는 D등급 몬스터다. 뇌전을 뿌리는 것만으로도 수십 마리를 죽일 수 있다.

‘내 마나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말이야.’

삐이이잇! 삐이이이이이이잇!

첨벙첨벙첨벙.

호수에서 포그네이크가 튀어나온다. 놈들은 정확하게 나와 하승희를 노리고 있다. 나는 하승희와 함께 피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었다.

“…선배. 피리를 부는 놈은 여기서 죽여야 해요.”

싸늘하게 얼굴은 굳힌 하승희가 말했다. 그녀가 우리 뒤를 쫓는 포그네이크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녀의 능력인 보이지 않는 손톱이 포그네이크를 5등분으로 토막 낸다.

“하준수의 짓이야?”

“아뇨. 그건 아닐 거예요. 큰오빠는 이미 기회를 날렸어요. 물리적으로 절 해할 수 없죠. 그랬다간 영영 후계자 자리를 잃게 될 테니까요.”

“회장에게 안 들키면 되잖아.”

“할아버지가 큰오빠에게 감시를 안 붙여 뒀을 리 없어요. 어쨌든, 놈은 여기서 죽여야 해요. HB-1은 아직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되니까요!”

“놈의 정체에 짐작 가는 곳 있어?”

“…너무 많아서 탈이죠. 가장 많은 곳은 경쟁 기업들인데….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기업은 다섯 곳이 넘어요. 길드나, 해외 기업까지 포함하면… 머리 아프네요. 차라리 놈을 붙잡아서 심문하는 게 편하겠어요.”

“네 말대로 잡아서 심문하면 돼. 그게 뭐가 어렵다고.”

“선배!!”

하승희가 소리쳤다.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포그네이크 수백 마리에게 포위당했으니까.

“이렇게 우리를 포위하는 건 말도 안 돼요. 포그네이크의 지능은… 평범한 짐승 수준이에요.”

“피리 부는 놈이 조종했겠지.”

심드렁하게 대답한 나는 화련비도를 양손에 쥐었다. 파지지직. 화련비도의 칼날을 타고 붉은 뇌전이 흐른다.

쒸이이이이익!

포그네이크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일제히 입을 벌리고 내뻗는다. 그 모습은 흡사 수백 개의 촉수가 우리를 노리는 것 같았다.

콱!

나는 화련비도를 땅바닥에 꽂았다.

붉은 뇌전이 땅속으로 스며들더니 곧 하늘로 치솟으며 사방으로 퍼진다. 수백 마리의 포그네이크가 감전당하고, 나무와 수풀에 불이 붙었다.

“가자.”

“마석 안 챙겨요? D급 최하위 마석이라 해도… 저 정도 양이면 잭팟이 터진 수준인데요.”

“푼돈에 관심 없어.”

놈을 발견했다.

놈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바위 위에 앉아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은 곱슬했고, 두 눈은 움푹 파여있었다. 놈은 우리를 보더니, 입에 대고 있던 나무 피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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