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9화 > 1189. 15일
활활 불이 타올랐다.
시뻘건 화마의 불길이 마을을 삼킨다.
나와 무녀, 나카가미 리사, 하가와 료코, 무녀의 부하들은 마을 앞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구경 중에서 불구경이 최고라더니, 불꽃에는 마력이 있어서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캠프 파이어도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꼭 이렇게 불로 태워야 해? 이 마을에 들어간 돈이 보통이 아닐 텐데?”
내가 무녀에게 물었다.
무녀는 불타는 마을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와다 쿄시로라고 했던가요. 그자에게 이미 알려진 곳입니다. 재협상이 끝난 야쿠자와 달리 그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저희는 그를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을이라도 확실히 정리해야 합니다. 증거가 남지 않도록.”
“…….”
하가와 료코를 힐끗 봤다. 그녀도 나처럼 불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이 마을을 이렇게 없애도 되는 거야? 듣자 하니 몇십 년은 있었다는 마을인 것 같은데.”
“대략 2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역사는 과거일 뿐입니다. 과거가 방해된다면 정리해야죠.”
“언론은? 이 정도 화재면 기자가 냄새도 맡을 것 같은데.”
“정부의 도움을 받아 이미 손을 써놓았습니다. 최근 일어난 재해 덕분에 의심을 사는 일은 없겠죠.”
“이제부터 어떡할 거야? 또 이런 마을을 만들려고?”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비효율적이죠. 이번 정리에 사용한 돈이 꽤 많습니다. 일본 정부와 야쿠자는 웃는 얼굴을 앞세우고 뒤에선 절 노리고 있겠죠. 안전을 위해 당분간은 혈단의 생산에만 집중할 생각입니다.”
무녀가 담담히 일정을 말했다. 말이 뒤로 갈수록 그녀의 미간이 좁혀지며 주름이 잡혔다.
“뭐가 마음에 안 들어?”
“…돈과 시간이 문제입니다.”
“시간은 어쩔 수 없다 쳐도 돈은 왜? 돈이라면 많지 않아? 우리에게 30억 엔을 제안할 정도로.”
“42억 엑. 제가 사용할 수 있는 돈입니다.”
“많네.”
“부족해요.”
“어디에 쓰려고?”
“20억 엔은 정치가들에게 로비할 자금입니다. 10억 엔은 야쿠자들에게 뿌려야겠죠.”
“야쿠자는 야쿠자 놈들이 먼저 잘못했잖아. 그놈들은 입 닥치고 있어야지.”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면 얼마나 좋을까요. 성 님이 말하는 제 사업은 일본 정부와 야쿠자의 협력이 필수예요.”
“……나머지 12억 엔은?”
“생산 시설에 재료 수급에 투자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많이 빠듯해요.”
“혈단 생산에 그렇게 돈이 많이 들어?”
“마약이 들어가니까요.”
“아.”
바로 납득했다.
혈단에는 다섯 가지의 마약이 들어간다. 여긴 일본이다. 어찌저찌 마약을 구한다고 해도 그 가격은 보통이 아닐 것이다.
“돈 문제는 내가 도울 수 있을 것 같군.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혈단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거지?”
“네. 사람 사체는 마약보다 더 구하기 쉬우니까요. 그런데 한, 두 푼으로는 안 돼요. 성 님은 혹시 부자신가요?”
“아니. 개털이야. 그래도 돈 벌 줄은 알아.”
무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날 못 믿어 하는 것 같다.
“슬슬 마을 밖으로 나가죠. 불길은 곧 산에 옮겨붙을 겁니다.”
“아, 벌써 나간다고? 아쉽네. 이런 불꽃놀이… 나쁘지 않은데 말이야.”
황홀한 표정으로 불타는 마을을 지켜보던 나카가미 리사가 몸을 돌렸다. 뺨이 붉은 걸 보니 어느 정도 성적으로 흥분한 모양이다.
우리는 준비된 차량을 타고 마을 밖으로 나갔다.
부서진 마을 도로는 야쿠자들이 마을에 들이닥치면서 복구해놓았다. 적당한 바위와 시멘트, 나무를 이용해 임시로 복구해놓은 수준이었다. 겉모습은 꽤 불안하지만, 자동차는 안정적으로 임시 도로를 지나갔다.
그리고 도로를 지나자마자 눈앞에 알림창이 떠오른다.
[오오카루마 마을을 탈출했습니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생살권’을 획득합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해주십시오.]
[엔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5일이 될 때까지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를 종료하시겠습니까?]
나는 다소 멍청한 표정으로 내 눈에만 보이는 알림창을 바라봤다.
원작 [15일]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방금까지만 해도 몰랐던 퀘스트성공 조건도 알았다.
‘15일을 생존하거나, 오오카루마 마을을 머물거나.’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은 6일째였다. 몇 시간이 지나면 7일째가 된다. 절반 이상의 시간을 단축한 것이다.
‘원작에선 15일을 꽉꽉 채우는데.’
원작은 주인공 일행의 생존물이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총 4명이 살아남는다.
주인공인 와다 쿄시로와 히로인인 하가와 료코는 당연히 살아남고, 나머지 2명은 조금 의외다. 부장인 모리 마사히로와 3학년인 후도 준.
‘무녀는 마지막에 죽지. 주인공인 와다 쿄시로의 총에 맞아서.’
그렇게 흑막을 죽이고 마을을 탈출한다.
마지막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엔딩도 나온다.
모리 마사히로는 국가 대표 유도 선수가 되었고, 후도 준은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히로인인 하가와 료코는 현모양처로서 와다 쿄시로를 내조한다. 와다 쿄시로는 정치인이 되어 오오카루마 마을에 있었던 일을 세계에 알리고 일본 정부와 야쿠자의 비리를 규탄한다.
‘원작은 바뀌었다. 모리 마사히로와 후도 준은 죽었고, 무녀는 살아서 나와 손을 잡았지. 나카가미 리사도 살아있고.’
나카가미 리사는 원작에서 시바타와 함께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는다.
나는 옆에 앉은 하가와 료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주인공의 현모양처는 내 좆집이었다. 기간 한정이지만.
물론 나는 그녀를 자유롭게 풀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본인의 신념… 같은 같잖은 이유는 아니고, 무녀의 사업 파트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돌아가면 와다 쿄시로는 죽는다.
“뭐야.”
“까칠하게 굴지 마.”
손은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가슴을 주물렀다. 하가와 료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넌 지겹지도 않아?”
반쯤 포기한 그녀의 목소리는 묘하게 퇴폐적이라 섹시했다. 손이 그녀의 상의 안으로 들어간다. 브래지어를 벗기고 모양 좋은 가슴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손을 타고 느껴진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젖꼭지를 살살 굴리며 대답했다.
“너처럼 맛있는 여자는 몇백, 몇천 번을 먹어도 질리지 않아.”
“…적당히 해.”
하가와 료코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의 젖꼭지는 빳빳했다.
•••
돈을 버는 방법.
어렵지 않았다.
준비물 두 개만 있으면 된다.
하나는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복면이고, 다른 하나는 칼이다.
일본 은행을 털까 하다가 지금 내겐 공간 이동 주문서가 없다는 걸 깨닫고 방향을 틀었다. 일본 경찰들과 벌이는 죽음의 술래잡기도 재밌겠지만…, 공간 이동 주문서가 없으면 지나치게 피곤해진다.
그나마 덜 피곤해질 수 있는 대상으로 상대를 바꿨다.
고리대금업자. 즉, 사채업자를 노리기로 했다. 야쿠자와 관련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공권력을 가진 일본 경찰보다는 덜 귀찮게 할 테니까.
나는 적당한 사채업자 사무실에 들어갔다.
사장으로 보이는 놈을 제외하고 모조리 칼로 베어 죽였다. 사무실이 피바다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43초였다.
“어, 어디서 온 놈이냐…!”
“돈 줘.”
“…뭐?”
“돈 줘.”
“크아아아악!”
말귀를 못 알아듣기에 오른쪽 귀 하나를 베었다.
“돈 줘.”
“네, 네, 드리겠습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한쪽 귀를 잘랐는데도 오히려 내 말을 잘 들었다.
그는 내가 보는 앞에서 금고를 열기 시작했다. 그 행동이 굼떠서 어깨에 칼을 찔렀다.
“돈 줘.”
“아아악! 지금 금고를 열고 있습니다!”
오른발 아웃.
“돈 줘.”
“내 발!!!”
“돈 줘.”
“아, 알겠습니다! 외, 왼발은 봐주십시오. 최대한 빨리 금고를 열겠습니다!”
금고 안에는 만엔 짜리 지폐와 가루가 든 비닐 팩도 있었다. 나는 가방에 모두 챙겼다. 대충 3천만엔 정도 될 것 같았다.
“돈 줘.”
“예? 저, 전부 드렸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돈 줘.”
“아아아악! 내 오른팔! 이 미친놈이!!”
“돈 줘.”
“끄으으으읏! 죄,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돈 줘.”
“지, 지갑에 있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7,210엔을 얻었다.
“돈 줘.”
“이, 이제 한 푼도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방금 드린 게 제 전재산입니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이렇게 빌겠습니다!”
“돈 줘.”
“지, 집에 늙은 어머니가 계십니다. 다리가 불편하십니다. 어머니에겐 제가 없으면 안 됩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돈 줘.”
“이, 이 빌어먹을 자식아! 돈 없다고! 네가 다 가져갔잖아!!”
놈의 사지를 베었다. 팔다리가 베인 놈은 피 웅덩이 위에서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놈이 죽지 않도록 카미노야마 비전약을 먹였다. 효과가 좋았다. 이걸로 1~2시간 정도는 살아 있을 것이다.
“돈 줘.”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카구로카이에서 네놈을 개먹이로 만들 거다…!”
“돈 줘.”
“돈… 없다고…! 젠장…!”
나는 피식 웃으며 검지로 놈의 두 눈을 가리켰다. 손가락은 그의 몸을 내려가 가슴을 가리키고 복부를 쿡 찔렀다. 콩팥이 있는 부위다.
“돈.”
“…….”
놈의 얼굴이 공포로 새파랗게 질렸다. 기분 나쁜 암모니아 냄새도 났다.
“제, 제발….”
나는 놈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놈을 들어 가방에 대충 쑤셔 넣었다. 사무실에 있는 차 키를 챙긴 뒤에 밖으로 나갔다.
이날, 사채업자 사무실 5곳을 덮쳤다. 싱싱한 사채업자 다섯 명과 3억 엔을 얻었다.
은신처에 돌아온 나는 장기를 빼내는 3명의 의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세 시간이나 투자해서 다섯 곳이나 조졌는데 3억 엔밖에 못 벌었어. 돈 벌기 참 힘들어. 그렇지?”
의사 중 하나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날 쳐다본다.
“한 시간에 1억 엔이면 어마어마하게 번 거 아닙니까?”
“아니야. 진짜 잘 버는 놈들은 누워서 1억 엔을 벌어. 그놈들에 비하면 난 개좆밥이지. 원래 이런 냄새나고 더러운 일은 노예들이 해야 하는데….”
“……꼭 저희를 노예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어이.”
“예?”
“의사는 많아. 널린 게 의사지.”
“……죄송합니다.”
의사들은 묵묵히 작업에 집중했다.
부스럭, 부스럭.
아까 편의점에서 사 온 삼각김밥을 꺼내 입에 넣었다. 맛은 끔찍했지만, 배는 그럭저럭 채워진다.
쿵쿵쿵.
누군가가 수술실 문을 두들겼다. 문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기구치입니다.”
기구치.
무녀가 직접 세뇌한 부하 중 한 명이었다.
“무슨 일인데?”
“바깥에 야쿠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총 16명입니다. 모두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
“여길 찾아와? 실력 좋은 놈 있나 보네.”
3명의 의사가 작업을 멈추고 나를 쳐다본다. 그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의사 양반들은 하던 거 계속해. 정리하고 올 테니까.”
“…야쿠자 16명이 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도망가야 합니다.”
“내가 해결할 테니까. 일이나 하고 있으라고.”
“…….”
그리고 15분 후.
나는 의사 양반들에게 싱싱한 야쿠자 16명을 선물했다. 의사 양반들의 퇴근 시간은 길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