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187화 (1,187/1,497)

< 1187화 > 1187. 15일

날이 밝았다.

아니, 창문을 보니 밝은 정도가 아니라 정오 무렵이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말해서 다시 드러누워서 5시간 정도는 더 자고 싶지만… 상황이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다. 마을로 올라올 야쿠자를 상대해야 한다.

몸을 일으킨다. 내 곁에 있어야 할 나카가미 리사, 하가와 료코, 무녀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바로 옆에 있는 개어진 옷을 바라봤다. 검은색 옷. 시바타가 입고 있는 옷과 비슷한 일본 전통 옷이다. 이름은 모르겠다.

‘입으라고 준비해둔 건가. 하긴 원래 옷은 피투성이지.’

옷을 입는다. 혈단과 무기도 옷 옆에 있었기에 챙겼다. 야쿠자는 아직 마을에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지금까지 잘 수 있었던 게 그 증거다.

‘그렇다 해도 완전회복의 쿨타임까지 몇 시간 더 남았지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두울 때는 을씨년스럽던 신사였는데, 낮에 보니 뭔가 신성함이 느껴진다.

나는 신사 내부를 걸다가 무녀를 만났다.

“깨어나셨군요.”

무녀가 있었다. 혼자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 주위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 10명이 조용히 서 있었다.

내 밑에 깔려 얼굴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무녀 옷을 깔끔하게 갖춰 입고 긴 검은 머리카락은 정돈되어있으며 얼굴은 어느 때보다 차분하다.

나는 일부러 무녀의 두 눈을 빤히 쳐다봤다. 보통은 부끄러움을 느낄 텐데, 그녀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몸 상태는 어떠신가요?”

“조금 피곤하긴 해.”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와다 쿄시로에게 한 방 맞아 멍이 든 부위다. 전투에 지장이 생길 정도는 아니지만, 통증이 꽤 거슬린다.

“이 약을 드세요.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겁니다.”

그녀가 건네 약을 받았다. 10ml 정도 되는 투명한 물약이다.

“이건?”

“카미노야마 가문의 비전약입니다. 외상에 효과가 있고, 피로를 조금이나마 없애줄 겁니다.”

“마약이야?”

“혈단과는 다릅니다. 순수하게 약초를 배합하고 정제해 만든 약입니다. 혈단에 비하면 효과는 적으나 부작용은 없습니다.”

나와 무녀는 한배를 타기로 했다. 이제 와서 그녀가 나를 배신해 죽일 이유는 없었다. 위험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니까. 나는 물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맛이 무척 썼다.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맛이 영 아닌데.”

“맛이 쓴 약이 좋은 약이라고 하죠. 몸은 어떠신가요?”

“확실히…. 아까보다 덜 피곤한 것 같긴 해. 원래 이렇게 효과가 바로 나오나?”

“카미노야마 가문의 비전약이니까요.”

“카미노야마 가문이 대단하긴 해. 혈단도 만들었으니까.”

“아뇨. 혈단을 만든 건 저입니다. 10년 전쯤에 혈단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었지요.”

“마약이 재료 아니었나? 용케도 구했군.”

“그 당시에도 카미노미야 가문은 야쿠자와 거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약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시체를 구하는 건 조금 어려웠지만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곳은 창작물 속 세계다. 어지간한 건 다 된다. 무녀는 아마 제약의 천재인가 뭔가겠지.

“야쿠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연락을 해봤습니다만, 곧 도착한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더군요.”

“널 노리고 있다는 말이네? 그렇지?”

“네. 마을에서 벌어진 상황을 대충 파악한 모양입니다.”

“리사 선배랑 료코는?”

“식당에서 식사 중입니다.”

나는 재차 주위를 둘러봤다.

“인원은 여기에 있는 자들이 전부인가?”

“여기에는 없지만, 5명 정도 더 있습니다.”

“야쿠자는 몇 명이 올 것 같은데?”

“아마 100명 이상일 겁니다. 그들은 저희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전력이 너무 차이 나는데. 마을 사람들을 이용할 수 없나?”

“그들은 이미 정리했습니다.”

“정리라…. 죽였다고?”

“네. 내버려 두기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으니까요.”

“마을 사람들은 너한테 충성할 텐데?”

“야쿠자가 상대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전 장난감의 충성심 따윈 믿지 않습니다.”

“세뇌가 완벽하지 않다는 건가.”

“그들에게 세뇌를 걸진 않았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지고 놀 수 있으니까요.”

참으로 대단한 여자였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야쿠자 100명. 두렵지는 않다. 내겐 혈단과 무기가 있으니까. 야쿠자 100명 정도는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야쿠자가 총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점이다.

정면에서 총을 쏘면 대충 피할 수 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과 총구로 탄환의 방향을 유추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집중력이 필요했고, 사각에서 쏘는 총은 나라도 답이 없다.

챙!

허리춤에서 일본도를 꺼냈다. 갑작스러운 발도에도 주위는 조용했다. 무녀는 둘째치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도 가만히 서 있다. 잘 훈련된 개들이었다.

“저를 베시렵니까?”

“그게 아니라. 일본도를 살펴본 거야. 이거 봐, 칼날이 좀 나갔잖아. 괜찮은 무기 없어?”

“권총 몇 자루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도는?”

“…있긴 합니다만, 꼭 일본도여야 합니까?”

“난 총을 잘 못 써. 일본도가 편해.”

무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명령을 내린다.

“마을에 있는 모든 일본도를 가져오세요.”

“네. 무녀님.”

검은 옷의 사람들이 대답하며 일제히 움직인다.

“아, 방탄복도 있어?”

“…방탄복도 가져오세요.”

“네. 무녀님.”

그들은 20분 만에 일본도 11자루와 3개의 방탄복을 가져왔다. 나는 가장 상태 좋은 방탄복을 챙기고 신중한 눈으로 일본도를 살펴봤다.

“이게 가장 좋겠군.”

“다른 일본도와 차이점이 있습니까?”

“딱 봐도 느껴지는 예기가 다르잖아. 이 정도면 장인이 만든 수준이야.”

“……전 봐도 모르겠군요.”

칼자루를 쥐고 허공에 몇 번 휘둘러봤다. 만족스러웠다.

“와다 쿄시로는 어떻게 됐지?”

“…하가와 양이 말한 그 남자 말씀이군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둘 중 하나겠지. 산에서 내려갔거나, 마을이나 산에 숨어 있거나.

내 생각에는 산에 숨어 있을 것 같다. 와다 쿄시로도 산 아래에 외부 인력이 있다는 걸 알 테니까.

“아, 맞다. 목공소에 있는 여자들은?”

“목공소… 여자를 범하는 곳을 말하는군요. 목공소에는 시체밖에 없었습니다.”

“그 여자들은 도망친 건가…. 근데 주기적으로 여자를 범하나 보네?”

“마을 사람들의 스트레스 관리용입니다. 마을에 갇혀 있다 보면 이런저런 욕구가 생겨 변수가 생깁니다. 욕구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마을 여자들을 이용했습니다.”

“골때리네. 그 정도 욕구는 참을 수 있잖아.”

“그들은 이미 살인을 경험했고, 마약으로 인해 욕구를 억누르기 힘들어합니다. 적당히 욕구를 배출하는 편이 관리하기 편합니다.”

“그래도 문제가 생길 텐데?”

“정 안될 것 같으면 정리하면 됩니다.”

“과연.”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

무녀와 함께 신사에서 마을을 내려다봤다. 신사가 높은 곳에 있어서 마을을 내려다보기 딱 좋았다. 망원경으로 마을 내부를 감시하는 것도 수월했다.

마을 입구를 통해 자동차가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다. 창 종류는 제각각이다. 고급 승용차도 있었고, 싸구려 경차도 있었다. 가장 많은 차종은 승합차였다. 자동차는 마을 입구 근처에 적당히 정차했다.

자동차 문이 열리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인상이 더럽고 손에는 일본도, 빠루, 망치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무기를 들지 않은 남자도 있었는데, 그들은 주머니가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그들은 살벌한 기세를 풍기며 신사 쪽으로 당당히 걸어온다.

“120명 정도인가.”

“직접 보니 박력이 다르군요. 시바타가 있었다면….”

“뒈진 놈은 그만 찾아. 시바타를 죽인 건 나야. 내가 그놈보다 강하다는 뜻이지.”

“…저들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해봐야지. 폭탄 같은 게 있으면 딱 좋을 텐데.”

“폭탄은 없습니다.”

“알아.”

야쿠자들은 신사 앞에서 멈칫했다.

그들의 가장 앞에 있는 선글라스 낀 남자가 무전기를 들었다.

치지지직.

무녀가 손에 쥔 무전기가 반응한다.

“여어, 카미노야마 양. 마을에 난리가 났다던데 생각보다 조용한걸?”

“키자키 씨가 직접 오셨군요. 바쁘시지 않습니까?”

“바쁘지. 그래도 어쩌겠어. 보스가 직접 시킨 일인데. 그리고 우리 카미노야마 양과 관련된 일이잖아. 내가 나서야지. 내가 너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입가가 꿈틀거렸다. 감히 내 여자를 노리다니….

무녀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너무 늦게 오셨군요.”

“카미노야마 양은 영특하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지?”

“혈단의 제조법을 원하십니까.”

“보스는 그걸 원하지. 우리 보스가 얼마나 대단하고 잔인한 사람인지는 너도 알고 있을 거야. 좋게, 좋게 가자. 너도 싸구려 창녀가 되어 개보다 못한 인생을 살고 싶진 않을 거 아니야.”

“제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십니까? 제조법을 넘기면 제 입을 막기 위해 죽이시겠죠. 그게 아니면 어딘가에 영원히 가둬두거나.”

“말했지. 난 카미노야마 양을 좋아한다고. 내 애인이 되라고. 그럼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지금 정도의 자유는 아니겠지만, 험한 일을 당할 일은 없어.”

“죄송합니다. 전 키자키 씨에게 어떤 감정도 없습니다.”

키자키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놈의 얼굴을 살폈다. 피부는 탔고, 눈 주위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4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인다.

“…이거 참, 기회를 줘도 걷어차네. 영특하다는 말은 취소해야겠어. 네 선택이야. 나중에 후회해봤자 소용없어.”

“……이렇게 대놓고 오실 줄이야. 조금 놀랐습니다. 제가 자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보스가 너에 대해 이렇게 말했지. 똥 밭을 굴러도 악착같이 살아서 기회를 엿볼 여자라고. 추가로 남자로 태어났으면 후계자로 삼았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지.”

“…과찬입니다.”

“아무튼 거기서 딱 기다려. 지금 올라갈 테니까.”

키자키가 무전기를 끊었다. 이어서 그가 부하들에게 손짓한다. 부하들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무녀가 내게 물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나카가미 리사와 하가와 료코의 시선도 내게 향한다. 검은 옷을 입은 놈들은 조용히 경계를 서고 있다. 눈앞에 있는 야쿠자들이 전부라는 법은 없으니까.

“이 계단 말이야. 일부러 이렇게 경사지고 높게 만든 거야?”

“네. 마을을 감시하기 편하고, 수백 개의 계단은 편한 마음으로 올라가기 힘들지요. 무엇보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기에 권위를 가집니다.”

“권위 같은 건 모르겠고, 아주 뭣같은 계단인 건 확실해. 경사도 가파르고, 계단도 많지.”

“계단에서 전투를 벌일 생각이시군요.”

“평지에서 싸우면 승산이 20%도 안 될 거야. 아, 계단에서 싸우는 건 나 혼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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