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2화 > 1182. 15일
시바타는 병원을 나온 나를 끝까지 뒤쫓았다.
‘지긋지긋한 놈.’
나는 산으로 달렸다.
전차처럼 마구잡이로 내달리는 시바타를 상대하기엔 장애물이 많은 산속이 낫다.
시바타를 유인하는 건 쉬웠다. 놈은 어떠한 의심도 없이 나를 쫓아 달려오고 있으니까.
‘혈단을 먹지 않았다면 따라 잡혔겠군.’
혈단을 먹어 신체 능력이 강해진 덕분에 붙잡히지 않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슬쩍 뒤를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한다.
쿵! 쿵쿵쿵쿵!
놈이 달리는 자세는 엉성했다. 상체에 비해 빈약한 하체는 당장이라도 균형을 잃고 쓰러질 것 같다. 겉보기에는.
자세는 엉성해도 다리를 움직이는 속도는 무척 빠르다. 빠르지 않았다면 진즉에 따돌렸을 것이다.
“비켜라!!”
시바타는 마을 사람이 보이면 그대로 주먹으로 후려쳤다. 마을 사람은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이 터져 죽는다.
‘저 새끼. 일부러 저러는 거군.’
시바타는 지능이 떨어지지만, 짐승 수준의 뇌는 아니다. 적과 아군은 구분할 수 있다. 지나가다 보이는 마을 사람도 굳이 공격할 필요 없었다. 놈은 자신의 재미를 위해. 혹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마을 사람을 죽였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나도 가끔 저러니까.
‘저 새끼를 제어할 수 있는 건… 무녀뿐인가?’
나는 주위를 살폈다. 마을 사람들이 날 쫓을 수 있는데, 시바타를 보고 겁에 질려 도망치기 바빴다. 시바타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명한가 보다.
산속으로 들어갔다.
쿠웅! 쾅! 쿵!
나는 나무를 피해 요리조리 뛰어다녔다. 시바타는 산속에서도 무식했다. 나무가 몸에 부딪히든 말든 나를 잡기 위해 내달렸다.
시바타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거리가 멀어지고 놈은 나를 놓쳤다.
“어디냐! 어디있냐!!”
시바타가 소리친다. 나무가 부서지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애꿎은 나무에 화풀이하는 모양이다.
나무 위로 올라갔다. 숨을 죽이고 매복한다. 두 눈에서 계속 흐르는 피눈물은 옷으로 막는다.
‘이대로 도망가는 건 내 취향이 아니지. 놈이 여길 지나는 순간 위에서 낙하하며 공격한다. 머리를 베면 놈도 죽겠지.’
시바타가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발소리, 호흡 소리. 놈은 너무 요란스러웠다.
‘왔다.’
나는 숨을 죽이며 놈이 좀 더 가까이 다가오는 걸 기다렸다.
‘지금이다!’
일본도를 역수로 쥐고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본능일까. 시바타가 슬쩍 눈동자를 올려 날 보더니, 왼팔을 위로 들어 올렸다. 칼이 놈의 왼쪽 팔목에 막힌다.
‘이렇게 된 거 왼팔이라도…!’
시바타가 발광한다. 거칠게 몸을 흔들어대며 나를 떨쳐낸 것이다. 바닥에 데구르르 구른 나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느새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그가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내가 이겼다. 너, 이제 끝이다.”
놈의 왼손이 내 다리를 잡았다. 나는 놈의 머리를 노리려고 했으나, 오른팔이 머리를 철저하게 막고 있다.
‘…너무 집요하게 놈의 머리를 노렸나.’
시바타의 심장을 꿰뚫으려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그의 가슴은 부풀어 올라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기 때문이다.
‘너무 커. 이게 인간의 신체냐? 심장이 어딨는지 모르겠어.’
급한대로 놈의 오른팔을 노렸다.
양손으로 칼을 휘두른다. 칼은 놈의 오른팔의 절반을 베었다.
놈이 내 다리를 으스러뜨렸다.
다시 칼을 휘둘렀다. 이번엔 놈의 오른팔이 떨어졌다.
“아아아악! 이게!”
시바타가 나를 내던졌다. 내 몸은 축구공마냥 데굴데굴 굴러갔다. 운이 좋은 걸까. 아니면 운이 나쁜 걸까. 나무에 막히지 않고 바로 낭떠러지로 이동한다.
철푸덕.
몸이 바닥에 닿았다. 혈단의 효과로 고통은 적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고 시력도 잃었다.
‘씨발.’
체감상 5초 정도 부유한 것 같다. 못해도 20m는 떨어지지 않았을까. 이런 높이니 몸이 멀쩡한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어이가 없는 건 난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몸은 개판인데 정신은 또렷하다.
‘혈단 때문이겠지.’
나는 일부러 완전 회복을 쓰지 않았다. 시바타가 나타나 내 시체를 확인할 때를 노렸다. 놈이 방심한 순간에 완전 회복을 사용해 역습한다.
‘완벽한 계획이다. 빨리 나타나라.’
그러나 몇 십 초가 지나도 놈은 나타나지 않았다. 깊이 떨어졌으니 내가 죽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죽음 저항이 발동했습니다. 앞으로 15초간 죽지 않습니다.]
[죽음 저항의 남은 시간: 15초]
[완전 회복을 사용합니다.]
죽어서 퀘스트에 실패할 수는 없었기에 완전 회복을 사용했다.
가뿐해진 몸을 일으킨다. 혈단의 효과도 사라진 모양이다.
낭떠러지를 올려봤다. 어두워서 정확한 높이를 측정할 수 없다. 감각으로는 20m 이상은 될 것이다. 지금 내 몸으로 장비도 없이 낭떠러지를 올라갈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으니 조금 돌아가야겠군.’
고개를 내렸다. 다른 길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시바타를 죽이지 못했다. 조금 더 침착하게 상대했더라면 죽일 수 있지 않았을까?
“씨바아아알!! 시바타!! 넌 내가 죽여버린다! 시바타 시발놈아!!”
있는 힘껏 고함을 내질렀다.
기분은 조금이나마 후련해졌다.
•••
시바타는 성유진이 굴러떨어진 낭떠러지를 내려다봤다.
깊다.
너무 깊어서 아래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죽었겠지.”
아둔한 시바타도 안다.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어떤 동물이라도 살지 못한다는 걸. 하물며 그놈은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너무 어두워. 내려가기 싫다.”
시바타는 몸을 돌렸다. 자신의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오른팔이 잘렸다. 이대로는 오른팔이 없는 채로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는 베인 오른팔을 들었다.
“무녀님이라면… 오른팔을 붙여 주실 거다.”
홀로 중얼거린 그는 오른팔을 들고 신사로 향했다.
산을 나와 마을로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씨바아아알!! 시바타!! 넌 내가 죽여버린다! 시바타 시발놈아!!”
성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바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죽은 성유진이 목소리가 들리는 게 이상했다.
그러나 시바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신사로 향했다. 그는 가끔 죽은 부모님의 목소리와 무녀의 목소리를 아무 이유 없이 듣는다. 부모님은 자신을 걱정하는 말을 했고, 무녀는 자신의 말만 믿고 따르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흔히 말하는 환청이었다.
신사에 들어간 그는 무녀를 만났다.
무녀는 언제나처럼 옅은 미소를 지으며 시바타를 반겼다.
“시바타. 수고했어요. 병원장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만, 사소한 일이니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죠. 그 조센징은 어떻게….”
말을 잇던 무녀는 멈칫했다. 시바타가 왼손으로 잘린 오른팔을 들고 있음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놀란 듯 두 눈을 치뜬 무녀는 표정을 관리했다.
“무녀님. 팔이 잘렸어요. 그놈, 강했어요.”
“…평범한 한국인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시바타에게 죽었죠. 팔은 제가 붙여드리겠습니다. 그를 어떻게 죽였나요?”
“손으로 잡아서 터트리려고 했는데….”
“했는데?”
“아래로 떨어졌어요.”
“그렇군요. 그래서 시체를 가져오지 않았군요.”
“…가져올까요?”
“괜찮습니다. 시바타는 푹 쉬도록 하세요. 자, 산신님께서 시바타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오오… 산신님의 선물….”
시바타는 무녀가 주는 사탕을 받아 입 안에 넣었다. 곧 그의 얼굴이 몽롱해진다. 거구가 비틀거리더니 뒤로 넘어졌다. 두 눈을 까뒤집고, 입으로는 침을 질질 흘린다. 무녀가 특별히 만든 마약은 시바타를 환상의 낙원으로 이끌었다.
무녀는 손을 흔들었다.
“시바타의 팔을 붙이세요. 시바타는 좀처럼 없는 적합자이니 혈단을 이용하면 쉽게 팔을 붙일 수 있을 겁니다.”
“예. 무녀님.”
무녀의 주위에는 그녀를 따르는 수족들이 많았다. 그들은 시바타를 데리고 신사에 숨겨진 연구실로 향한다.
무녀는 신사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 한국인의 시체를 가져오세요. 그 한국인은 평범한 인간이 아닙니다. 어쩌면 시바타처럼 특수한 개조 인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 무녀님.”
무녀의 수족들이 움직였다.
•••
“아아아아악!”
검은색 천으로 몸과 머리를 가린 놈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절명한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짱돌을 바닥에 내다 버렸다. 시체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내 갈 길을 간다.
‘시바타와 똑같은 차림새를 한 놈들. 처음에는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시바타같은 괴물 놈은 없어.’
신체 능력은 좋은 편이긴 하나, 전투 능력은 떨어진다.
지금까지 4명을 마주쳤고, 4명 모두 어렵지 않게 죽였다. 그중 2명은 권총을 들고 있었으나, 산은 어두웠고 엄폐하기 딱 좋은 나무가 많았다.
‘덕분에 권총 2자루를 챙기긴 했는데….’
사격 특성이 없어서 명중률이 낮다. 지금 나는 10m 가까이 있는 적도 겨우 맞히는 수준이었다.
‘날이 밝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해. 외부에서 놈들의 지원 병력이 찾아오기 전에 말이야.’
저벅저벅.
산속을 걷던 나는 불빛을 발견하고 씨익 웃었다. 이걸로 조난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불빛을 향해 걸어가던 나는 벌목된 나무를 발견했다. 한쪽 구석에는 나무가 잔뜩 쌓여 있었다.
‘목공소군.’
작은 목공소였다. 그러나 있을 건 다 있다. 이 목공소는 마을의 밥줄 중 하나다.
‘뭐, 진짜 밥줄은 혈단이겠지만.’
목공소에 들어간 나는 기척을 최대한 죽였다. 목공소 내부의 불이 켜져 있다는 건 사람이 깨어 있다는 뜻이니까.
‘그놈을 죽이고 무기가 될만한 걸 가져가자. 일본도같은 길쭉한 칼이 있었으면 좋겠군.’
가지고 있던 일본도는 시바타와 싸울 때 잃어버렸다.
나는 슬금슬금 목공소 건물로 움직였다. 창문을 통해 불빛이 새어 나온다. 조용히 창문을 들여다봤다.
‘오우, 씨발.’
남자의 나체가 보였다.
하마터면 육성으로 욕을 뱉을 뻔했다. 필사적으로 참으며 건물 내부 상황을 파악한다.
10명이 넘는 남자들이 나체로 있었다. 청년에서부터 늙은이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그들의 시선은 중심에 있는 여자들에게 향했다. 2명의 여자. 익숙한 여자 2명이 남자들에게 윤간당하고 있었다.
알고 있는 여자들이었다.
아이자와 나치코와 미네와키 쥬리에.
마을 사람들에게 투항한 여자들이다. 그녀들은 시체나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누워있었다. 몸과 얼굴에 구타의 흔적이 있고, 머리카락, 입, 가슴, 허벅지에 남자 정액이 묻어 있다. 그녀들의 다리 사이에는 알몸의 노인들이 힘차게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바로 여기로 끌려와서 윤간당한 건가.’
아무 감정도 없었다. 저 여자들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못생겼다. 아무리 잘 쳐줘도 평범한 수준이다.
정문 입구를 쳐다봤다. 벗은 옷가지와 함께 무기가 놓여 있었다. 무기 중에는 내가 원하는 길쭉한 칼, 일본도가 있었다.
나는 정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