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179화 (1,179/1,497)

< 1179화 > 1179. 15일

“이 개버러지 새끼들이….”

숙소를 포위한 상태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구경하는 마을 사람들을 당장 쳐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위기 상황일수록 냉철하게 생각해야 한다. 2층이니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허나 30명이 넘는 무장한 마을 사람들을 혼자 상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게 뭐야.”

내 뒤로 다가온 하가와 료코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손을 쉬지 않고 움직여 속옷을 입고 있었다.

“작정을 한 모양이네. 어지간히도 열받았나 봐.”

뒤에서 나카가미 리사가 태연하게 말했다. 목소리만 태연했다. 그녀의 몸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옷을 입고 가방을 정리하고 있다. 바닥이 후끈하다. 불길이 올라온다. 나도 계속 바깥을 노려보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옷을 입었다.

창문 밖을 봤다.

여긴 여자 숙소. 1층에 머무는 다른 3명의 여자가 급하게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여대생들에게 무기를 겨눈다.

남자 숙소를 확인했다.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3명의 남자 들은 불에 타죽기 싫으니 숙소 밖으로 나왔고 식칼, 쇠막대기, 야구방망이를 들고 마을 사람과 대치 중이다.

마을 사람들은 지켜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병사 같은 느낌이 든다.

“나카가미 선배. 어떻게 할 거예요? 1층으로 내려가요?”

“1층엔 못 내려가.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려야 해.”

나카가미 리사가 내 등을 밀었다. 먼저 2층에서 뛰어내리라는 뜻이었다. 나는 창문을 확 열었다. 검은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간다. 1층에서 시작된 화마는 2층까지 올라오기 시작했다.

탁.

2층에서 뛰어내려 어렵지 않게 착지했다. 나를 이어 하가와 료코가 나카가미 리사가 뛰어내렸다.

“킥. 키키킥.”

“젊은 처자들이 참으로 곱구만….”

“무녀님께서 처자들을 맛볼 기회를 주시겠지. 지금까지 그랬으니.”

젊은 놈, 늙은 놈 할 것 없이 음욕에 찬 눈으로 하가와 료코와 나카가미 리사를 바라본다. 이 이상한 마을에 있더라도 미녀를 보는 눈은 똑같은 모양이다.

나는 내 여자를 탐내는 저놈들을 당장 죽여버리고 싶지만, 내 손에는 무기가 없다. 거기에 놈들은 방심하지 않고 있다.

“저 조센징을 조심해야 한다고 무녀님께서 당부하셨습니다.”

“저놈이 내 친구와 사촌을 죽였어.”

“내 친구도 저놈에게 죽어서 은행나무에 걸렸지.”

“저놈은 쉽게 죽여선 안 돼.”

“찢어 죽일 놈.”

“산신께서 저놈을 지옥에 데려가실 거야.”

“지옥도 부족하지. 저놈은 억겁의 세월 동안 고통받아야 해.”

마을 사람들의 살의가 집중된다.

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30명의 살의? 우스울 뿐이다. 하물며 저들은 병사도 아닌 일반인일 뿐이다.

마을 사람들은 내가 아무렇지 않게 서 있자, 누군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의 뒤쪽 짜리몽땅한 노인이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눈썹을 가진 노인이다.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몸에 가려져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노인이다. 키가 가장 작고 체구도 초등학생 수준이다. 그러나 압도할 정도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못해도 10명은 죽여본 것 같은데.’

그 노인은 뒷짐을 지고서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기다려. 함부로 움직이지 마.”

“사사키 씨. 그러다 저놈들이 도망치면 어떻게 합니까?”

“멍청한 놈. 앞에는 우리가 포위하고, 뒤에는 집이 불타고 있는데 어디로 도망쳐? 잠자코 내 말이나 들어.”

“…예.”

사사키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짧고 얇은 다리에서 힘이 넘친다.

“이봐, 조센징.”

사카기가 내게 말했다.

“뭐냐, 쪽발이.”

“등이 뜨겁지 않나? 투항해라. 너도 들어는 봤을 거다. 불에 타 죽는 건 그 어떤 죽음보다 고통스럽다는 말을.”

“네놈들 꼬라지를 보니 그냥 깔끔하게 불에 타 죽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그럼 불에 타 죽어라. 뒤로 돌아 저 건물로 들어가라.”

“…….”

불에 들어가 타 죽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대치가 이어졌다. 탁탁, 타타탁! 뒤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그 열기에 땀으로 등이 축축해진다.

‘이거 안 좋은데.’

등 뒤의 열기가 체력을 갉아먹고 있다. 화상까지 입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심리적인 압박이 크다. 사사키가 노리는 것도 이 심리적 압박이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방도를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우리 쪽에서 한 명이 마을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걸어갔다.

모리 마사히로와 갈등을 빚었던 미네와키 쥬리에였다.

마을 사람들은 쥬리에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이거 치워요!”

미네와키 쥬리에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저 여자가 저렇게 깡이 좋았나?’

그럴 리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오늘 낮에 모리 마사히로를 상대로 잔뜩 히스테릭을 부리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당당하게 나설 리 없었다. 다르게 생각하는 게 더 상식적이다.

‘저놈들에게서 당당해도 될 이유가 있는 거지.’

인간이 당당할 수 있을 때가 언제일까. 답은 간단했다. 자기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쳤을 때.

“사사키 씨. 전 당신이 시키는 대로 했어요.”

“그래. 잘했다. 불을 아주 잘 지르더군. 예전에도 한 번 해본 적 있나?”

“당신이랑 농담할 생각 없어요. 약속은 지키셔야죠.”

“약속하마. 널 해하는 일은 없을 거다. 네 덕분에 저놈들의 신상도 파악했고 말이야.”

사사키가 손을 흔들었다. 미네와키 쥬리에를 겨누던 무기가 내려가고 길이 열린다. 미네와키 쥬리에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을 사람들의 뒤쪽으로 걸어갔다.

배신이다.

그리고 꼴을 보아하니 하루아침에 배신한 건 아닌 것 같다.

“미네와키! 너 설마!”

미네와키 쥬리에와 같은 학년인 아이자와 나치코가 경악한다.

미네와키 쥬리에는 냉정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어쩔 수 없었어. 난 살고 싶었어. 이런 마을에 오고 싶지도 않았는데, 공포 영화에서 나올법한 일을 겪어야 한다니… 그건 너무 하잖아. 난 살고 싶어.”

쿠웅.

남자 숙소 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불에 탄 지붕이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대학생들이 움찔거린다. 이 상황에선 저것만으로도 공포감을 느끼며 마음이 꺾이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계속 서 있다가 무너진 숙소 건물에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버리고 마니까.

다른 대학생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사사키는 그걸 귀신같이 알아채고 말했다.

“너희 중 먼저 투항한 사람에게 생존을 약속하겠다.”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정말로 살려줄 생각이라면 이런 과격한 짓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단, 저 조센징을 제외하고.”

사사키의 손은 나를 가리켰다.

“저 조센징은 죽어야 한다. 저 조센징은 죄를 너무 많이 지었어.”

“너도 내가 죽여주지.”

사사키에게 중지를 세웠다. 그는 내 도발에도 무덤덤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났다. 네바타 노리코와 아이자와 나치코가 눈치를 보며 동요한다. 남대생들의 상황도 비슷했다.

“선배, 하가와. 너희는 투항할 생각 있어?”

“저놈들은 나와 네가 한 짓을 알고 있어. 투항할 바엔 죽는 게 나을걸?”

나카가미 리사가 손도끼를 들었다. 손도끼 하나를 내게 건네준다.

“하가와는?”

“…저놈들에게 붙잡혀 범해지는 것보다… 차라리 네게 범해지는 게 나아”

“영광이군.”

“오해하지 마. 어디까지나 저놈들에 비하면 이니까.”

하가와 료코는 단도를 들었다. 그녀도 끝까지 싸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죽을 생각은 없었다. 포위를 벗어나 도망칠 생각이다.

“내가 길을 연다.”

완전 회복이 있다. 몸을 방패 삼아 날뛴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투, 투항할게요!!”

아이자와 나치코가 외치며 마을 사람들 쪽으로 걸어갔다. 사사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환영한다. 생존을 약속해주마. 뒤쪽에 가 있어라. 나머지는… 팔 하나 정도를 잘라야겠지.”

아이자와 나치코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미네와키 쥬리에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미네와키 쥬리에의 얼굴은 복잡했다.

사사키가 마을 사람들에게 손짓한다. 포위가 좁혀지고 무기가 다가온다.

땅이 흔들렸다.

제법 큰 지진이었다. 땅이 쩌적 갈라질 정도로.

“흐헉?!”

“지진이다!”

“제, 젠장! 아악! 어딜 찌르는 거야?!”

마을 사람들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 과정에서 사고가 일어난다. 쿵, 쿵쿵! 불타는 숙소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내가 외치며 손도끼를 들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진은 내게도 영향을 끼치지만, 이 정도 흔들림은 감당할 수 있다.

앞에 있는 남자의 대가리를 쪼개고, 바닥에 떨어진 창을 주워 넘어진 남자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아하하, 아하하하하하!”

나카가미 리사는 대소를 터트리며 마을 사람들에게 손도끼를 휘둘렀다. 지진 때문에 자세가 불안정했다.

“…….”

걱정되는 것은 하가와 료코였다. 닌자 가문 출신으로서 실력은 갖추고 있지만, 실력과 사람을 죽이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괜한 걱정이었군.’

하가와 료코는 자비 없이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그녀의 단도는 사람의 급소를 찔렀고, 벌써 2명이 명을 달리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평온했다. 동요가 없었다.

‘과거에 사람을 죽여봤나?’

그게 아니면 타고났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어쨌든 그녀들은 잘하고 있었다.

나는 사사키에게 다가갔다. 이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망칠 때 치더라도 이놈은 죽이고 간다.

“저 조센징을 죽여라!!”

사사키가 외쳤다.

마을 사람들은 사사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흔들리는 땅 때문에 균형도 잡지 못하고 있다. 전문적으로 전투를 배웠다면 모를까. 그들은 평범한 농부여싿.

“아아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린다.

담담하던 사사키의 얼굴에도 초조함이 서렸다. 그는 품에서 붉은색의 알약을 꺼내 삼키고는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다.

“어딜!”

사사키에게 달려들었다. 도중에 사사키가 옆으로 넘어진다. 아니, 넘어지는 척하면서 주머니에서 무기를 꺼낸다.

은색의 리볼버였다.

사사키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총구를 겨눈다. 나는 총을 보자마자 옆으로 굴렸다. 탕탕탕, 총성이 울린다. 다행히 내 몸에 박히는 총알은 없었다. 나는 억지로 땅을 구르느라 머리와 등이 아팠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놈은 계속해서 내게 총을 겨누고 있었으니까.

탕탕탕!

총알이 오른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만, 이걸로 놈은 여섯 발 전부를 사용했다. 나는 당당히 놈에게 달려갔다. 놈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주머니에서 또 다른 무기를 꺼냈다. 송곳이었다.

어설프다.

총을 쏘는 것부터, 송곳을 휘두르는 것까지.

나는 손도끼로 송곳을 쥔 사사키의 손목을 쳐냈다. 손목의 절반이 잘려 덜렁거렸다. 경악하는 사사키에게 달려들어 그 머리에 손도끼를 찍었다.

“됐다! 도망가자!!”

내가 소리쳤다. 대학생들이 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마을 사람들을 죽이며 그들을 도왔다.

“성!”

모리 마사히로와 와다 쿄시로, 후도 준이 합류했다.

모리 마사히로는 아직 합류하지 않은 두 명의 여자를 쳐다봤다.

“미네와키! 아이자와! 이쪽으로 와라!”

모리 마사히로가 소리쳤다.

“웃기지 마! 난 안 갈 거야! 마을 사람들은 날 살려주기로 약속했어!!”

“저, 저도 안 갈 거예요. 이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그놈들이 너희를 정말 살려둘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어리석은 말 지껄이지 말고 이쪽으로 와라!”

“안 가!”

그녀들이 소리쳤다.

“모리 선배. 우리끼리 가죠. 시간 없어요.”

못생긴 년들이 죽든 말든 관심 없었다. 나는 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나카가미 리사와 하가와 료코가 내 뒤를 따랐다. 이어 다른 이들도 따라온다. 지진은 곧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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