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166화 (1,166/1,497)

< 1166화 > 1166. 15일

방을 나선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은 바깥에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우산이나 우비 같은 건 없었기에 비바람을 맞으며 부엌에 들어갔다. 넓은 부엌을 둘러본다. 냉장고를 열어보자 캔맥주가 가득했다. 온 김에 캔맥주 하나를 따서 벌컥벌컥 마시며 창고를 찾았다.

창고 건물은 밖에 있었다. 다시 비바람을 뚫고 창고로 향했다. 다행히 창고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청소도구, 밧줄, 농기구, 나무판자 등 웬만한 건 다 있었다. 나는 창문 크기를 가늠하며 공구 상자와 나무판자를 들고 창고 밖을 나왔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획 고개를 돌려 숲을 바라봤다. 쏴아아아. 나무와 풀이 비바람에 흔들렸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기분 탓인가.'

음산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예민해진 모양이다. 부엌을 지나 숙소로 이동한다. 숙소 안으로 들어가기 전 여자 숙소를 바라봤다. 불빛이 켜져있었다. 바람이 심상치 않은 걸 알고 여러 가지 대비 하는 모양이다.

쿠우웅!

육중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가 쓰러진 줄 알았는데 숙소 옆에 주차해놓았던 승합차가 옆으로 쓰러진 것이었다.

나는 못 본 척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와다 쿄시로는 여전히 이불로 창문을 막고 있었다.

"왔구나! 아까 커다란 소리가 들리던데. 바깥은 괜찮아?"

"차가 쓰러졌어."

"우리가 타고 온 차?"

"어. 나 혼자 일으켜 세우는 건 힘들 것 같아서 내버려 두고 왔지."

"잘 생각했어. 이런 날씨에 함부로 움직이는 건 좋지 않아. 특히 가로등도 없이 어두우면 더욱더."

창문 뒤에 나무판자를 덧대어 못으로 고정했다.

"집주인이 뭐라 하겠군."

"아니. 집주인은 고마워할 거야. 내버려 두면 방안이 전부 엉망이 될 테니까."

와다 쿄시로는 나무판자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젖은 이불을 밖에 버려두고 벽장에서 새로운 이불을 꺼냈다.

"수고했어, 성 상."

"너도."

다시 잠들었다.

새벽 4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려고 했는데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첫날밤의 요바이는 물 건너 갔다.

ㆍㆍㆍ

아침이 되었어도 날씨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모리 마사히로는 나를 비롯한 남학생들을 끌고 가 승합차를 바로 세웠다. 그나마 비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창고 옆으로 승합차를 옮겼다. 문제는 엔진이 맛이 가서 승합차를 밀어서 옮겨야 했다.

작업을 끝낸 우리는 숙소 1층 넓은 거실에 모였다. 앞으로의 일을 정하기 위해서다.

"모리 선배! 차가 고장 났습니다. 내일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갈 수 없게 됐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큰 키에 비해 마른 몸매의 남자가 말했다. 후도 준. 안경을 낀 그는 뺨이 홀쭉 들어가 있었다. 머리카락도 길어서 앞머리는 눈을 쿡쿡 찌를 것 같다.

"후도. 진정해라."

모리 마사히로가 말했다. 이 상황에서도 그는 침착했다.

"진정? 선배. 지금 우린 이 마을에 고립된 겁니다. 조난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조난이라니... 말이 심하군. 우린 마을에 있다, 후도. 언성에 주의해라. 다른 후배들이 동요할 수 있다."

"말이 심하긴요. 전 합당한 걱정을 하는 겁니다. 당장 내일 떠날 수도 없게 됐지 않습니까."

"차는 고치면 된다. 그게 아니면 다른 주민분에게 차를 빌려 타서 나가면 된다. 트럭 몇 개가 있더군. 근처 큰 도시로만 나가면 돌아가는 건 어렵지 않다."

"그건 다행이군요. 계획대로 내일 돌아갈 수 있습니까?"

후도 준이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스마트폰을 확인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탄식했다.

일본 전역에 대피령이 떨어져 있었다. 가까운 대피소로 이동해 생활하라는 내용이다. 후도 준은 스마트폰을 터치해 뉴스 기사를 하나 보여주었다.

"지진?!"

와다 쿄시로가 경악한다.

간토와 토후쿠에 8.0의 지진이 짧게 일어났다. 확인된 사상자만 1,000명이 넘고 태풍까지 겹쳐 난리도 아니라고 한다. 사람들의 얼굴에 공포가 스쳐 갔다.

간토.

우리 말로는 관동이었다.

관동 대지진. 일본인들에게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단어다.

"모리 선배. 상황은 선배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합니다. 정말 내일 도시로 나갈 수 있습니까?"

"진정해라, 후도. 네가 삼주 뒤에 있을 콩쿠르 때문에 예민한 건 알고 있다. 콩쿠르를 대비해 연습하고 싶겠지. 하지만 초조하게 굴어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와 같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나갈 수 있는지 어떤지 직접 확인해보자."

후도는 여전히 불만 서린 표정으로 모리 마사히로를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아침은 간단하게 차려 먹고 일행들이 움직였다. 타나카 히로시를 비롯한 양아치 3인방은 2층 방에 모여 시시덕거렸고, 나와 와다 쿄시로는 설거지를 담당했다. 모리 마사히로와 후도 준은 구멍가게에서 구입한 우비를 입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쿠우우웅!

커다란 소리가 났다. 와다 쿄시로와 내가 바깥으로 나갔다. 작은 나무 한 그루가 근처 밭에 쓰러져 있었다.

"나무 하나가 저렇게 쉽게 쓰러질 줄이야. 오늘 저녁에 있을 여름 축제는... 힘들겠지?"

와다 쿄시로가 쓰러진 나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태풍이 오는데 축제를 하는 건 미친 짓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날씨가 잠잠해질 때까지 미루겠지."

바람도 바람이지만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

'밭을 둘러보면... 대부분 얕게 침수된 상태군. 올해 밭일은 끝장난 것 같은데.'

도로가 침수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긴 고도가 높은 산 속이다. 물은 계속 아래로 흘러가겠지.

침수보다는 산사태가 더 걱정된다.

숙소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저 멀리서 우비를 입은 한 중년 남자가 다가오고 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안녕하십니까. 오오카루마 신사에서 일하고 있는 혼다 타이치라 합니다."

평범한 체격에 구릿빛 피부의 중년 남자다. 사각턱에 차분해 보이는 인상이다.

"나이오 대학교 1학년의 화다 쿄시로입니다."

"성유진입니다."

혼다 타이치는 내 얼굴을 몇 초 동안 바라봤다.

'우익인가?'

일본 중년 남자 중에는 한국을 고깝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와다 쿄시로의 옆에서 입 닥치고 조용히 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네. 감사합니다."

우리는 거실에 마주 보고 앉았다. 와다 쿄시로가 당연하다는 듯이 녹차를 내왔다. 혼다 타이치는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축제가 연기되었습니다."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재팬 페스티벌 스터디 서클은 해체되지 않기 위해 실적이 필요했다. 이제 와서 다른 마을의 축제를 찾아가기에는 늦었다.

"...며칠 연기되었나요?"

"정확한 일정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태풍이 지나고 마을을 수습한 뒤에 축제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축제를 취소하지는 않고요?"

"늦으면 늦었지.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혼다 상. 오오카루마 마을에 대피소가 있나요?"

"마을에 대피소는 없습니다."

"신사가 있잖아요."

"신사는 대피소가 아닙니다."

혼다 타이치가 정색하며 말했다. 와다 쿄시로가 얼굴이 잠깐 굳어졌다. 혼다 타이치의 정색한 표정은 꽤 살벌했기 때문이다.

"크흠. 신사는 신성한 곳입니다. 그리고 오오카루마 마을은 태풍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다른 곳과 달리 지형적으로 안전합니다. 굳이 대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오오카루마 마을에는 침수 피해 같은 건 없나 보죠?"

"그건 아닙니다. 밭이 침수되어 여러 손해를 입습니다. 그래도 심각한 수준은 아닙니다."

"음. 그렇군요. 도로는 괜찮나요? 내일 마을을 나가야 할지도 몰라서요."

혼다 타이치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마을을 나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네?"

"마을 아래쪽 도로가 무너졌습니다. 지금 자동차가 나가기 힘듭니다."

"지, 진짜요?"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설령 도로가 멀쩡하더라도 도시로 나가기 힘들 겁니다. 도시에 있는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도시가 지금 침수되고 있는 상태라 하더군요. 일본은 현재 재난 상황입니다."

"......"

와다 쿄시로는 고개를 툭 떨궜다. 마을에 고립되어 참담한 심정일 것이다. 거기에 일본 전체를 강타한 재난 때문에 외부의 도움을 바라기도 쉽지 않다.

"너무 낙담하지 마십시오. 마을에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식량을 비축해뒀으니 한 달은 너끈히 버틸 수 있습니다. 바깥이 수습될 때까지 시간만 보내면 됩니다."

"...식량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네요."

분위기는 여전히 가라앉았다.

혼다 타이치는 녹차를 전부 마시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 혹시 지로 상을 보신 적 있습니까?"

"지로 상이요?"

"감자밭에서 일하시는 어르신입니다. 평소 아침 일찍 일어나 늦게까지 일하시는 어르신인데 오늘은 점심이 되었는데도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이 없습니다."

"구멍가게 옆에 있는 감자밭인가요?"

"네. 아시는군요."

"어제저녁에 인터뷰했어요. 그 후로는... 잘 모르겠네요."

나는 담담히 녹차를 마셨다. 혼다 타이치가 말하는 사람이 내가 어제 죽인 노인이란 건 이미 눈치챘다.

'연기 특성이 있으니 내 얼굴만 보고 이상함을 느낄 일은 없겠지.'

혼다 타이치는 나와 와다 쿄시로를 번갈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지로 상의 정보를 알게 되면 신사 옆에 있는 건물로 찾아와주십시오. 뭔가 불편하거나, 필요한 게 있어도 개의치 말고 와주십시오.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혼다 타이치가 떠났다.

"후우."

와다 쿄시로는 한숨만 푹 내쉬었다.

1시간 뒤에 모리 마사히로와 후도 준이 돌아왔다. 그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마을 아래쪽 도로가 무너진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도로 상황을 보고 왔다. 차로 넘어가는 건 불가능하다. 걸어서 산에서 내려가는 건 지금 날씨에선 너무 위험하다. 마을 사람들에게 들어보니 멧돼지가 많고 가끔 곰도 나온다더군."

모리 마사히로가 설명했다. 그의 뒤로 후도 준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간다.

"모리 선배. 후도 선배는..."

"와다. 후도는 내버려 둬라. 이번에 간토와 토호쿠에 일어난 지진 때문에 콩쿠르가 취소됐다."

"아."

"와다. 타나카들은 안에 있나?"

"네. 2층에 있어요."

"그렇군. 성. 미안한데 여자들을 불러올 수 있겠나? 당장 마을을 벗어날 수 없으니 설명해야 한다."

"네. 불러올게요. 근데 모리 선배. 어제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노인이 실종됐다고 합니다. 혹시 뭔가 짚이는 게 있습니까?"

"실종... 됐다고?"

모리 마사히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당히 놀란 모양이다.

"어제 노인에게 한 질문... 실종과 뭔가 연관 있는 거 아닙니까?"

나는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이 마을에는 뭔가 있었다.

"...모두가 모이면 설명하지. 이렇게 된 이상... 후도도 불러야겠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