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5화 > 1165. 15일
노인에게 걸어갔다.
나는 노인이 도중에 도망갈 줄 알았다. 그러나 노인은 내가 다가옴에도 몸을 움찔대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를 감시하듯 주시한다.
"주인장. 왜 그럽니까?"
일단 물었다. 나를 주시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
노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그의 손에 들린 낫도 내려가지 않는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노인에게 물었다.
"날 왜 꼬나보냐고 물었다."
"......"
"재미없게 나오지 마라."
"......"
"낫 들었다고 내가 쫄 것 같냐?"
"......"
"말할 생각 없나 보군. 알았다. 이유를 듣는 건 포기하지. 그러니 이제 눈 깔아라. 네가 보고 있으니 기분 나쁘군."
"......"
손전등을 들어 올려 노인의 얼굴을 비췄다. 손전등의 빛을 버티지 못한 노인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낫을 쥔 손을 올렸다.
빠악!
노인의 다리를 발로 찼다. 노인이 밭에 고꾸라진다. 노인이 쥔 낫을 걷어차고 그 머리 위에 발을 올렸다. 노인이 버둥거린다. 다리에 힘을 주자 노인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비켜라."
노인이 가래 끓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이 바뀌었어. 날 왜 지켜보고 있었지? 그 이유부터 말해."
"......감시하고 있었다."
"왜?"
"외지인이 허튼짓을 하지 않도록. 실제로 너는 내게 위해를 끼쳤지. 지금이라도 늦기 않았다. 이 발을 치워라."
"치우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노인의 머리에서 발을 치우는 척하며 발로 노인의 복부를 연신 걷어찼다. 퍽, 퍽퍽. 적당히 힘 조절했음에도 구타 소리는 찰졌다.
"우에에에엑!"
노인이 구역질하는 걸 본 나는 뒤로 물러났다. 몸에 오물이 묻는 건 사양이다.
노인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체 같은 눈동자에는 살기가 가득하다. 노인이 몸을 획 돌리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이냐."
따라가서 입단속하고 어딘가 수상쩍은 이 마을에 관한 정보를 물어보기로 했다.
달리던 노인은 갑자기 멈춰서 몸을 숙이더니 밭에 나뒹구는 낫을 들어 올렸다. 노인이 다시 나를 향해 뛰어온다. 도망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죽어라!!"
내 목을 노린다. 급소를 노리는 데 거리낌이 없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두려움에 몸이 굳어서 그대로 당할 수 있지만... 나는 아니었다. 느긋하게 노인의 공격을 시야로 확인하면서 회피한다.
"느려."
노인과 청춘의 몸. 그 차이는 엄청났다. 덤으로 나는 마냥 평범한 몸이 아니었다. 상의를 올려보면 근육이 단련되어 잘 잡혀 있었다. 일반인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스펙이다. 뭐, 헌터의 시선으로 보면 거기서 거기지만.
획! 획획!
공격을 몇 번 피하자, 노인이 쓰러지듯이 휘청거렸다.
"으아아아아악!!"
노인이 악을 쓰며 내게 공격한다. 나는 적당히 공격을 피하다가 노인의 다리를 걸었다. 한 번 걷어차였던 다리는 너무나도 쉽게 균형을 잃고 무너진다. 쓰러진 노인은 숨을 내쉬며 내 다리를 노려 낫을 휘두른다.
"어림도 없지."
백스텝으로 가볍게 피하고 노인의 머리를 가볍게 찼다.
노인의 움직임이 멈췄다.
"잠깐!"
깜짝 놀란 나는 노인에게 달려가 맥을 짚었다.
'죽었잖아.'
머리를 때리긴 했으나 힘을 최대한 빼고 가볍게 때렸을 뿐이다. 이 정도면 노인이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보다 노인이 상태가 더 안 좋았다는 거지. 계산 미스야. 젠장. 마을에 관한 정보를 못 들었는데.'
시체를 버려두고 숙소로 돌아가려다 멈칫했다.
'이대로 시체를 내버려 두면 문제가 생기겠지?'
이 작은 마을에도 파출소가 있었다. 시체가 발견되면 경찰이 나설 테고 내가 죽였다는 걸 들킬지도 모른다.
'체포되면 퀘스트 완료에 차질이 생기겠지. 체포되더라도 지금 당장은 아니야. 그래. 적어도 이 세계의 이름인 [15일] 동안은 자유로워야겠지.'
나는 주변을 획획 둘러봤다. 손전등을 끄니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근처를 지나는 인기척도 없었다. 나는 노인의 시체를 잡아 어깨에 대충 들쳐메고 산 쪽으로 향했다. 밭 근처에 있는 삽도 챙겼다.
'씨발. 겨우 인간 하나 들었을 뿐인데 엄청 힘드네.'
산으로 들어온 나는 적당히 땅을 파고 시체를 넣었다. 깊게 파지는 않았다. 귀찮고 힘들었다. 어차피 당분간만 안들키면 된다.
'이 세계에 계속 있을 것도 아니니까.'
구덩이에 흙을 넣어 메꾼다.
'갑은 돌아갈 때 원래 있던 장소에 던져두고... 음?'
시선이 느껴졌다.
몸을 획 돌려 뒤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팔목으로 땀을 닦았다.
'기감이 일반인 수준이라 잘 모르겠다. 기분 탓인가?'
나는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ㆍㆍㆍ
성유진이 열심히 땅을 메꾸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나무 뒤에서 기척을 숨기고 성유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색 천 옷을 뒤집어쓴 그는 성유진의 등을 보고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니 외지인이군. 오늘 낮에 도시에서 대학생들이 왔다더니... 그 일행들인가.'
획.
성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숨소리까지 참으며 기척을 없앤다. 땀을 닦은 성유진이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예민하군.'
그리고 침착하다.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이 아닌가? 계획 살인? 아니면... 원래 저런 놈인가?'
어느 쪽이든 보통 놈이 아니란 건 확실했다.
'무녀님에게 보고하고 명령을 받아야겠군.'
작업을 끝낸 성유진이 떠났다. 남자는 조금 기다렸다가 성유진이 시체를 파묻은 곳으로 움직였다.
'...살인이 익숙한 놈이 아니었나? 왜 이렇게 엉성하지?'
날이 밝으면 바로 이상함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엉성했다. 대충한 티가 팍팍 난다. 남자는 고민하다가 맨손으로 땅을 파헤쳤다. 성유진이 땅을 대충 다져놓았기에 가능했다. 그는 5분도 지나지 않아 땅에 묻힌 시체를 확인했다.
'지로 영감...'
성실하고 능력 있는 일꾼이 죽었다.
'무녀님께서 슬퍼하시겠군.'
ㆍㆍㆍ
숙소로 돌아왔다.
서클원들이 모여서 놀고 있었다. 맥주캔이 바닥을 굴러다닌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치근덕거렸고, 여자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남자들을 상대할 때.
"성 상! 이쪽으로 와!"
와다 쿄시로가 날 불렀다. 나는 그의 옆에 앉아 맥주캔을 들었다. 와다 쿄시로의 옆에 하가와 료코가 조신하게 앉아 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청순 그 자체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저녁 식사 시간은 벌써 끝났다고."
"오는 도중에 길을 잃었어. 식사는... 별로 배도 안 고프니 괜찮아."
"아, 성 상. 이쪽은 하가와 료코. 내 소꿉친구야. 우리랑 같은 1학년이야."
"하가와 료코입니다. 한국 유학생인 성유진 상이죠? 잘 부탁드려요."
"1학년이면 존댓말 할 필요 없어. 편하게 말해."
"알겠어. 편하게 말할게."
셋이서 대화를 나눴다. 하가와 료코는 의외로 강단 있는 성격인 것 같았다.
"하가와."
노란 머리의 양아치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타나카 히로시는 팔뚝에 새긴 문신을 내보이며 과시한다.
"구멍가게에 갈 건데 같이 가지 않겠어?"
"타나카 선배... 죄송하지만 이제 곧 방에 들어가서 잘 준비를 해야해서요."
"얼마 걸리지도 않는데 상관없잖아.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사줄게."
"괜찮아요. 생필품들은 모두 준비해왔기에 필요한 물건은 없어요."
하가와 료코가 단호하게 말했으나, 타나카 히로시는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분위기는 점점 싸해졌고, 타나카 히로시는 하가와 료코에게 노골적으로 맥주를 들이밀었다.
"아까 보니 술도 깨작깨작 마시더라? 내가 술 먹는 법을 가르쳐줄게. 술은 한 번에 마셔야 제맛이야."
"...타나카 선배. 전 술을 잘 못 해요."
"내가 가르쳐준다니까."
"선배. 그만하시죠."
와다 쿄시로가 나섰다. 자리에서 일어나 타나카 히로시의 앞을 가로막는다. 타나카 히로시의 얼굴은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와다. 지금 하가와와 대화하고 있는 게 안 보이냐?"
"하가와는 술을 못합니다. 그만하시죠."
"이 건방진 새끼가."
타나카 히로시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허나 주먹이 내질러지는 일은 없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모리 마사히로가 커다란 손으로 타나카 히로시의 손목을 붙잡은 것이다.
"타나카.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그쯤 해둬."
타나카 히로시의 입매가 꿈틀거린다. 그러나 그는 모리 마사히로가 쏘아보자 꼬리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선배. 손목 좀 놓아주시죠...쯧. 술맛만 떨어졌네."
타나카 히로시가 궁시렁거리며 다른 남자 2명과 함께 숙소 밖으로 나갔다. 구멍가게에 가는 모양이다.
"후우. 고맙습니다, 모리 선배."
"별거 아니다. 모두 들어라! 오늘 술자리는 여기까지 한다! 내일 저녁에 있을 축제는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마라!"
모리 마사히로가 나서서 술자리를 정리했다.
나도 천천히 뒷정리를 도우면서 여자 숙소를 힐끗거렸다.
아까 타나카 히로시가 수작을 걸때 내가 와다 쿄시로보다 먼저 나설 수 있었다. 약간이나마 하가와 료코로부터 점수를 딸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서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이 세계에서 여자를 천천히 공략할 생각이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다.
'일본 전통 문화 중엔 요바이가 있지.'
한밤중에 여자 방에 들어가서 강간하는 문화.
아주 끝내주는 전통 문화다.
ㆍㆍㆍ
덜컹덜컹.
창문이 흔들렸다.
이부자리에 누워있던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시간을 확인한다. 오전 2시 17분.
적당한 시간이다. 이대로 몰래 여자 숙소로 들어가 요바이하면 된다. 내 목표는 하가와 료코였다.
덜컹덜컹덜컹!
창문이 거세게 흔들린다. 비도 오는지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얼굴을 굳혔다. 이건 비가 내려오는 수준이 아니라 비가 지상을 때리는 수준이다.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창문 아래에 자리 잡은 와다 쿄시로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자고 있다. 창문 밖을 보니 심각했다. 나무는 부러질 듯이 휘날리고 비는 어마어마하게 내린다.
'태풍이네. 이렇게 갑자기 왔다고?'
조금 이상했다.
일정을 짤 때 태풍이 온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면 당연히 취소하길 마련이다.
'태풍이 갑자기 생겨났을 리는 없을 테니 기상 정보를 보면 알 텐데?'
스마트폰을 들어 확인했다.
이제 보니 저녁 무렵에 한국으로 가던 태풍이 경로를 확 꺾어 일본으로 상륙한 것이다. 상륙한 태풍의 속도가 확 느려졌고 최소 3~4일은 태풍의 영향을 받을 것 같다.
'태풍 따위가 날 막을 순 없지. 요바이 하러 간다.'
덜컹쾅!
무언가가 날아와 창문을 깨트렸다. 보니까 부러진 나뭇가지였다.
"뭐, 뭐야?!"
와다 쿄시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바라봤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한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소나기...라고 하기에는 바람이 너무 심하네. 태풍이구나. 후우. 다다미라 물에 젖으면 안 되는데."
와다 쿄시로는 무척 익숙해 보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불을 들더니 창문을 막았다.
"성 상. 창문이 깨진 이상 아예 허물고 나무판자 같은 거로 고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혹시 나무판자 같은 거 본 적 있어?"
"아니. 못 봤어."
"아까 저녁에 보니 부엌 옆에 창고가 있었어. 창고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는데... 판자 같은 게 있을지도 몰라. 성 상. 이불 좀 잡아주지 않을래? 내가 갔다 올게."
"아니. 내가 갈게."
벌서는 것처럼 이불 들고 가만히 서 있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