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4화 > 1164. 15일
"꺄아아아아아악!"
앞에 앉아 있던 안경 낀 단발머리의 수수한 여자, 네바타 노리코가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숙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한다.
비명의 원인은 곤충이었다. 말벌 한 마리가 자동차 안에 들어와 노리코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날았다.
"뭐, 뭐야?!"
"말벌?!"
"누가 빨리 좀 잡아!"
조용하던 승합차 내부는 한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남자들은 말벌이 다가오면 허둥거리며 몸을 최대한 낮췄다. 혐오스러운 곤충, 그것도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말벌이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그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젠장!"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고 귀에 피어싱한 남자가 욕설을 지껄이며 말벌을 향해 가방을 휘둘렀다. 말벌은 여유롭게 그 공격을 피했다. 남자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벌을 노려봤다. 그는 이 서클의 유명한 양아치이자, 멸치 문신남인 타나카 히로시다.
부웅부웅.
말벌의 움직임이 위협적으로 변했다. 날개 소리도 훨씬 살벌해졌다. 말벌은 가장 가까운 인간, 하가와 료코를 향해 날아든다.
"료코!"
침착하게 대응하려던 하가와 료코 대신에 와다 쿄시로가 나섰다. 손에 노트를 쥐고 말벌을 후려쳤다. 말벌이 뒤로 확 날아온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나카가미 리사가 깜짝 놀라더니 손에 쥔 스마트폰을 휘둘러 말벌을 쳐냈다. 뛰어난 반사신경이다. 문제는 말벌이 내 쪽으로 날아온다는 거다.
나는 중지를 당겨 말벌의 몸통을 정확히 때렸다. 신체 능력은 일반인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이 정도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말벌은 의자 뒷부분에 부딪히더니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말벌을 밟아 죽였다. 말벌의 몸이 으스러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안도 섞인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나카가미 선배! 죄송합니다!"
와다 쿄시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카가미 리사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가 쳐낸 말벌이 나카가미 리사에게 날아갔기 때문이다.
나카가미 리사는 와다 쿄시로를 한 차례 노려봤다.
"됐어."
싸늘하게 말한 나카가미 리사는 이어서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날카롭던 눈초리는 풀어진 상태다.
"아까는 미안해. 경황이 없어서 네 쪽으로 날렸어."
"괜찮습니다. 당황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요."
"말벌을 손가락으로 때리는 모습이 보통이 아니던데. 말벌에 익숙한가 봐?"
"네. 익숙한 편입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말벌은 익숙하지 않다. 고등학교 이후로 말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말벌 따위가 전혀 두렵지 않다. 평범한 사람을 한 손으로 쳐죽이는 괴물들을 상대해온 내가 고작 말벌 따위에게 두려움을 느끼겠는가.
"1학년이지? 이름이 뭐야?"
"성유진입니다."
"...한국인?"
"네. 한국인입니다. 혹시 한국은 싫어하십니까?"
"별로. 한국 드라마랑 케이팝은 좋아하는 편이야."
나카가미 리사는 그리 말하며 스마트폰을 만지기 시작했다. 나는 끊어진 대화를 억지로 이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치근덕거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호감도를 쌓기엔 부적절한 선택이다.
'한국인을 싫어하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지.'
일본 젊은 여자의 경우엔 한국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최근 한국 드라마랑 음악이 유행하면서 오히려 한국에 호감을 가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남자놈들에겐 통용되지 않는 말이지.'
일본 남자 중에선 한국을 무시하는 놈들이 많다. 대학생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교수 중에서도 한국을 무시하는 놈들이 태반이다. 일본 꼰대 중에서는 심지어 한국이 아직도 80년대 수준인 줄 아는 놈들이 있다.
나는 적당히 그런 놈들을 무시하지만...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시비 거는 놈들이 꼭 몇몇 있다.
'여기에도 있지.'
타나카 히로시. 피어싱을 한 노란 머리 양아치가 나를 쏘아본다. 나는 마주 바라봤다. 잠깐의 눈싸움이 이어졌다. 먼저 눈을 돌린 건 타나카 히로시였다. 놈은 두고보자는 듯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나중에 확실히 조져놔야겠군.'
이지메의 나라 일본.
직장생활에도 이지메 문화가 섞여 있는데 대학교라고 해서 다를까.
'나는 이미 반쯤 이지메 당하는 중이고.'
폭력에 시달리는 괴롭힘은 아니고, 은근히 배척받고 무시당하는... 은따에 가깝다. 이지메 당하는 이유는 내가 한국인이라 그렇다.
덜컥덜컥.
나는 자동차 창문을 바라봤다. 나무들이 보인다. 아니, 나무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산골 마을이라도 그렇지... 너무 안쪽으로 들어가는 거 아닌가?'
같은 풍경을 계속 바라보는 것도 지겨운 일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처음 보는 게임을 켜고 집중한다.
'가챠겜이군. 게임 재화는 충분히 있고... 가챠 가즈아.'
[대길(Lv. Master)이 발동합니다.]
스킬이 발동하며 행운이 일어났다.
뽑기 버튼을 누르자마자 픽업 캐릭터가 0.5%의 확률을 뚫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기분은 영 별로였다.
'하루에 한 번밖에 발동하지 않는 스킬이 겨우 이런 거에 발동하다니... 이게 뭐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름 기대했던 스킬인데 꽝인 것 같았다. 나는 [대길] 스킬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승합차는 15분 뒤에 마을에 도착했다.
ㆍㆍㆍ
오오카루마 마을에 도착했다.
산골 마을치고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밭도 넓었고 현대적인 건물도 여럿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마을 끝, 산 위에 있는 신사다. 신사는 이 마을에서 가장 컸다.
"남자는 이 건물, 여자는 저 건물에서 지내면 돼. 내일 저녁부터 축제니까 그때까지 자유롭게 보내도록."
큰 체격의 근육질 남자가 말했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눈이 큰 그의 이름은 모리 마사히로. 재팬 페스티벌 스터디 서클의 부장이었다. 승합차의 운전대를 맡은 사람이기도 했다.
숙소로 들어갔다. 그리 큰 건물은 아니었으나, 생활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남자는 7명인데 방이 6개였다.
"1학년 2명. 가장 넓은 방 줄 테니 너희 둘이 같은 방 써라."
"네. 모리 선배."
"네."
와다 쿄시로와 내가 대답했다.
결국은 짬순이었다. 힘도 없는 1학년 2명은 4학년이자 서클 부장인 모리 마사히로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
'성질대로 확 엎어버릴까?'
참았다.
깽판을 치기엔 너무 이르다. 이 세계에 들어오고 아직 1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정보가 너무 없다. 정보가 어느 정도 쌓일 때까지 얌전히 있기로 했다.
와다 쿄시로와 함께 1층의 넓은 방에 들어갔다. 일본 전통 다다미방이었다. 넓긴 했으나 침대가 없다는 게 불편했다.
"성 상. 이렇게 마주하는 건 처음이네. 난 와다 쿄시로야. 잘 부탁해."
와다 쿄시로가 내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편견 따윈 없는 순수한 얼굴. 이 새끼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 확실했다. 나는 떨떠름함을 감추고 그의 손을 잡았다.
"성유진이다. 같이 방을 쓰게 됐으니 잘 지내보자."
"응. 성 상."
짐을 내려놓았다. 어색한 공기가 감돌 때였다. 문이 열리고 부장인 모리 마사히로가 들어왔다.
"1학년 둘. 할 것 없으면 나 좀 도와주지 않겠나?"
"오리 선배! 네! 물론 도와드릴게요!"
"...도와드리겠습니다."
"둘 다 고맙다. 2학년이나 3학년 놈들은 협조적이지 않아서... 너희 덕분에 살았다. 이 일은 반드시 갚으마."
모리 마사히로의 말투에서 고리타분한 냄새가 났다. 꼰대 냄새다. 솔직히 말해서 엮이고 싶지 않지만... 원작 정보를 위해서다. 나는 머릿속에 참을 인을 새기며 그에게 물었다.
"모리 선배.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내 질문에 모리 마사히로는 카메라를 들어 내게 건넸다. 얼떨결에 카메라를 받아들였다. DSLR라고 하던가. 묵직하고 비싸 보이는 카메라다.
"레포트를 작성하기 위한 자료가 필요하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주민들과 마을 축제에 관한 인터뷰를 진행한다. 성, 너는 사진만 잘 찍어라. 인터뷰는 나와 와다가 맡는다."
느낌이 왔다. 내가 한국인이라 인터뷰 역에서 제외한 것이다.
"예. 예. 알겠습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카메라 셔터만 찍찍 누르면 되는 편한 일이니까.
모리를 따라 숙소 밖으로 나가 마을 주위를 돌았다.
2시간 정도 걸어 다니니 마을의 구조는 대략 알 수 있었다. 마을 끝, 산 위에 있는 신사로 올라가려고 했으나 입구 주위에서 밭일하던 노인들에게 저지당했다.
"움직이지 마시오!"
"외지인은 신사에 올라갈 수 없소!"
노인이라고 해도 몸이 왜소하지 않다. 밭일로 단련된 건지 몰라도 셔츠 사이로 근육질의 육체가 보인다. 거기에 농기구까지 들고 있으니 서있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되었다.
"왜 안 되는 겁니까? 저희는 신사에 참배하고 싶습니다."
모리 마사히로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의 거구는 차분하게 말해도 위협적이었다. 노인들은 두려움을 감추듯 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신사는 지금 봉행 의식을 진행 중이오. 내일 있을 축제를 대비한 의식이지."
"봉행 의식 중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소. 축제가 끝나는 날에 신사에 올라가시오."
모리 마사히로는 뒤로 물러났다.
"아. 그렇습니까. 저희가 몰랐습니다. 신사의 사진은 찍어도 됩니까?"
"신사에 올라가지 않는다면 상관없소."
모리 마사히로가 내게 손짓했다. 나는 카메라를 들어 신사 사진을 찍었다. 건물만큼은 그럴싸해서 사진 찍는 맛이 있었다.
와다 쿄시로는 노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신사에는 무녀가 있나요?"
"무녀님? 당연히 있소. 내일 밤에 무녀님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축복을 내릴 것이오."
"저희도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내일 밤에 거리로 나오시오. 그럼 무녀님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축복을 내릴 것이오."
"저희도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내일 밤에 거리로 나오시오. 그럼 무녀님이 산신님을 대신하여 자네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실 거요."
"그렇군요. 내일 밤에는 꼭 거리로 나오겠습니다."
짧은 인터뷰는 끝났다. 우리는 다시 마을을 돌아다녔다.
나는 사진 찍는 일이 점점 귀찮아졌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재밌었는데.'
해도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모리 선배. 이제 돌아가죠. 이 마을엔 식당도 없어서 음식을 준비해야 해요."
"그거라면 여자들이 준비해준다고 하더군. 고생 많았다. 맥주를 가져온 게 있는데 너희에게 나눠주마."
"오, 맥주! 감사합니다!"
"대신 마지막으로 한 사람만 인터뷰하자. 아, 이건 개인적인 질문이니 녹음하지 않아도 된다."
"용량도 넉넉하니 녹음할게요."
"그래. 고맙다, 와다."
모리 마사히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밭쪽으로 향했다. 감자밭에서 일하던 노인이 우리를 보고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빤히 쳐다본다.
"선배. 저 사람... 뭔가 꺼림칙하지 않아요?"
몸은 비쩍 말랐고 두 눈이 움푹 파여 있다. 시커먼 눈동자는 시체의 눈과 비슷했다.
"노인에게 실례다."
"아, 죄송합니다."
"뭐, 나도 조금 꺼림칙하게 느껴지긴 하군."
모리 마사히로는 노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나이오 대학에서 온 학생입니다. 잠시 인터뷰해주지 않겠습니까?"
"인터뷰?"
"별거 아닌 질문입니다."
"......"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라는 뜻이다.
"작년 이맘때쯤. 오오카루마 마을에서 5명이 실종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들에 대해 아십니까?"
"...실종된 사람들의 친척인가?"
"아니요. 친척은 아닙니다."
"난 그 일에 대해 잘 몰라. 그리고 그 일은 이미 끝난 일이야."
"끝난 일이라뇨. 실종된 사람이 돌아온 겁니까?"
"경찰들이 조사를 끝냈어."
노인은 몸을 획 돌렸다. 날카로운 낫을 들고는 신경질을 부리듯 땅을 내려쳤다. 그 모습이 퍽 괴기했다.
"어르신."
"할 말은 없어. 말 걸지 마."
모리 마사히로는 노인에게 다시 말을 걸려다가 관뒀다.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나는 숙소에 들어가기 전 그들에게 말했다.
"모리 선배. 구멍가게에 잠깐 들렸다가 돌아오겠습니다."
"응? 필요한 물건이라도 있나?"
"컵라면이요. 야식용으로 챙기려고요."
"알았다."
카메라를 그에게 주고 구멍가게에 들어갔다. 웬만한 생필품은 모두 있었다. 구멍가게에 나오니 해가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산골이라 그런지 도시의 밤보다 더욱 어두웠다. 가로등도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돌아가기 힘들어 보였다.
'스마트폰 불빛에도 한계가 있으니... 여기 온 김에 손전등을 사야겠군.'
손전등을 사고 길을 걷는다.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아까 본 노인이 밭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손에는 날카로운 낫이 들려있다.
나는 꺼림칙한 노인을 무시하고 길을 걸었다.
그러나 50m를 걸었는데도 노인은 계속 날 보고 있다. 기분이 나빠져서 노인에게 소리쳤다.
"노인장! 할 말 있어? 없으면 눈깔아!"
"......"
노인은 미동도 하지 않고 날 주시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방향을 틀어 노인에게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