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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160화 (1,160/1,497)

〈 1160화 〉 1160. 아카데미의 구원자

하이난에 도착했다.

나와 성하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배에서 내렸다. 다만 성하리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근처에 있는 중국인들은 그저 자기 일에만 몰두했다.

성하리가 안도했다. 배 안에서 나와 섹스한 것을 사람들이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실제로는 소문이 전부 났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섹스하며 보냈다. 거기에 섹스에 집중한 성하리는 있는 힘껏 교성을 내질렀다. 방음이 완벽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들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모르는 척할 뿐이지.

나와 성하리는 중국 히어로의 안내를 받으며 임시 기지 건물로 향했다.

"하리야. 뭔가 느껴져?"

"...이상해. 꼭 우리 집에 온 기분이야."

"진련성가?"

"응. 우리 집은 정령들을 위해 결계를 이용해 정령계 비슷한 환경을 조성해두거든."

그녀의 말을 듣고 뒤늦게 깨달았다. 확실히 진령성가와 비슷한 환경이었다.

'난 예전에 정령계에 들어간 적 있는데.'

들어갔다기보다는 발목만 살짝 담근 수준이다.

'그때 감각이 어땠더라?'

꽤 오래된 일이라 잘 생각나지 않았다.

"어쨋든 마키나가 자기 의지로 쉽게 실체화한 걸 보면 정령계의 영향을 받은 건 확실해."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임시 본부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은 영 별로였다. 낡았다. 아니, 촌스러웠다.

우리는 건물 안쪽에 있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은 넓었고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해 있었다. 그들은 조용히 우리를 쳐다봤다. 누군가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누군가는 불만 어린 시선으로 이쪽을 쳐다본다. 인사를 건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와 성하리는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모일 사람은 모두 모였군요. 그럼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회의실 중심으로 한 남자가 걸어오며 말했다.

"우선 건네드린 서류의 3번째 페이지를 봐주십시오. 하이난의 지도입니다. 붉은 부분이 보이시지요? 정령계 구역입니다. 정령계 구역은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섬 전체가 정령계로 변하기까지 80일 정도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합니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서류를 들었다.

팔랑팔랑팔랑.

서류를 대충 넘긴다. 하이난섬의 지도, 하이난섬을 점령하고 있는 정령들에 대한 정보, 숙지해야 할 공략 방식 등이 적혀 있었다. 중국어로.

힐끗. 시선을 옆으로 돌려 성하리를 바라봤다. 그녀의 미간에 川을 그리며 서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서류 역시 중국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는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통역사도 없었다.

'나보고 알아서 통역하라는 뜻인가?'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데 기분이 더러워졌다. 서류만 한국어로 되어 있어도 너그럽게 넘어갔을 것이다.

안간힘을 쓰며 어떻게든 서류를 이해해보려는 성하리를 보니 더욱 더 짜증이 났다.

성하리의 힘이 필요하면서 이따위로 대우하다니... 심사가 뒤틀린다.

나는 의자에 삐딱하게 앉으며 책상 위에 발을 올렸다.

"......"

브리핑이 멈췄다. 날 향한 시선들이 곱지 않았다. 특히 브리핑을 진행하던 남자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풋."

그 모습이 노릇하게 구워진 돼지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아, 미안. 통구이 돼지가 생각나서. 계속해."

"...한국인은 예의도 모르는 건가."

나는 중간 손가락을 세웠다.

와그작.

남자의 손에 들려있던 서류가 구겨진다. 동시에 주위에 있는 몇몇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공기가 떨린다. 성하리는 상황을 알았는지 한숨을 내쉬고는 전투를 대비한다.

나 또한 마나를 움직였다.

파직.

손끝에서 전류가 튀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불리하다. 적들은 20명이 넘고 전원 A급 히어로 이상의 실력자다. 정정당당하게 싸우면 이쪽이 진다. 지금 내 수준으로는 저들 2~3명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내게는 무기랑 소모품이 있지.'

그것들을 적절히 이용하면 놈들의 절반 정도는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영 안 될 것 같으면 도망가면 된다.

"그만."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구석에서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구석으로 향했다. 창백한 인상의 남자였다. 검은색 화푸를 입은 노인이었다. 대머리의 그는 정면만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쓸데없는 기 싸움은 관두고 작전 설명이나 계속해라."

"죄, 죄송합니다. 왕 대인."

돼지 통구이를 닮은 남자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브리핑을 계속했다. 내게 적대감을 내뿜던 이들도 노인의 눈치를 보면서 서류에 집중했다.

'뭐 하는 늙은이지?'

구석에 있는 노인을 빤히 쳐다봤다. 노인은 내 시선을 느꼈음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피부가 창백하다 못해 회색으로 보이는군. 시체 같은 느낌이야.'

나는 성하리에게 작전을 설명해줬다. 큰 목소리로 한국어를 또박또박. 중국인들은 눈살을 찌뿌리며 날 노려봤으나, 노인의 눈치를 살피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작전은 2시간 뒤에 시작합니다. 이걸로 브리핑은 끝났습니다."

"......"

모두가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그제야 다른 이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우리를 한 번 째려보고는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이 일은 양 대인이 함께하시니 우리들만으로 충분할 터. 대체 왜 한국인을 임무에 데려온거지? 협회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협회는 우리들만으로 안 된다고 판단한 거지. 마음에 안 드는군."

"같이 협회에 가서 따지지 않겠나?"

"...글쎄.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만."

"협회가 우리 말을 듣겠나."

그들이 떠나갔다.

"하아."

성하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피곤함이 가득한 안색으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갑자기 왜 그랬어?"

"뭐가?"

"아까 화냈잖아."

"지들이 초대해놓고 우릴 무시하잖아."

"...나도 화가 나긴 하더라. 그래도 뒷일은 생각해야지. 싸우게 되면 어쩌려고 그랬어?"

"질 것 같으면 도망가면 돼. 우리가 없으면 손해인 건 저놈들이야."

"그래도 여긴 적진인데..."

나는 성하리의 뺨을 잡았다. 그녀의 말이 끊어졌다. 시선을 교환한 우리는 조용히 입을 맞췄다.

•••

나는 양 타오에게 왕 대인이라 불리는 노인에 관해 물었다.

"왕 대인이 누구냐고? 어떻게 왕 대인을 모를 수가... 아, 그렇지. 너는 한국인이지. 유창한 중국어에 잠시 깜빡했군."

"됐고. 그 노인은 누구지? 보통 기세가 아니던데."

"우리 중국의 S급 히어로이자, 사령문의 문주이신 사령제(死靈帝) 왕쯔신 대인이시지."

"사령제? 사령술사인가?"

양 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중국 최고의 사령술사다. 그 분을 보면 예의를 갖춰라."

"...그 잘난 사령술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 사태에 필요한 인력은 사령술사가 아니라 정령사 일 텐데."

양 타오는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나도 자세하게는 모른다. 그 분을 모신 건 내가 아니니까. 듣기로는 정령을 막아내는 결계를 그 분께서 설치하셨다고 하더군."

나는 몸을 돌렸다. 왕쯔신이 S급 사령술사라는 걸 제와하고 알아낸 건 별로 없었다.

'사령문이라... 처음 들어보는데. 귀락곡과 연관 있는 곳인가?'

귀락곡(鬼落谷)

중국 어딘가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빌런 집단 중 하나.

강시술사, 사령술사, 네크로맨서 등이 집중적으로 모인 세력이었다.

'왕쯔신... 위험한 냄새가 나는 늙은이야. 조심하는 편이 좋겠군.'

•••

작전이 시작되었다.

나와 성하리는 중국인 세 명과 한 조가 되었다. 임무는 남쪽 방향으로 내려가며, 이 사태의 원흉으로 추정되는 정령을 찾아내 없애는것.

다시 말해서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는 임무였다.

다른 조도 우리와 똑같은 임무였다. 단지 시작 지점이 좀 달랐다.

'중국 히어로 협회 놈들은 우리를 믿고 있지 않아.'

그들은 성하리의 능력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자세한 사정을 몰라도 아마 중국 히어로 협회 내부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것이다.

'중국 히어로 협회 놈들은 왕쯔신이 사태를 해결하기를 바라고 있어. 골치 아프네.'

어쨌든 우리는 작전대로 진행했다.

중국인 삼인방은 성하리를 힐끗거렸다. 성하리의 미모가 워낙 뛰어나서 그렇다. 그들은 성하리에게 잘 보이려고 앞장서서 전진했다.

바람이 불었다.

뒤에서 불었다가, 앞에서 불었으며, 옆으로 이동한다.

이질적인 바람에 모두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긴장시켰다. 바람은 정면 허공에서 뭉치더니 한 형상을 취했다. 하반신은 말이고 상반신은 코끼리인 괴상한 형태의 바람의 정령이다.

[왔구나. 더러운 인간들.]

정령이 말했다.

허나 정령의 말을 들은 건 나와 성하리 뿐이었다. 중국인들은 정령의 말을 듣지 못하고 무기를 손에 쥐고 바람의 정령에게 달려들었다.

'저 정도면... 상급이군. 시작부터 상급이라니... 좀 빡센데.'

정령 주위의 바람이 칼날이 되어 중국인들을 공격했다. 중국인들은 잘 대처했다. 바람의 칼날을 피하거나 막아내며 정령에게 접근했다. 마나가 담긴 그들의 무기는 정령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혔다.

[아아악! 인간들! 진짜 싫어!]

정령이 분노했다. 거대한 바람이 일어나 주변 일대를 쓸었다. 중국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늘로 솟구쳤다. 바람이 허공에 뜬 그들을 유린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들의 피부에서 핏물이 떨어졌다.

나서려는 성하리의 어꺠를 잡아 제지했다.

"...오빠."

"기다려 봐. 뭔가 이상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상하다고...?"

성하리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정령안을 사용했다. 바람의 정령을 집중해서 바라본다.

정령핵이 보인다. 정령에겐 심장이자 존재의 근원 그 자체인 정령핵의 일부는 검게 물들어 있었다.

"...마령(魔靈)."

"뭐? 마, 마령이라고?!"

타락한 정령을 일컫는 단어.

나는 과거 마령을 직접 마주한 적도 있었다.

"...아니. 아직은 마령이 아니야. 정령핵의 일부가 마력에 침식당해... 아니, 모르겠네. 저거 마력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마력인가 싶었는데 보면 볼수록 뭔가 달랐다.

지지직!

허리춤에 찬 무전기를 손에 들었다.

"뭐."

- 지금 보고만 있을 겁니까! 동료를 구하십시오!

성난 중국어가 들린다. 나는 동료란 단어에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밀었다.

"니들 혹시 정령을 가지고 실험했냐?"

- 허, 헛소리하지 마시고 작전에 집중하십시오!!

오퍼레이터는 당황스러움을 순식간에 숨기고 소리쳤다. 나는 확신했다. 중국 히어로 협회는 정령을 가지고 어떠한 실험을 진행했다가 실패했음을. 아마 실험의 주축은 양쯔신. 그 노인일 것이다.

'그게 아니면 사령술사가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지.'

무전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밟아 부쉈다.

"야, 코끼리!"

앞으로 나서며 바람의 정령을 불렀다.

[난 코끼리가 아니야.]

대답하는 정령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내가 가진 높은 정령 친화력 때문일 것이다.

"그래. 잠깐 나랑 대화 좀 하자."

[싫어.]

"왜?"

[너도 인간이잖아... 하지만 나쁜 인간은 아닌 것 같으니 봐줄게. 여긴 들어가면 안돼. 돌아가. 아, 옆에 있는 인간은 놔두고. 그 인간은 죽어야 해.]

정령은 성하리를 적대했다. 성하리는 흠칫 놀랐다.

"얘는 내 여자인데. 그냥 보내주면 안 돼?"

[안돼. 죽여야 해.]

"왜?"

[무서우니까. 그러니까 죽여야 해."

"......"

성하리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녀는 낙담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리야."

"...난 괜찮아, 오빠. 정령들이 날 싫어하는 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날 싫어하지 않는 마키나가 이상한 거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정령이 노리는 건 성하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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