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7화 〉 1157. 아카데미의 구원자
"오빠...?"
내가 가만히 있자 성하리가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흐트러진 그녀의 옷을 정리하는 동시에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놈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 싸워야 할 거야."
"......!"
상황을 이해한 성하리는 몸을 긴장시키며 창을 손에 쥐었다. 풀어진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매섭게 변한 눈매로 주위를 경계했다.
나는 마키나의 시야로 놈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다. 발걸음 하나, 하나를 신중하게 내디딘다.
'이놈들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대략적인 위치는 알아도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면 시간 끌지 않고 신속하게 기습했을 것이다.
어떻게 대처할까.
잠깐 고민에 잠긴 나는 이윽고 인벤토리에서 C4를 꺼내 주위 나무에 설치해뒀다.
"...폭탄 쓰게?"
"기선 제압용으로 폭탄만큼 좋은 게 없거든."
성하리는 불신에 가득한 눈으로 폭탄을 바라봤다. 그녀 정도 되면 완전히 방심하지 않는 한 폭탄은 그리 위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접근해오는 적들도 능력을 가진 히어로이니 폭탄은 크게 도움이 안 될 것이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이놈들 딱 보니 은밀하게 행동하고 있어. 일종의 비밀 임무라는 거지.'
상대를 빡치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상대가 우너하지 않는 짓을 하면 된다.
'미리 기름을 발라두자. 그럼 폭탄이 터지면서 화재가 일어나겠지. 어쩌면 숲까지 번질 수도 있고. 크크. 적지 않은 시선이 이곳에 모일 테고... 뒤처리하려면 골치 좀 아플 거다.'
방해받아서 좆같은 기분이었는데, 상대도 좆같아 질거라 생각하니 그나마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큭큭 거리며 웃고 있자 성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까의 남녀 특유의 끈적해진 분위기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하리야. 저쪽으로 가자. 놈들을 유인하려면 저기로 가는 편이 훨씬 나아."
"...일이 커질 것같은데... 내 기분 탓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성하리는 직감이 뛰어났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폭탄을 설치한 곳에 놈들이 나타났다. 망설임 없이 폭탄 버튼을 눌렀다. 엄지로 빨간 버튼을 누르는 이 쾌감은 눌러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콰콰쾅! 펑! 콰앙!
폭발이 일어난다.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미리 발라둔 기름을 통해 불길이 번진다. 나는 뿌듯하게 폭발 장면을 지켜봤다.
그때였다.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펑! 퍼엉! 펑!
폭발 소리가 들린다. 공기가 터지며 울리는 소리였다. 하늘로 올라가던 검은색 연기가 무언가에 막힌 듯 올라가지 않고 주위를 떠돈다.
'바람을 이용해 산소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화재를 진압했군.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야.'
저들 중에 베테랑이 섞여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성하리에게 공간 이동 주문서를 건넸다.
"도망가려고?"
"상대해보고 안될 것 같으면 튀자. 알았지?"
"알았어."
놈들이 나타났다.
20명 정도였는데 마치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듯 포지션을 짠다. 나와 성하리도 시선을 교환하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저들의 사이에서 한 중년 남성이 걸어왔다. 분위기를 보니 현장 책임자인 것 같다.
"안뇽, 안뇽하십네까아."
어설픈 한국말이었다. 너무 어설퍼서 팽팽하던 긴장감이 탁 풀리는 느낌이다.
"조희는 싸우고 싶지 않습네다."
"......"
새로운 함정인가?
나는 경계를 풀지 않고 입을 열었다. 유창한 중국어가 튀어나왔다.
"무슨 목적이냐?"
"...중국어 실력이 뛰어나군. 현지인 수준이야. 혹시 중국인인가?"
내 중국어 실력은 유희 생활 어플을 통해 얻은 것이다.
"중국말을 중국인만 쓰라는 법은 없다."
"그렇긴 하지."
"너희는 딱 봐도 정문파가 아니군. 우리를 습격해온 이유는 뭐지?"
"너희들에게 협조를 구하고 싶다. 정확하게는... 네 옆에 있는 성하리의 도움이 필요하다."
중국은 협조를 이딴 식으로 구하는 건가?"
"너희들은 범죄자이지 않나. 특히 너는 테러리스트지. 평범한 이들과 같은 대우를 할 순 없지."
시간이 끌렸다. 20명이었던 그들의 수가 3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먼저 덮쳐오지는 않는다. 협조를 구한다는 건 사실인 모양이다.
"...일단 한 번 들어보도록 하지. 우리에게 바라는 일은 뭐지?"
"협조를 약속하는 건가?"
"무슨 일인지는 들어봐야지. 그리고 설마 공짜로 부려 먹을 생각은 아니겠지?"
"정당한 대가를 약속하지. 자세한 내용을 말하기엔 장소가 영 좋지 않군."
"여기서 말해."
남자가 눈을 찡그렸다.
"...중요한 이야기다. 기밀 등급으로 따지면 특급이지. 아무 곳에서나 말할 게 아니야."
"다시 말한다. 여기서 말해라. 당장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건 너희다. 우린 너희를 믿을 수 없다."
"우리에게 너는 필요 없다. 성하리와 이야기하고 싶군."
"성하리는 중국말을 할 줄 모른다. 그리고 성하리와 나는 동료다."
"......"
중년 남자는 입을 달싹였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입 모양을 보니 욕이었다. 그는 무전기를 들어 상황을 보고했고,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다.
"...좋다. 급한 건 우리 쪽이니 한발 물러나 주지."
"급한 주제에 생색내기는."
"자꾸 신경을 긁는군. 정말 우리에게 협조할 생각이 있는 거냐?"
"너희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렸지."
중년 남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자들에게 손짓하며 명령을 내렸다.
"상황은 해제한다. 물러나서 주변 통제 시작해라. 주민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대충 둘러대라."
그를 중심으로 바람이 일어났다. 바람은 나와 성하리, 남자 사이를 둘러싼다.
"특급 기밀이다 보니 정보가 새어 나가려는 걸 막아야 한다. 설마 이것도 불만인 건 아니겠지?"
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마키나에게 상황을 감시하라고 일렀다. 다행히 놈들은 수작을 부리지 않고 있다. 우리에게 협조를 구하는 건 사실인 듯했다.
"불쾌하긴 한데... 이 정도는 감수해주지."
"그거 참 고맙군."
남자는 목을 가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한 뒤에 말했다.
"약 일주일 전, 하이난에 던전이 터졌다."
"하이난이 어디지?"
"무식하긴, 하이난은 우리 중국 최남단에 있는 섬이다. 사람들은 하이난을 중국의 하와이라고 하지."
중국의 하와이?
처음 듣지만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던전이 터졌다면 중국 히어로 협회가 알아서 처리하면 될일이 아닌가?"
"던전 브레이크의 영향으로 하이난 일부가 이계로 변했다."
"...이계?"
난 얼굴을 굳혔다.
던전 브레이크는 공략이 완료되지 않은 던전이 터지면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걸 말한다. 몬스터를 처리하면 될 일이지만, 오염 구역처럼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있었다. 이계로 변했다는 건 던전 브레이크 상황 중에서도 최악의 상황을 말한다.
"그렇다. 덕분에 우린 아주 곤란한 상황을 직면했지."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런 정보를 들은 적 없다만."
"주민들이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정보를 통제 중이다."
개소리다.
언제부터 중국이 인민들을 그렇게 생각했나.
아마도 이 일에는 냄새가 고약한 무언가가 있다.
'대충 던전으로 실험하다가 일이 잘못된 거겠지.'
성하리가 검지로 내 어꺠를 쿡쿡 찔렀다.
"꽤 심각해 보이는데. 무슨 이야기 중이야."
나는 지금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줬다. 설명을 들은 성하리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오빠가 알아서 해. 난 오빠를 믿으니까."
"그래. 아까 하다만 일은 나중에 이어서 하자."
"...읏."
얼굴을 붉힌 성하리가 손바닥으로 내 어깨를 짝하고 내려쳤다. 깜짝 놀랄 만큼 매운 손맛에 고개를 저으며 중년 남자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당신 이름을 아직 못 들었군. 이름이 뭐지?"
"중국 히어로 협회 본부 4팀장인 양 타오다."
"그렇군. 나는 성유진이다."
"협력해주는 건가? 보상은 섭섭지 않게 챙겨주지. 금전으로 2억 위안이다. 너희가 원한다면 A랭크 아이템을 보상으로 줄 수 있다."
"아직 한다고 안 했다. 너희의 의뢰를 받기에는 정보가 부족하다."
"...의뢰?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가. 나쁘지 않군. 뭐가 궁금하지?"
"이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해라."
"......하이난성에 나타난 이계는 정령계다. 우리는 3번에 걸쳐 이계 제압을 시도했으나, 정령들이 미친 듯이 날뛰며 실패했다."
정령계.
그 말을 듣자마자 상황이 그려졌다.
"너희는 성하리의 특성을 알고 있군."
정령 포식자.
성하리가 가진 특성으로 정령을 대상으로 절대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상성을 가진다.
"어떻게 성하리의 특성을 알았지?"
"우리 중국은 인구수가 많은 만큰 인재 또한 많다."
양 타오는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추측컨대 정보계열 능력을 가진 놈이 성하리의 특성을 알아낸 것일 거다. 미래를 봤거나, 상대방의 능력을 알아내는 특수한 능력이 있거나 등등.
'아마 국가에서 관리하는 능력자일 테니 물어도 자세히 알려주지 않겠지.'
성하리는 나를 믿는다고 했지만, 이 일은 성하리의 의견이 중요했다. 나는 그녀에게 들은 것을 모두 설명했다.
"중국 히어로 협회는 네가 정령들을 없애 주기 원하는 거야."
그녀의 분위기가 척 가라앉았다. 그녀는 정령 포식자 특성을 가졌음에도 정령을 싫어하긴 커녕 좋아한다. 정령을 상대하는 일이 달가울 리 없었다.
"...정령 포식자를 이용해서 말이지?"
"맞아. 근데 정령 포식자를 사용해본 적 있어?"
"어렸을 적에 한번... 사용해봤어."
"어떡할래? 하기 싫으면 도망가면 돼. 주문서가 있잖아."
"정령들이 날뛰고 있다며? 피해가 어느 정도야?"
"한 번 물어볼게."
양 타오는 내 질문에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파악된 사망자만 4,000명에 달한다. 벼락에 맞아 죽고, 질식당해 죽고, 불에 타서 죽고, 땅에 파묻혀 죽고... 정령들이 온갖 방식으로 주민들을 죽였다.
곧장 성하리에게 통역했다.
"하리야. 4,000명이 죽었대."
"......"
성하리의 눈가가 파르르 딸렸다.
성하리는 나와 다르다. 나는 4,000명이 죽든, 4억 명이 죽든 관심 없다. 그러나 성하리는 기본적으로 정의로웠다. 불의를 보면 모른 척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성하리는 히어로다.
"여기서 내가 나서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겠지?"
"아마도. 근데 정령을 상대해야 해. 할 수 있겠어?"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각오를 굳혔는지 결연한 빛이 눈동자에 감돈다.
"사람이 잘못했으면 사람을 바로 잡고, 정령이 잘못했으면 정령을 바로 잡아야 해."
"그래? 근데 정령이 아니라 사람이 잘못했다면?"
"...대답은 이미 했잖아. 오빠는 어쩔 거야?"
"널 도와줄게."
나는 궁금했다.
이 일은 미래에 알려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중국이 성공적으로 숨겼다는 뜻이 된다.
'원래 역사에서도 성하리가 나서서 해결했을 가능성이 커.'
어쩌면 내가 원하는 정보가 이 사건에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