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5화 〉 1155. 아카데미의 구원자
브로커에게 150만 원을 주고 산 낡아빠진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자동차는 병에 걸린 환자처럼 덜덜 떨었다.
"쯧."
자동차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마음 같아선 저기 갓길에 주차되어 있는 외제차를 훔쳐서 타고 싶지만, 도망자 신세라 조심해야 한다. 경찰이 따라붙기라도 하면 평탄한 생활은 끝이다.
고속도로 위에 오른다. 평일이라 그런지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나는 자동차가 고속도로 중간에 퍼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어휴, 자동차가 왜 이렇게 시끄러워? 오빠, 돈 벌면 차부터 바꾸자. 외제차가 그렇게 좋대."
조수석에 앉은 성하리가 말했다. 마키나는 뒷자석에 누워 자고 있다.
"우리에게 현상금이 붙은 거 잊지 않았지?"
"브로커를 이용하면 되잖아."
"브로커는 수수료를 많이 떼먹어."
"그깟 수수료 얼마 한다고."
"수수료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하는 것도 별로 없는 브로커가 수수료 챙기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차는 훔쳐써도 돼."
"...아니. 그건 좀 아니지."
트럭 하나가 내 앞을 달린다. 속도는 100km/h가 넘었으나,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뻑뻑한 핸들을 확 꺾으며 트럭을 추월했다. 트럭 운전수에게 빡큐를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빠. 진짜 데빌 헌터야?"
"...왜?"
"요 일주일 동안 악마와 관련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잖아. 브로커를 만나 자잘한 심부름만 하고."
"악마의 흔적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그놈들은 숨는 것도 잘하거든. 혹시 질렸어? 아카데미로 돌아가도 돼."
"질린 건 아니고 궁금해서 물어봤어. 그리고 나도 수배당했는데 어떻게 돌아가. 아카데미에 돌아가면 바로 감옥 직행이야. 나한텐 오빠밖에 없어. 알지?"
반론하려다가 말았다.
아카데미에서는 성하리가 돌아오면 환영할 것이다. 그녀 정도의 실력자는 없으니까. 거기에 성하리의 친가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가문이다. 성하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
"이번 의뢰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받아 온 거야?"
성하리에게 물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범죄 조직 3곳이 얽혀 있잖아. 그래도 우린 다른 건 필요 없이 호위에만 신경 쓰면 돼."
"하루에 1억. 괜히 그 돈을 내걸 리가 없어. 아마 사람을 죽여야 할 거야."
몬스터를 죽이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일은 명백히 다른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성하리는 아직 사람 한 명 죽여본 적 없었다.
"...오빠가 말하지 않아도... 난 이미 각오했어."
"...더는 참견하지 않을게."
그녀가 이 일에 적응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나와 성하리는 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폐공장이다.
'영화에서 보면 이런 곳에서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던데.'
의뢰인은 아직 오지 않은 것 같다.
나와 성하리는 차에 등을 기대고 밤공기를 맞았다. 반나절 동안 운전만 했더니 밤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오빠는 진짜 나이가 몇이야?"
"내 나이가 궁금해?"
"외모만 보면 나랑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몇년전에도 똑같은 외모였잖아. 대체 진짜 나이가 몇이야? 마흔이 넘은 건 아니지?"
"마흔은 너무 갔다."
성하리에게 내 나이를 가르쳐주려던 나는 입을 다물고 빙긋 웃었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보니 장난기가 일었다.
"......"
침묵으로 대응하자 그녀의 입이 불만을 표하듯 삐죽 내밀어졌다.
"치사하게 안 가르쳐줄 생각이야?"
"왔군."
"응?"
성하리가 뒤를 돌아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검은색 차 3대가 폐공장에 줄줄이 들어온다.
"약속 시간보다 좀 늦었는데... 따질까?"
내 중얼거림에 성하리가 손사래를 쳤다.
"5분밖에 안 늦었잖아! 좀 참아! 돈이 급한 건 우리 쪽이라고!"
사실 그렇게 돈이 급한 건 아니었다. 가진 돈도 부족하지 않다. 다만, 성하리의 경제 개념이 남들과 조금 다를 뿐이다.
바깥에서 들어온 검은색 차 3대가 동시에 멈췄다. 문이 열리고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나온다.
나는 조용히 그들을 살펴봤다.
단련된 몸, 정련된 기세.
평범한 조직 폭력배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자였다. 검은 코트를 입었으며, 입에는 불붙은 시가를 물고 있다. 각진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하다. 그는 우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눈빛은 잘 벼려진 칼과 같았다.
'이놈이 태성파의 보스인 유일성인가. 보통이 아니군. A급 히어로 수준은 되겠어.'
힐끗. 성하리의 상태를 확인한다.
예상했던 대로 성하리는 굳어 있었다. 겁먹은 건 아니다. 아카데미 교사를 이길 정도의 실력자인 그녀가 조폭 따위에게 겁 먹을 리 없었다. 그녀는 분위기에 압도당한 거다.
'실력과는 별개로 성하리는 경험이 없어.'
이건 그녀가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젊군."
유일성이 시가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낮은 목소리는 강철 덩어리처럼 무거웠다.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인 기선 제압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압박해오는 분위기를 털어냈다.
"그래서 우리를 고용하지 않겠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그딴 말을 듣고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좀 빡치는데."
유일성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허세가 아니군. 혹시 이쪽 사람이냐?"
"내 얼굴 몰라? 제법 유명할 텐데."
그가 미간을 좁혔다. 옆에 있던 남자가 유일성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마 나에 대한 정보를 나불거리는 것일 터.
유일성의 흉악한 인상이 더 흉악해졌다.
"설마 테러리스트가 올 줄이야. 박가, 그놈도 미친 건가. 실력은 확실하다길래 직접 나왔다만..."
"실력은 확실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실력은 문제가 아니다. 널 믿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세상 어느 놈이 테러리스트를 믿나?"
"그래서. 고용 안 할 거야?"
급한 건 내가 아니라 유일성이다. 그가 브로커를 통해 호위 인력을 구한 게 그 이유다. 정말 신뢰가 문제라면 브로커를 이용하지 않는다.
"...자신만만하시군. 실력에 그렇게 자신 있나?"
"자신 없으면 오지도 않았지."
"한 번 확인해봐도 되겠지? 너희가 내 기준을 넘어선다면... 그때는 바로 너희를 고용하겠다."
"고용주가 고용인의 스펙을 확인하는 건 당연한 권리지... 뭘 하면 되지?"
유일성이 옆을 돌아보며 눈짓했다. 2m 거구의 남자가 뚜벅뚜벅 나섰다.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긴다. 척 가라앉은 눈빛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전사의 그것과 같다.
"우리 애들은 외부인을 부르는 걸 이해하지 못하더군. 너희의 필요성을 직접 증명해보도록."
"혜지."
한 박자 늦게 성하리가 반응했다.
혜지는 성하리의 가명이었다. 얼굴을 숨기지 않고 대놓고 활동하더라도 이름은 숨기는 편이 좋다. 본명을 쓰는 것과 가명을 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그녀는 자동차 뒷자석에서 창을 꺼내 들고 앞으로 나섰다.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둘이 동시에 덤비는 게 아니라 여자 홀로 날 상대한다고? 같잖군. 좋은 말로 할 때 전력을 다해라"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한다고 하지. 근데 우린 사자가 아니라서."
"하, 오냐. 이 여자부터 처리하고, 네놈도 묵사발을 내주마."
남자에게서 기세가 터져 나온다.
상하리가 전투 자세를 취하기 전에, 남자가 먼저 기습적으로 움직였다. 상처투성이의 커다란 주먹을 움켜쥐고 성하리에게 접근한다. 그가 노리는 것은 성하리의 복부. 일격에 끝낼 생각인지 주먹에 시퍼런 기운이 맺힌다.
성하리의 다리가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남자의 주먹은 성하리의 잔상만을 스쳤다.
깜짝 놀란 남자가 몸을 획 돌려 성하리의 움직임을 쫓는다. 늦었다. 그가 성하리의 움직임을 놓친 순간부터 결판은 났다. 성하리의 창날은 정확히 남자의 목울대를 겨눴다.
남자는 경악한 기세 그대로 성하리를 쳐다봤다. 패배의 원인이 기술도 뭣도 아닌 신체 능력 차이에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내가 졌다."
성하리는 창을 내리며 의연하게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유일성을 바라봤다.
"면접은 끝났지? 내일 몇 시까지 출근하면 되지?"
"...여자의 실력은 인정하마."
"참고로 내가 혜지보다 강해."
나는 타인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
"직접 봐야 믿을 수 있다? 꽤 피곤한 타입이군."
나는 앞으로 나섰다. 성하리에게 패배한 남자는 방심하지 않겠다는 듯 양 주먹을 쥐고 날 주시했다.
띡.
정전기 소리가 들렸다. 성하리만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머지는 전조현상을 깨닫지 못했다. 뒤늦게 유일성이 시선을 위로 올렸다.
시퍼런 벼락이 남자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기절한 남자는 그대로 정면으로 고꾸라진다.
놀란 조폭들이 순식간에 우리 주위를 포위한다. 위협을 느낀 성하리가 양손으로 손을 쥐었다.
"죽이지는 않았어. 그냥 기절한 것뿐이야."
유일성이 손을 들었다.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풀린다. 그들은 기절한 남자를 살폈다.
"...마법. 아니, 특성인가? 벼락을 떨어뜨리는 특성이라... 대단하군."
"우리를 고용할 건가?"
"당연하다. 어쭙잖은 놈이 찾아왔다면... 이 자리에서 묻어버렸겠다만... 너희는 진짜로군."
그가 손짓했다. 그의 부하들이 주위를 정리하며 떠날 준비를 한다. 유일성의 곁에 있던 남자가 내게 종이를 하나 건넸다. 주소와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내일 아침 9시까지 그 주소로 찾아오도록. 아, 옷은 정장을 입었으면 좋겠군."
그들은 떠났다.
성하리는 복잡한 눈으로 멀어지는 자동차를 지켜봤다.
"아까 그 말 사실일까?"
"우리를 여기서 묻어버린다는 말?"
성하리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이겠지. 그러려고 이런 장소를 선택한 것일 테고. 혹시 쫄았어?"
"쫄긴 누가 쫄았다고 그래?!"
성하리가 발끈했다. 그러나 나는 성하리가 두려움을 느꼇다는 걸 눈치챘다. 피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가 가까이에 있음을 깨닫고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를 말이다.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성하리라면 어렵지 않게 적응할 테니까.
•••
나와 성하리는 근처 양복점에서 정장을 하나 골라 입고 태성파로 향했다.
몸매 좋은 성하리는 정장도 잘 어울렸다. 검은색 정장 바지는 몸에 딱 맞아서 허벅지가 섹시하게 느껴졌고, 상체는 풍만한 가슴 때문에 야하게까지 느껴졌다.
정작 성하리는 정장이 어색한 듯 조수석에 앉아 연신 손거울을 확인했지만.
태성파에 도착했다.
5층짜리 건물로 시내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저기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경계가 삼엄했다.
우리는 건물에서 나온 남자의 안내를 받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