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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154화 (1,154/1,497)

〈 1154화 〉 1154. 아카데미의 구원자

[이제 어떡해?]

영체화 상태의 마키나가 물어왔다.

나는 쿰쿰한 창고를 둘러봤다. 창고 내부는 휑하다. 창문을 통해 이쪽을 감시하는 남자가 보인다.

마나는 봉인되었다. 수갑의 영향이다. 따라서 마키나를 실체화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너 결계 밖으로 나갈 수 있냐?'

[한 번 해볼게.]

창문 밖으로 날아가던 마키나는 무언가에 막힌 듯 창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마키나는 발과 주먹으로 결계를 두들기다가 포기하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안 돼. 꼼짝없이 갇혔어.]

'결계 하나 철저하게 설치해뒀군.'

한 시간도 안 돼서 정령을 막을 정도의 결계를 설치했다. 아카데미 교사다웠다.

[설마 이대로 죽는 거야?]

'...너 왠지 즐거워 보인다?'

[네가 죽으면 난 자유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내가 죽으면 넌 이 던전에서 못 나가. 이 던전이랑 같이 소멸한다고.'

마키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지, 진짜?]

나도 모른다. 원작의 플레이어는 죽으면 다시 시작한다. 원작에선 남겨진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어, 어떡하지. 이러다 진짜 소멸해버리면 안 되는데... 다음 달에 재밌는 신작 게임 나오는데... 야, 성유진! 일어나! 자고있을 시간 없어! 일어나라구!!]

마키나가 시끄럽게 굴었다. 실체화하지 않은 상태라 다행이었다. 적어도 내 몸을 만지지는 않으니까.

나는 두 눈을 딱 감았다.

저번 던전이 그랬던 것처럼 이 던전도 결국엔 무너질 것이다.

•••

끼이익.

"아주 태평하게 자고 있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성하리였다. 한 손에는 창을 든 그녀는 당당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녀가 치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수갑을 풀었다.

[아줌마! 역시 아줌마가 구하러 올 줄 알았어!]

내 옆에서 자고 있던 마키나가 펄쩍 뛰었다. 성하리는 웃으며 마키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떻게 들어온 거야? 교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을 텐데."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물었다.

"낮에 말했잖아. 전투력만 따지면 내가 교사들보다 더 강하다고."

입구 쪽을 바라봤다. 쓰러진 남자가 보인다. 교사를 기절시키고 들어온 모양이다. 그리고 입구에는 다른 여학생이 한 명 있었다.

"이해할 수 없군.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흑갈색의 긴 머리카락의 여인이었다.

훗날 마루한 아카데미의 학장이 되는 강지영이다. 내가 알고 있는 강지영과 똑같이 생겼다.

'자세히 보니 키와 가슴이 더 작군.'

어쨋든 다부진 여장부의 분위기를 풍기는 건 똑같았다.

"도와줘서 고마워, 지영아. 책임은 전부 내가 질게. 어차피 아카데미는 그만두려고 했거든. 떠나기 전에 사고 한 번 치는 거지."

"...사고 치는 수준이 아니다. 네가 한 짓은 명백한 범죄다. 히어로 협회가 네게 수배를 내릴 수 있다."

"그러고 싶으면 그러라지."

강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네 선택이다. 네가 알아서 해라."

"...고마워, 지영아."

"......"

강지영은 그대로 사라졌다.

"류하나는?"

"류하나? 아, 오빠 옆에 있던 그 여자? 나도 몰라. 오빠가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일단 밖으로 나가자."

창고 밖으로 나왔다. 기절해 있는 교사를 지나치고 뒷산으로 향했다.

"결계를 용케도 풀었군."

"지영이가 도와줬어. 지영이는 마법은 서툴지만, 결계를 해석하거나 해제하는 건 잘해. 수갑 열쇠를 구한 것도 지영이야. 작전도 되게 잘 짜거든."

"마법이 서툴다고? 여기 창고 결계를 해제했는데?"

"본인 말로는 결계를 해제하는 거랑 마법 실력은 관계없다던데?"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뒷산에 들어온 나는 정령안과 천안을 사용했다. 어둠을 꿰뚫어 보며 류하나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류하나의 성격이면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큰데... 안 보이는군.'

10분 이상 찾아봤는데 보이지 않는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오빠. 빠져나갈 궁리나 해. 시간이 지나면 선생님들이 우릴 추적할 거야. 정면으로 나가는 건 힘들어."

"담을 넘는 것도 힘들겠지. 결계가 있으니까."

"맞아. 잘 아네."

나는 마키나를 시켜 아카데미를 돌아다니게 했다. 정령안을 사용해 그녀의 시야를 공유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를 샅샅이 뒤졌지만, 류하나는 보이지 않았다.

'아카데미를 벗어났나? 류하나에겐 그편이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수도..."

아카데미에 계속 있었으면 붙잡힐 수도 있었으니까.

"하나는 없어. 아카데미에 없는 것 같아."

돌아온 마키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성하리의 어깨에 매달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간 이동 주문서를 소환했다. 주문서가 있는 이상 아카데미를 벗어나는 것쯤은 간단한 일이었다.

"진짜 우릴 따라올 거야?"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면 오빠를 구하지도 않았어. 설마 여기서 날 버리고 가겠다는 건 아니지?"

"......내가 널 여기에 버리고 가면?"

"쫓아갈 거야. 그리고 흠씬 두들겨 패서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네."

나는 그녀에게 공간 이동 주문서를 건넸다.

•••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던전 안에 있었다.

이제는 던전을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라플라스. 그놈이 원흉일 거야. 던전에서 벗어나려면 놈을 찾아야 해.'

놈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저번 던전과 다르게 이번엔 꼭꼭 숨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류하나가 사라진 것도 놈의 수작인가. 류하나는 어떻게 됐을까.'

라플라스에게 당해 죽었나. 아니면 시련을 끝내고 바깥으로 나갔나.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자일 가능성이 크지만, 후자이기를 바라고 있다.

"으으음. 궁을... 궁을 그따구로 쓰면 어떡해 이 새끼야..."

내 옆에 누워 잠들어 있는 마키나가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기계 정령이면서 게임하는 꿈을 꾸는 모양이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봤다.

모텔이다.

현재 나는 도망자 신세였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다.

철컥!

방문이 열리며 성하리가 들어왔다.

"오빠! 해가 중천이야. 아직 자고... 아, 일어났네."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성하리가 들어왔다. 현재 그녀에게도 지명수배가 떨어진 상태였다. 내 목에는 10억이란 현상금이 붙었고, 그녀에겐 2억이란 현상금이 붙었다. 죽어도 상관없는 나와는 다르게 그녀에겐 반드시 살아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TV나 라디오를 통해 수배 사실을 알리지 않아서 일상생활엔 큰 지장이 없다. 일반인들은 수배지를 찾아보거나 하지 않으니까.

"대낮부터 무슨 일이야. 기분 좋아 보인다?"

"브로커에게 의뢰를 받아 왔어. 돈이 떨어질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성하리가 침대에 앉았다. 그녀가 서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의뢰서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의뢰인과 접선하는 방법이 적혀있었다.

"이번 의뢰는 호위 의뢰야. 일주일 동안 의뢰인을 호위하면 돼. 의뢰비는 하루에 1억으로 총 7억이야. 엄청나지?"

"이런 의뢰를 우리에게 준다고? 좀 수상한데."

브로커와 만난 지 5일 밖에 되지 않았다. 신뢰 관계고 뭐고 없었다.

"그놈도 우리 실력을 인정한 거야. 브로커에게 가는 수수료는 20%야. 실제로 우리에게 떨어지는 돈은 하루 8천만 원밖에 되지 않아."

"...둘이서 나누면 4천만 원인가. 생각해보니 그리 비싼 것도 아닌 것 같고... 의뢰인은?"

"함경북도 쪽에 자리 잡은 조폭인가 봐. 중국이랑 러시아 마피아 사이에 끼여서 고생하고 있나 봐."

"그 외의 다른 정보는?"

"없어. 의뢰인을 직접 만나서 대화하래. 꺼림칙하면 의뢰를 안 받으면 돼. 의뢰를 받을 거면 밤 8시까지 함경북도로 가야해."

성하리가 묘하게 흥분된 기색으로 말했다. 처음으로 받는 억대 의뢰에 신난 모양이다.

나는 재잘거리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호감도를 확인했다.

『성하리의 호감도 : 55 』

호감도 55는 연애 감정을 느끼는 수치였다.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호감도가 이렇게 올랐다. 의아했다.

"오빠? 아까부터 왜 그래? 잠이 덜 깼어?"

성하리의 어꺠를 잡고 내 쪽으로 당겼다.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며 서로의 숨결이 느껴졌다. 성하리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못한 게 아니라 자기 의지로 하지 않은 것이다.

"......"

"......"

조용히 시선을 교환한다.

성하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턱을 살짝 위로 올렸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는 뻔했다.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당연히 해줘야지.'

그녀의 탄탄한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입을 맞췄다. 내 혀가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혀가 섞인다. 성하리의 입안을 내 타액으로 마킹한다.

허리에 올라간 손을 움직여 그녀의 오른쪽 옆구리를 만졌다. 성하리가 움찔 떨었다. 그게 전부였다.

'...맞다. 내 눈앞에 있는 성하리는 가짜지.'

진짜 성하리였다면 좀 더 격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나는 묘한 아쉬움을 느끼면서 그녀의 엉덩이로 손을 뻗었다. 청바지 너머로 모양 좋고 탄력적인 엉덩이 감촉이 느껴진다.

"힉?!"

성하리가 입을 떼며 다급히 물러났다. 그녀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붉었고, 입술은 촉촉하게 젖어 반짝거렸다.

"왜 그래?"

"아, 아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도망치려는 성하리의 손을 붙잡았다. 침대에서 일어나며 반대로 그녀를 침대로 밀었다. 침대에 누운 그녀가 눈을 끔뻑였다.

나는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덮치는 자세 그대로 서로의 입술이 가까워진다.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키스했다. 내 손은 그녀의 허리로 향했다. 그녀의 하얀 티셔츠 끝을 잡고 들어 올릴 준비를 끝냈다.

"하음... 아까부터 시끄럽게... 응? 둘이 섹스하는 거야?"

눈을 비비며 일어난 마키나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깜짝 놀란 성하리가 날 밀치며 벌떡 일어났다.

"저, 점심 먹어야지! 포장해올게. 여기서 기다려!"

성하리가 도망쳤다.

나는 혀를 차며 마키나를 노려봤다. 마키나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와 성하리는 몸을 겹쳤을 것이다.

"이 눈치 없는 것."

"뭐, 왜, 뭐!"

마키나는 당당하게 굴었다.

"네가 계속 잠들어 있었으면 우린 이미 섹스했을 거야. 좀만 참지. 그것도 못 참냐?"

"내가 왜 자는 척 해야 해?! 난 억울해! 너희가 다른 곳에서 하면 되잖아!"

"이게 반성도 하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기는."

빡!

"악!!"

마키나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마키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허공을 날더니 내게 발차기를 날렸다. 손을 들어 발차기를 막아낸 내가 씩 웃었다.

"반항이냐? 오냐, 한 번 해보자."

"죽어, 성유진!!"

나와 마키나는 성하리가 돌아올 때까지 투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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