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2화 〉 1152. 아카데미의 구원자
뒷산에 가까이 다가가자 창무과 건물이 보였다. 촌티 나는 건물은 크기만 따지면 본관과 맞먹을 정도로 컸다.
마침 창무과 건물 입구가 열리고 누군가 걸어 나왔다. 검은색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을 가진 몸매 좋은 여학생이다.
성하리였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나를 알아본 듯한 반응이다.
‘우연이겠지.’
성하리가 날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녀는 날 처음 보는 것일 테니까.
나는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머릿속으로는 성하리에게 할 질문을 떠올렸다.
‘성하리는 2학년 때 중퇴한다. 그리고 지금 성하리가 2학년이지. 성하리는 아카데미를 중퇴한 이후의 행적이 모호해.’
협회가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성하리는 S급 히어로가 되어 대중 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짧고 굵게 활동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히어로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행적이 묘연해진다.
‘아마 지금 성하리는 중퇴를 생각하고 있겠지. 중퇴 이후에 무엇을 할지 물어보자. 아무 계획 없이 아카데미를 중퇴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선 나름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성하리는 내 쪽으로 똑바로 걸어왔다. 내가 가볍게 인사하려고 손을 들었을 때, 그녀가 갑자기 뛰어오더니 내 팔을 잡고 건물 뒤쪽으로 끌고 갔다.
“자, 잠깐.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냐고?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대체 왜 테러리스트가 아카데미를 활보하고 있는 거야?!”
성하리가 말했다. 나는 이질감을 느꼈다.
‘나를 알고 있다? …거기에 날 테러리스트로 인식한다고?’
이 던전에 들어오고 자동차를 훔치긴 했으나, 그 외의 사고는 치진 않았다. 차량 절도범이라면 몰라도 테러리스트로 불릴 이유는 없었다.
‘……설마.’
『이름: 성하리
근력: A+ 체력: A 민첩: A+ 내구: B+ 마나: B+
특성: 정령 포식자(S).
스킬: 신창합일(A) 투창(A) 전투감각(A), 정화(E+), 역장(C-)
호감도: 44』
‘…….’
성하리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뛰어난 능력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 정신은 호감도에 집중되었다.
첫인상이 너무 좋아서 호감도가 40 이상이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성하리가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하리는 날 테러리스트라고 인식했지. 즉, 저번에 들어갔던 던전과 지금 던전은… 시간대는 다르지만 이어져 있다는 거야.’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여덟 번째 군단장, 라플라스 놈이 수작을 부렸다면 가능하겠지. 이 던전에 들어올 때도 ???로 떴으니… 100% 놈이 수작을 부렸어.’
창무과 건물 뒤편에 날 끌고 온 성하리가 나와 류하나, 마키나를 차례차례 둘러봤다.
“몇 년 만에 보는 오빠는 늙지도 않았고, 저 여학생은 처음 보고…. 오빠 머리에 있는 건 요정…? 아니, 정령이네.”
마키나의 정체를 바로 알아봤다. 진령성가 출신이라 정령에 익숙할 테니 놀랍지 않다.
“아줌마! 안녕! 확실히 젊어 보이네!”
손을 흔들며 인사한 마키나가 허공을 날아 성하리의 가슴팍에 뛰어들었다. 마키나를 받아든 성하리가 당황했다.
“어, 어? 아줌마…?”
급히 마키나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아악! 머리카락 아파! 놔! 대머리 되기 싫어!!”
마키나에게 의념을 보냈다. 성하리에게 우리에 대한 정보를 주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마키나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제야 마키나의 머리카락을 놓았다.
“흐아아아앙!”
마키나는 성하리의 가슴팍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성하리는 당황하면서도 마키나를 받아들였다. 싫어하는 표정이나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흥분한 표정이다. 아마 정령이 스스로 자신에게 다가온 건 처음이니 그럴 것이다. 거기에 마키나의 귀여운 외모도 한몫했을 것이고.
류하나는 성하리를 보면서 허리춤에 찬 두 개의 검자루를 만지작거렸다.
팔꿈치로 류하나를 툭툭 건들었다.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소곤거렸다.
“네 상대는 그녀가 아니야. 체력을 아껴.”
“…알고 있어.”
대련중독자인 류하나는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성하리를 바라봤다. 성하리는 이상한 분위기에 눈살을 찌푸렸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오빠. 상황 좀 설명해줘. 왜 아카데미 교복을 입고 여기에 들어온 거야? 아카데미에… 테러를 저지를 생각이야?”
“설명해줄게. 근데 반말이네? 이전에는 꼬박꼬박 존댓말 하더니.”
“그때는 내가 좀 어렸고. 오빠라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
나는 진지한 표정을 연기하며 말을 이었다.
“나랑 이 애…. 류하나는 데빌 헌터야. 악마를 쫓고 있지.”
“아…. 그래서 몇 년 전에 그 악마를….”
성하리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연 설명은 하지 않았다. 말이 길어질수록 의심받을 확률이 높다.
“…잠깐. 오빠가 아카데미에 왔다는 건… 아카데미에 악마가 있다는 말이야?”
없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의 흔적이 아카데미에 보였거든. 뭐, 이미 도망갔을 수도 있고. 일단 한 번 찾아보긴 해야지.”
“…….”
성하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입을 다물고 무언가 곰곰이 생각한다.
심각한 그녀의 표정과 다르게 그녀의 양손은 품에 안은 마키나를 마구 만지고 있었다. 특히 마키나의 뺨을 잡고 연신 주무른다.
‘저 부드러우면서도 쫀득한 뺨은 참기 힘들지.’
성하리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나도 끼워줘.”
“뭘?”
“오빠가 하는 일.”
“……아카데미에 숨은 악마를 찾는 일에 협력해주겠다는 거지?”
“이번 일 이후로도 협력할게. 날 데려가 줘,”
“……아카데미는 어쩌고?”
“그만둘 거야.”
“왜? 마루한 아카데미는 대한민국 최고의 히어로 양성소잖아. 졸업만 해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텐데?”
“졸업하려면 1년 반은 더 있어야 해.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만 버리는 꼴이야.”
“…그 말은 아카데미 교사에게 배울 것이 없다는 말이야?”
“배울 건 여러 가지 있겠지. 하지만 그게 전투와 관련된 건 아니야. 난 이미 아카데미 교사보다 강해.”
성하리는 이런 일로 고민하지 않는다.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뭐 하려고?”
“오빠를 따라간다니까. 데빌 헌터. 딱 좋네. 나도 악마놈들이 마음에 안 들었거든. 약속할게. 방해는 되지 않을 거야. 뭣하면 오빠 옆에 있는 여자랑 싸워서 내 실력을 보여줄 수 있어. 아마 내가 더 강할 거야.”
“…….”
성하리가 호전적으로 웃었다. 류하나는 조용히 검자루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팽팽해지던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는다.
“성하리. 우리가 아카데미에 오지 않았어도 아카데미를 중퇴할 생각이었어?”
“말했잖아. 전투 쪽으로 배울 건 없다고. 난 이미 아카데미를 나가기로 결정했어.”
“아카데미를 나간다면 어디로?”
“북쪽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니 북쪽으로 가려고. 거기서라면 경험도 쌓을 수 있겠지.”
이 시기의 북쪽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쨌든. 오빠를 따라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둬.”
“…누가 따라와도 된다고 했어? 넌 필요 없으니 아카데미에서 공부나 해.”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갈 거야.”
성하리의 눈에 서린 고집을 확인했다. 그녀가 고집을 부리면 답이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성하리는 그게 허락의 뜻으로 알았는지 입가에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내게 마키나를 건넸다.
“원래는 한 달은 더 있을 생각이었지만…. 지금 학장님이랑 대화하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어디 가지 말고.”
“…그래.”
거짓말을 했다.
성하리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바로 아카데미를 떠날 생각이었다.
성하리는 본관 쪽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
류하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젊었을 적의 아줌마는 가슴이 조금 작아. 젊은 아줌마도 좋긴 한데…. 역시 바깥에 있는 아줌마가 더 좋아.”
마키나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에 한 대 쥐어박았다.
‘밖으로 나가면 옛날 북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겠군.’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다. 성하리가 쫓아오기 전에 사라지자.
“성유진.”
류하나가 내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아닌 뒤쪽의 창무과 건물 위에 향해 있었다.
건물 지붕 위에 두 명이 서 있었다.
또 다른 성유진과 류하나다. 얼굴을 포함한 피부에 붉은 문신이 있는 그들은 지붕에서 점프해 지상에 가뿐히 착지했다.
적의 출현이었다.
류하나가 쌍검을 뽑아 들었다. 류하나는 가짜 류하나를 향해 먼저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전투가 일어난다.
나는 가짜 성유진을 노려봤다.
“어? 나, 나도 있잖아! 도플갱어?!”
가짜 마키나를 본 마키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놈의 어깨에 또 다른 마키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미 예측했던 일이기에 놀라지 않았다.
놈이 날 보고 씨익 웃으며 나와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널 죽이고 성하리를 따먹도록 하지.”
나는 인상을 팍 썼다.
“가짜 새끼가 선 넘네? 성하리는 내가 따먹는다.”
“가짜라…. 그거 아나? 진짜가 없으면 진짜와 똑같은 가짜가 진짜가 되는 거야.”
가짜의 두 눈이 황금빛으로 변하고, 그 푸른 전류가 파지직 튀었다.
“유희 생활.”
“갑자기 웬 개소리냐?”
“모르는 모양이지?”
“되도 않는 소리로 떠보려는 모양인데… 너랑 내 능력의 차이는 없어. 기억도 똑같아. 어제 네가 시은이 보지를 만진 기억도 내 머리에 있지.”
놈은 유희 생활 어플에 대해 모른다. 나는 낄낄 웃었다. 자신을 비웃는 걸 알아차린 가짜의 얼굴이 구겨졌다. 놈이 허공에 손을 뻗었다. 화련비도가 나타나 그의 손에 들린다. 물론 가짜 화련비도였다.
“망할 새끼가. 진짜 죽여버리고 싶네.”
“그거 아냐? 네가 운이 좋아 날 죽인다고 해도… 넌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없어.”
“아 그거 믿고 쪼갠 거야? 그놈이 날 밖으로 빼내 줄 테니 괜찮아. 그놈 능력이면 가능해.”
“…라플라스. 그 새끼 지금 어딨어?”
“내가 말해줄 거 같아? 대화는 끝이다. 가자, 마키나.”
가짜 옆에 붙어 있던 마키나의 형태가 오나홀로 변한다. 그러나 보통의 오나홀과 달리 그 길이가 화련비도와 비슷했다.
‘…설마 이 새끼. 내가 상상만 했었던….’
놈은 오나홀 입구, 분홍색 보지 모양 구멍에 화련비도를 납도했다.
놈은 한 차례 숨을 내쉬며 마나와 뇌전을 칼에 집중한다. 놈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뇌전을 휘감은 칼자루를 뽑았다.
“보지발도 보지일섬!”
나는 땅을 굴러 붉은 뇌전의 참격을 피해냈다. 참격은 땅에 30m가 넘는 참흔을 남기고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놈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마키나. 보지발도는 내가 평소에 생각한 미래식 발도술…. 보지발도에 대응하려면 이쪽도 보지발도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 오나홀칼집으로 변해, 마키나! 어서!”
“시, 싫어!”
마키나가 하늘로 날아 도망가려고 했다.
“계약을 잊은 거냐, 마키나!! 이건 명령이다!”
“히, 히이잉….”
마키나가 울상을 지으며 오나홀칼집으로 변했다. 나는 화련비도를 소환해 보지칼집에 칼을 납도 했다. 쯔걱. 오나홀칼집에서 끈적한 윤활유가 흘러나왔다.
“…공격하려면 공격할 수 있을 텐데. 날 기다린 건가?”
“내가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보지발도로 결판내자고.”
파지지직. 뇌전이 오나홀칼집에 스며든다.
나와 가짜는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발도 자세를 취했다. 휘이이익. 바람에 실린 낙엽 하나가 우리 사이에 떨어졌다.
우리는 동시에 충전된 오나홀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보지발도 보지일섬!
두 개의 참격이 허공에서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