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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151화 (1,151/1,497)

〈 1151화 〉 1151. 아카데미의 구원자

류하나를 앞에 두고 손에 쥔 청룡창에 마나를 주입했다. 청룡창 주위로 물이 생성되었다. 물은 중력을 무시하고 사방을 돌아다닌다. 비현실적인 수류를 보고 있자니 마치 여기가 물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당신에겐 시련을 도전할 자격이 있습니다. 청룡의 시련을 시작하겠습니까?』

‘도전한다.’

수류가 허공 한곳에 모여 던전으로 통하는 문을 만들었다.

류하나를 바라봤다. 결연한 눈을 한 류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내 어깨를 붙잡는다. 던전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류하나를 빨아들였다.

『특수 던전, ???에 입장했습니다.』

‘이번에도 ??? 특수 던전이라…. 역시 라플라스 놈의 수작이겠지?’

이를 악물었다. 기회가 된다면 라플라스를 죽여버릴 것이다.

•••

나와 류하나는 남산 타워에 있었다.

이번에도 서울에 나타났다. 시련을 받는 내게 가장 익숙한 곳이 서울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유로 저번 던전 배경도 서울이었다. 류하나는 기숙 생활을 하기 전에 줄곧 서울에서 생활했다.

“류하나. 이번에는 같이 움직이자.”

저번에는 라플라스라는 변수를 몰라 류하나가 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알았어.”

그녀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두 눈 만큼은 투지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나는 청룡창을 들고 서울을 바라봤다. 내가 알고 있는 서울과는 좀 다르다. 높은 빌딩이 부족하다. 또한 평일임을 감안하더라도 남산 타워에 있는 사람들이 적다.

‘서울은… 엉망이군. 도시 일부가 부서져 있는 상태잖아. 복구 안 하나?’

한반도에서 가장 활발해야 할 도시의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 현재 연도를 물어봤다.

“류하나. 너도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 던전도 과거가 배경이야. 혹시 가고 싶은 곳 있어?”

류하나의 고개가 한쪽으로 향했다. 서초동 쪽이었다.

“…아니. 가고 싶은 곳은 없어.”

“그럼, 말이야. 아카데미나 한 번 가보지 않을래? 옛날 아카데미잖아. 궁금하지 않아?”

내 목적은 성하리였다. 지금 연도에서 성하리는 아카데미에 있을 시기였다.

“여긴 던전에 불과하잖아. 그게 의미 있어?”

“궁금하잖아. 옛날 아카데미는 어땠는지. 여기를 바꾼다고 현실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잊힌 사실은 알 수 있겠지. 뭐, 평행 세계라 아예 다를 가능성도 제법 있지만.”

“그래. 아카데미로 가자.”

남산 타워를 내려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나는 주차장을 한 번 둘러보고는 고급 스포츠카로 향했다. 창문을 박살 내고 문을 강제로 열었다. 그 과격한 행동에 류하나가 놀란 듯 눈을 끔뻑였다.

“…그렇게 해도 돼?”

“이 세계는 현실과 아무 상관없어.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두 가짜야. 그 사실을 잊지 마.”

내가 운전석에 타고 류하나가 조수석에 탔다.

“시동은 어떻게 하려고?”

당연한 말이지만 문을 타고 열어도 시동을 걸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시동을 걸기 위해선 차 키가 필요했다.

‘해킹을 쓰면 해결되지만….’

나는 손목에 찬 시계를 툭툭 건들었다. 차르르륵. 시계가 부서지는 듯하더니 작은 인간의 형체로 변한다.

“이 몸 등장!”

허리에 양손을 얹은 마키나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나타났다. 본래 이 던전에서 계약한 정령을 소환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던전에 함께 들어오는 것까지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요정?”

60cm 정도의 귀여운 외형의 작은 인간. 귀여운 외모 탓인지 류하나도 정령보다는 요정이 먼저 떠오른 모양이다.

“기계 정령이야. 좀 특수한 정령이지.”

“안녕! 난 마키나야! 너는?”

“……류하나야.”

“이름이 하나구나! 좋은 이름이야! 잘 부탁해!”

마키나가 작은 손을 들어 올렸다. 류하나도 얼떨결에 손을 올린다. 서로 다른 크기의 손바닥이 겹쳐진다. 짝!

“마키나. 차에 시동 좀 걸어.”

약간의 마나가 빠져나간다.

부르르르릉.

차에 시동이 걸렸다. 나는 핸들을 딱 잡았다.

“시동 거는 것도 못 해? 내가 대신 운전해줄까?”

“운전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가만히 있어라, 제발.”

“흥.”

마키나는 내게서 고개를 획 돌리더니 류하나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 앉았다. 류하나는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했으나,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마키나의 귀여운 외모가 류하나에게도 먹혀든 것이다.

“출발해! 성 기사! 네가 얼마나 운전을 잘하는지 지켜봐 주겠어!”

“편안하게 모셔주지.”

운전은 자신 있었다. 옛날의 내가 아니다. 레이싱 대회에 나가면 1등 할 자신이 있었다.

액셀을 밟으며 단숨에 속도를 100km/h까지 올린다.

“오, 제법 하는데.”

“…너무 빨라.”

마키나는 좋아했고, 류하나의 안색은 굳어졌다. 류하나는 한 손으로 마키나의 배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문을 꽉 붙잡았다.

‘아차.’

바로 속도를 낮췄다. 지금은 놀러온 게 아니었다. 경찰이 뒤에 따라붙으면 귀찮아진다.

“뭐야, 갑자기 느려졌잖아. 속도 좀 높여!”

“시끄러.”

마키나의 투덜거림은 가볍게 무시하며 적정 속도를 유지했다.

“하나야. 성 기사는 너무 운전 못 하지 않니? 내가 운전했으면 2배는 빨랐을 거야. 아, 하나에게 내 운전 실력을 보여주고 싶네. 성 기사! 내가 운전할래!”

마키나가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류하나는 그런 마키나가 귀여운 모양인지, 연약한 아기 고양이를 만지듯 조심스럽게 마키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키나는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성하리가 자주 머리를 쓰다듬어주다 보니 익숙해진 모양이다.

나는 시끄러운 마키나의 목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라디오를 틀었다. 신나는 노래 대신에 차분한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렸다.

-현재 마포대교에 게이트가 열리며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히어로 협회가 대응 중입니다. 피난 경보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포대교 근처에 계신 분들은 침착하게 행동해주십시오.

재미없는 뉴스였다. 채널을 돌렸다.

치지지직.

남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린다.

-대구에 떨어진 피난 경보가 해제되었습니다. 대구 시민 여러분은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히어로 협회의 발 빠른 대처로 대구에서 일어난 인명 피해는 전무합니다. 히어로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대한민국은 오늘도 안전합니다.

치지직.

-제주도에 태풍이 접근 중입니다. 동시에 해양 몬스터가 관측되었습니다. 제주도민 여러분은 피난을 준비해주십시오. 다시 한번 말합니다. 제주도민 여러분은 피난을 준비해주십시오.

치지지지지직.

-강릉에 몬스터가…

치지지직

-현재 완도가 고립되어….

치지지직, 치지직!

라디오 채널을 계속해서 돌렸다. 음악이 나오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뉴스였다. 좋은 뉴스가 3할이고 나머지는 모두 몬스터 재해와 관련된 소식들이다.

‘90년대가 꽤 혼란스러웠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였나?’

나는 새삼스레 자동차 창밖을 바라봤다. 쩍쩍 금이 가 있는 아스팔트 도로, 일부가 부서진 빌딩, 무너진 가로등과 가로수, 뒤집힌 보행자 도로. 다시 보니 서울은 스산함이 느껴질 정도로 엉망이었다.

‘무엇보다 서울인데 사람이 너무 적어. 이 정도면 피해복구도 만만치 않겠는데….’

원인 모를 찝찝함을 느끼면서 강원도에 있는 마루한 아카데미로 쭉쭉 나아갔다.

•••

아카데미 건물도 현대의 것과 조금 달랐다.

위치는 똑같은데 건물이 낡고 작았다. 시내가 있어야 할 곳은 휑하니 비어있었다.

‘아카데미 앞에 시내가 형성되는 건 2000년대 초반이니 지금 풍경이 당연해.’

차를 끌고 아카데미 입구로 당당하게 들어간다. 입구는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다. 현직 히어로로 보이는 그는 자동차 쪽으로 털레털레 걸어왔다.

“여긴 마루한 아카데미입니다. 아카데미 관계자이십니까?”

“우리가 입은 옷을 보면 몰라요? 아카데미 교복이잖아요.”

“……학생이 왜 차를… 커억!”

찰나를 사용해 경비원의 목을 찔렀다. 한순간 방심했던 경비원은 그대로 즉사하며 쓰러진다. 나는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 경비원 시체를 넣었다. 입구에 달린 CCTV는 마키나가 조작했다. 점심때라 그런지 경비원이 한 명이라 편했다.

입구를 열고 다시 차에 들어갔다. 류하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류하나의 호감도: 31』

지난 2주 동안 대련하며 올려두었던 호감도가 4 떨어졌다.

“…경비원을 죽일 필요가 있었어?”

“우린 이방인이야. 신분이 없어. 그리고 아까도 말했듯이 이 세계는 가짜야. 그걸 잊지 마.”

“……몰래 들어가는 방법도 있잖아.”

“결계 때문에 불가능해. 너도 알잖아.”

“…….”

류하나는 반론하려는 듯하다가 포기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스포츠카가 마루한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갔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아카데미 땅을 밟은 나는 어색함을 느꼈다. 대충 20년 전의 아카데미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무겁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답답하다고 해야 하나. 나는 괜스레 목을 긁적였다. 마키나가 날아오더니 내 뒤통수에 매달렸다.

마키나에게 뭐라 하면 바락바락 대들 것이 분명했기에 무시하기로 했다.

“류하나. 가고 싶은 곳은 있어?”

“딱히.”

류하나는 정말로 과거의 마루한 아카데미에 관심 없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구조부터 파악해야 하니 대충 돌아 다녀보자.”

내 목적지는 창무과다.

이 시대에는 정령과가 전성기를 보내고 있을 테지만, 정령 포식자 특성을 가진 성하리는 정령과가 아닌 창무과에 들어갔다.

‘사람이 많은 본관에 들어가기는 꺼려지고…. 지금은 점심때이니 식당 쪽도 피하자.’

우선 내 기억 속에 있는 창무과 건물로 향했다. 신축된 커다란 건물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창문으로 내부를 확인했다. 활을 손에 든 학생들이 보인다. 궁무과였다.

나는 지나가는 궁무과 학생을 불렀다.

“안녕. 창무과가 어디인지 알아?”

학생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창무과를 모른다고?”

“창무과가 아니라서 그래. 난 마법과야.”

파지직.

검지와 엄지 사이에서 전류가 튀었다. 궁무과 학생은 전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의외로 마법사가 아니면 특성인지 마법인지 잘 구분하지 못한다.

“마법과라면 창무과가 아닌 것도 이해가 가지. 창무과는 저기에 있어.”

“…뒷산에 있다고?”

“창무과 친구한테 들은 건데 뒷산이 훈련하기 좋은 환경이라나, 뭐라나.”

“알려줘서 고맙다.”

궁무과 학생에게 인사하고 뒷산으로 향했다.

내가 다니는 마루한 아카데미에서 뒷산은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검무과가 위치한다. 아마 몇 년 후에 산을 없애고 새로이 건물을 세우는 모양이다.

‘산을 없애는 건 둘째치고 검무과가 들어서는 걸 보니 몇 년 뒤에 사건이 터지나 보군.’

창무과와 검무과는 견원지간이었다. 서로 만나면 으르렁거렸다. 서로 협력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뒷산에 가까이 다가가자 창무과 건물이 보였다. 촌티 나는 건물은 크기만 따지면 본관과 맞먹을 정도로 컸다.

마침 창무과 건물 입구가 열리고 누군가 걸어 나왔다. 검은색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을 가진 몸매 좋은 여학생이다.

성하리였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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