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9화 〉 1149. 아카데미의 구원자
던전 밖으로 나온 나는 쓰러져 있는 류하나를 발견했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고, 베인 상처로 인해 피가 줄줄 흐른다.
“류하나…!”
깜짝 놀란 나는 다급히 포션을 소환해 그녀를 치료했다.
류하나는 내 얼굴을 바라보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안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듯한 얼굴이다.
“…졌어. …져버렸어.”
류하나의 말을 들은 나는 귀를 의심했다.
‘류하나가 졌다고?’
원작에서 류하나가 상대할 적은 자기 자신이다. 류하나와 똑같은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적. 플레이어는 컨트롤만 신경 쓰면 어렵지 않게 쓰러뜨릴 수 있고, 게임 내 설정으로는 류하나가 전투 중에 성장하며 적을 쓰러뜨린다.
‘중요한 서브 퀘스트도 아니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씨발. 라플라스. 그 새끼가 개입했지.’
라플라스 때문에 던전은 변질되었다. 류하나의 적에게도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었다.
‘악마의 힘을 류하나의 적에게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다행히 류하나는 죽지 않았지만….’
류하나는 자기 자신과 싸워 졌다는 사실에 멘탈에 충격을 받았다. 멍하니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눈동자에는 초점이 잡히지 않는다.
놀라울 건 없었다. 류하나는 유독 1대1 대련이나 전투에서 패배할 때 멘탈이 크게 흔들리니까. 상대가 자신보다 더 강하다는 걸 애초에 인지하고 있었다면 모를까. 류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져버렸다.
나는 멍하니 누워 있는 류하나의 몸에 포션을 뿌린다는 이유로 은근슬쩍 그녀의 상의를 벗겼다. 하얀 브래지어가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의외로 큰 봉긋한 가슴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오른쪽 어깨로 시선을 옮겼다.
어깨에 붉은 문신이 있었다. 주작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문신.
『이름: 류하나
근력: C- 체력: D+ 민첩: C+ 내구: E+ 마나: B-
특성: 검의 무녀(SS)
스킬: 신검합일(A), 검의 노래(A), 영검(C).
호감도: 24
주작의 낙인(S)이 새겨졌다. 30일 뒤에 주작의 불꽃이 전신을 뒤덮는다.』
주작검이 패배자에게 낙인을 찍었다. 저주와 비슷한 능력이다. 이대로 있으면 류하나는 30일 뒤에 죽는다. 그리고 류하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주작검의 시련을 다시 받으려면 최소 수십 년은 있어야 한다는 거야.’
20년은 있어야 주작검에 힘이 쌓이고, 그 쌓인 힘으로 던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주작의 낙인은 시련을 통과하면 사라진다. 그러나 시련을 받으려면 그 던전에 들어가야 하지….’
방법은 있었다.
나는 아직도 멍하니 누워 있는 류하나에게 말했다.
“류하나, 상황은 알고 있지? 이대로 있으면 넌 죽어.”
“……너도 알고 있구나.”
“주작검을 선물한 건 나니까. 최소한의 정보는 가지고 있어.”
“…어떻게? 너도 주작검을 처음 보는 게 아니었어?”
“그 비슷한 물건들이 몇 개 있거든. 이대로 죽을 생각은 아니지?”
“죽고 싶지 않아. 하지만… 방법이….”
“방법은 있어. 어떻게 보면 네가 이렇게 된 것에 내 탓도 있으니… 내가 도와줄게. 자, 일어나. 언제까지 누워있을 거야.”
류하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류하나는 내 손을 천천히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일단 겉옷을 벗어 류하나에게 줬다.
그리고 류하나에게 던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갔어. 젊은 시절의 그분들 모습이 궁금했거든.”
“뭐, 그렇겠지. 나도 엄마를 만났으니까. 어땠어?”
“아버지는 어리숙했고… 어머니는 예뻤어.”
류하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에게 대련을 신청하려는데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났다고 한다. 류하나의 적이었다.
적은 다짜고짜 류하나를 공격했고, 류하나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전투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적의 신체 능력, 기술 등 모든 것들이 류하나와 동등했기 때문이다.
지속된 전투에 지치기 시작했다. 류하나가 잠깐 방심한 틈을 타서 적은 도망쳤다. 류하나는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회복했다.
적은 다시 나타나 공격해왔다. 대화는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네 번을 싸웠어. 그런데 다섯 번째부터 이상해졌어. 나랑 사용하는 기술은 똑같은 데 힘은 더 강했고, 속도는 더 빨랐어.”
“…그리고 네가 졌구나.”
“졌어. 갑자기 옆에서 튀어나온 몬스터가 아니었다면… 난 거기서 죽었을 거야.”
몬스터가 갑자기 튀어나와 전투를 방해했다. 그게 과연 우연일까?
‘우연은 무슨. 라플라스 새끼의 계략이겠지.’
라플라스의 정확한 목적이 뭔지 모른다. 그러나 류하나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알 것 같았다.
‘그놈이라면 주작의 낙인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테고…. 류하나가 다시 시련받기를 원하는 거지. 류하나를 미끼로 날 끌어들이려는 거야.’
끌려다니는 건 기분 나쁘다. 류하나를 포기하면 신경 안 써도 되겠지만…. 나는 류하나를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류하나는 고개를 숙이고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패배의 충격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류하나.”
목소리에 힘을 주어 그녀를 불렀다.
“…?”
류하나가 고개를 든다.
“오늘부터… 아니, 내일부터 나랑 매일 대련하자. 네가 주작의 시련을 통과하려면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해.”
대련.
그 단어에 류하나의 죽은 눈이 반짝이며 살아난다.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류하나와 자주 대련하지 못했던 게 기억난다.
‘멘탈이 아예 부서지지 않은 건 다행이군.’
•••
일요일.
아카데미를 빠져나온 나는 보트를 타고 동해를 항해했다. 배를 조종하는 건 내가 아니라 마키나였다. 나는 항해하는 법을 모르기에 마키나에게 맡겼다. 마키나는 혀를 빼물며 운전 핸들을 있는 힘껏 회전시켰다. 보트가 방향을 바꿔 바닷물을 가른다.
“거, 운전 좀 똑바로 하지? 아까부터 배가 너무 흔들리잖아.”
“똑바로 하고 있어. 모르면 조용히 해!”
검푸른 머리카락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마키나는 그 크기가 60cm밖에 되지 않아 요정처럼 보였다. 다만, 요정 같은 외모와 달리 성격은 지랄맞았다. 지금도 나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세우고 있다.
마키나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욕망을 꾹 눌러 참았다. 그랬다간 보트를 뒤집어엎을지도 모른다. 마키나의 지랄맞은 성격이라면 분명 가능성 있다.
“진짜 제대로 가는 거 맞지?”
“에휴. 모르면 조용히 하라니까?!”
“아까부터 뱅글뱅글 돌고 있는데?”
“아래쪽에 백상아리가 있어서 보고 있었어.”
“…동해에 백상아리가 왜 있어?”
“에휴. 바다니까 있지. 그것도 몰라?”
마키나가 한심하다는 듯 날 쳐다봤다. 난 기계 정령이 상어 똥이 되기까지 몇 시간이 걸릴지 궁금해졌다.
“바다에 있는 걸 어떻게 확인하냐?”
“바닷속에 카메라를 보냈으니까.”
마키나가 제 얼굴만 한 스마트폰을 들어 내게 보여주었다. 화면에 백상아리 한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이런 미친. 어쩐지 아까부터 소모되는 마나가 많은 것 같더니… 이런 쓸데 없는 짓을 하고 있었어?!”
“상어를 관찰하는 일이야. 그게 왜 쓸데없어!”
“그럼 물어보자. 상어를 관찰해서 뭐가 득이 되는데?!”
“몰?루”
“아나.”
빡!
결국 한 대 쥐어박았다.
“악! 왜 때려?!”
마키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날 죽일 듯이 노려본다.
마키나가 대드는 꼴을 보니 조금 기가 찼다. 나는 마키나의 계약자였다. 그것도 을이 아닌 절대갑의 위치에 있는 계약자. 마카나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이렇게 나대는 건….
‘성하리를 믿고 있는 거겠지. 성하리가 너무 오냐오냐했어.’
성하리의 심정이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마키나는 겉모습은 무척 귀여웠으니까. 거기다 나는 기숙 생활을 하다 보니 집에는 성하리와 마키나 두 명뿐이다. 모녀지간처럼 둘이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 거다. 분명 내 뒷담도 하겠지.
“안 되겠다. 오늘 날 잡자.”
“…힉?! 미, 미안 내가 좀 심했지? 일단 진정해, 유진아!”
도망가려는 마키나의 몸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마키나가 내게 사과했다. 이미 늦었다. 마키나를 잡고 보트 난간에 걸어갔다. 마키나가 기겁했다.
“아, 안 돼! 기계는 물에 쥐약이라구! 풀어줘! 풀어줘어어어!”
“반성의 반자도 안 느껴지는군.”
“이이잇!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아?! 아줌마한테 다 이를 거야!”
“그러시든가.”
마키나를 잡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귀가 먹먹해지고 몸이 무거워진다. 내 손에 붙잡힌 마키나가 팔다리를 허우적댔다. 그녀는 영체가 아니었기에 바다의 차가움을 느껴야 했다.
나는 마키나를 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물의 축복]은 바닷속에서도 잘 발동되었다.
몇십 초 지나자 진정한 마키나가 뚱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인간이 아닌 정령인지라 숨을 쉴 필요가 없었다.
[바닷물. 맛없어. 기분 나빠. 위로 올라가고 싶어.]
마키나의 의념이 머릿속에 울렸다. 그녀와 나는 계약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굳이 말이 아니어도 대화할 수 있었다.
나는 마키나의 의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 근처를 유유히 헤엄치는 백상아리를 목격했다. 백상아리 주위에는 카메라 한 대가 떠돌았다.
‘…상어가 아니잖아.’
[무슨 소리야. 넌 상어도 몰라? 딱 봐도 상어잖아. 그것도 백상아리!]
‘어디 상어가 20m 크기에 달하냐.’
저건 100% 몬스터였다. 아마 죽여보면 그 시체에 마석이 있을 것이다.
[근데 여긴 왜 온 거야? 상어 구경하러?]
‘상어 밥 주러 왔지. 생각보다 크긴 한데… 뭐, 괜찮겠지.’
마침 상어가 날 발견했다. 상어의 검은색 두 눈이 붉게 변했다. 꼬리를 치며 이쪽으로 헤엄쳐온다. 백조보다 우아해 보이는 헤엄이었다.
[그렇구나…. 상어 밥은 어디에 있어? 서, 설마 내가 상어 밥인 건 아니지?!]
‘…….’
[대, 대답하라구! 이 자식아!!]
‘그러게 내 말을 잘 들었어야지.’
[머, 멈춰…!]
멈출 생각이었다면 바다에 뛰어들지도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상어가 입을 쩌억 벌린다. 삐죽한 이빨 사이사이에 물고기 시체 찌꺼기가 보였다.
‘찰나.’
옆으로 피하면서 상어 입에 마키나를 내던졌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마키나의 비명과 함께 상어 입이 닫혔다.
‘이제 좀 반성하겠지?’
보통 정령은 치명적인 공격을 받으면 영체화된다. 평범한 상어 괴물이 영체화한 마키나에게 피해를 입힐 순 없을 것이다.
상어는 나를 먹기 위해 헤엄치며 쫓아왔다. 나는 도망치면서 상어를 피했다.
‘슬슬 영체화 될 때가 됐는데? 왜 아무 일도 없지?’
상어가 갑자기 헤엄을 멈추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키잉.
상어 머리에 시선이 생겼다. 뚜껑 열리듯 상어 머리가 위로 올라간다. 크기에 비해 엄청나게 작은 상어 뇌가 두둥실 떠올랐다. 뇌가 있는 부위에는 마키나가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 주위에는 여러 기계장치가 있었다.
[이 상어는 이제 제겁니다!]
마키나는 상어를 조작해 위로 올라갔다.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시발. 내가 지금 뭘 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