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7화 〉 1147. 아카데미의 구원자
보지 괴물의 소음순이 팔랑인다. 질구가 거대한 바람을 끌어모으더니 다시 배출해낸다.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지상을 덮쳤다. 보지의 바람이다.
심한 악취가 느껴졌다. 100년 썩은 음식물 쓰레기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100년 썩는 음식물 쓰레기는 없겠지만.’
아무튼 반격을 준비할 때였다.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몸에 달라붙더니 액체가 되었다. 끈적하고 투명하며 악취를 풍기는 액체는 옷을 녹이고 피부에 닿는다. 피부는 마치 화상을 입는 것처럼 뜨겁다.
대처는 신속했다. 몸에 달라붙은 액체를 털어내고 마나로 몸을 감쌌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지금까지 쌓은 경험이 빛을 발한 것이다.
“꺄아아아악!”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성하리가 얼굴을 붉히며 오른팔로 가슴을 가리고 있다. 그녀의 교복 일부가 녹아내려 속살이 보였다. 비록 전부 본 건 아니지만, 중학생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발육이었다.
“어딜 보는 거예요?!”
교복은 녹지 않고 있다. 나처럼 마나로 몸을 감싼 것이다.
“아니, 비명을 지르길래….”
“아, 진짜. 오늘 재수가 왜 이래. 저 하늘에 떠 있는 외설스러운 괴물은 뭐고…. 괜히 따라왔어.”
성하리가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그녀는 가슴을 가리고 있던 오른팔을 치우고, 양손으로 창을 쥐었다. 얼굴은 여전히 붉었으나, 표정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보지 마요!”
성하리가 소리를 꽥 지른다. 내가 그녀의 가슴을 빤히 쳐다봤기 때문이다. 별거 없었다. 교복 일부는 녹아내렸어도 하얀 속옷은 멀쩡했다.
“…별거도 없으면서.”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상황에 그딴 말이 나와요? 그리고 별거 없는 거 아니거든요.”
“…….”
별거 없는 게 아니란 걸 동의한다. 그녀의 가슴은 내 생각보다 더 컸다.
나는 고개를 들어 라플라스를 노려봤다. 제 8 군단의 주인은 흥미롭다는 듯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
‘원래 저런 놈이었지. 직접 싸우기는 싫어하는 놈.’
직접 싸우기 싫어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육탄전은 그의 특기가 아니다. 여덟 군단장 중에서 순수 무력은 가장 떨어지는 게 놈이다. 그러나 성가신 수준을 따지면 1~2위를 다툴 정도다.
‘어찌 보면 놈을 여기서 만난 건 행운일지도 모른다.’
내 궁극적인 목표는 다섯 번째 군단장인 메킨이다. 형편 좋게 메킨만 상대할 수 있다고는 처음부터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다른 군단장이 방해해올 거라는 건 훨씬 이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메킨을 죽이기 위해 악마 사냥꾼 특성을 얻은 이상 악마놈들과 싸울 수밖에 없어.’
나는 보지 괴물 뒤편에 있는 라플라스를 노려봤다. 최선의 수는 보지 괴물을 무시하고 라플라스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다.
‘…보지 괴물은 무시한다.’
라플라스를 향해 뛰어가려 할때였다. 보지 괴물이 움찔거리더니 벌어진 질구의 크기에 비해 1%도 되지 않는 요도 구멍이 천천히 그 크기를 키우고 부풀더니 형광색 액체를 지상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형광색 액체가 바닥에 고였다. 웅덩이. 아니, 연못 수준이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씨. 저게 뭐야. 꼭 오줌 누는 것 같아서 내가 더 민망하네.”
성하리의 목소리에 짜증이 담겼다. 그녀는 보지 괴물을 노려보더니 창을 던졌다. 창은 정확히 클리토리스 부분에 있는 눈깔에 명중했다. 눈깔이 터졌다. 보지 괴물은 고통을 호소하듯 꿈틀거렸다.
“오빠. 아까 보니 무기 소환하던데. 아공간 같은 거 가진 거죠? 창 몇 자루 좀 빌려주세요.”
약간 주저하다가 그녀에게 창 10 자주를 소환해 던졌다. 당황한 성하리는 창을 받지 못했다. 그녀는 투덜거리며 떨어진 창들을 주웠다.
“곱게 주면 어디 덧나나….”
“그럴 시간 없어. 그리고 그 정도는 쉽게 받을 수 있잖아.”
“한 번에 10 자루나 줄 줄은 몰랐어요. 아, 근데 이거 굉장히 좋은 창이네요. 어디 브랜드예요?”
“서리 망치 브랜드.”
“…서리 망치. 네. 기억해뒀어요.”
성하리는 창 하나를 투창했다. 이번에도 눈깔 부분에 명중했다.
“클리토리스를 노리다니… 보고 있는 내가 다 아프군.”
“클리토리스? 저 괴물의 이름이에요?”
“…….”
성하리가 되물어왔다. 클리토리스가 뭔지조차 모르는 모양이었다.
지금 시대를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현실과 다르게 컴퓨터 보급률은 낮고, 인터넷 사용률은 더 낮다. 학교에서 배웠다? 영어가 낯선 시대다. 배웠다 하더라도 클리토리스 같은 단어를 하나, 하나 기억할 리가 없다.
“성하리. 네가 저 괴물 좀 맡아줘. 잠깐이면 돼.”
“오빠는 저 뒤에 있는 악마를 상대하려고요? 좋아요. 오빠가 저보다 강한 것 같으니 그 말에 따를게요.”
“고맙다.”
허공에 역장을 생성했다. 역장을 밟으며 라플라스가 있는 곳까지 뛰어간다.
보지 괴물이 만들어낸 형광색 연못이 중심에 뭉치더니 하나의 괴물 형상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성하리가 날린 창이 괴물을 박살 냈다. 사방에 형광색 액체가 튀었다. 흩어진 형광색 액체는 꾸물대며 다시 중심으로 모여든다.
‘…지금 중요한 건 라플라스다.’
역장을 계단처럼 이용해 하늘 위로 올라갔다. 보지 괴물의 등 부분이 보였다. 검은색 촉수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 그게 보지 괴물의 음모임을 알았다.
하늘에 떠 있는 라플라스를 내가 코앞에 당도했음에도 여유로웠다.
‘뇌전.’
화련비도에 붉은 번개와 푸른 검기를 일으키며 라플라스에게 휘둘렀다. 라플라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냈다.
“이런. 내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군.”
“저딴 게 마음에 들겠나?”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만, 자네는 여성기를 무척 좋아하지 않나?”
“저건 보지가 아니야.”
대화 중에도 계속해서 칼을 휘둘렀다. 허나 칼날이 라플라스의 몸에 닿는 일은 없었다.
“난 말일세. 자네에 대해 깊이 조사했네. 자네가 태어난 날부터 시작해서 자네가 인간관계까지. 자네를 알기 위해 상당히 많은 걸 소모했다네.”
“시간 끄는 거냐?”
“자네는 내가 궁금하지도 않나? 다짜고짜 칼을 휘두르는군. 꼭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
“나는 이래 보여도 직접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말일세. 지구에는 내 흔적이 없다네.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자도 없지.”
“…….”
“대답할 생각이 없나? 이해하네.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현명할 때가 있으니.”
검기를 날렸다.
라플라스는 고양이 같은 유연함을 뽐내며 검기를 모조리 피했다.
“자네가 모친과 부적절한 관계라는 건 중요한 일이 아니니 넘어가고. 아카데미에서 여러 여자를 건들고 있다는 것도 넘어가지. 솔직히 별 관심도 없다네. 내가 자네를 경계하는 이유는… 자네는 마치 미래를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해왔다는 거지.”
“내가 미래를 본다고 생각하는 거냐? 너처럼?”
“미래를 본다는 건 그렇게 특별한 능력이 아니네. 인간 중에는 단편적이나마 미래를 보는 인간들이 제법 많네. 대표적인 게 예지몽이지. 그러나 미래를 바꾼다는 건 별개의 이야기라네. 쉽게 미래를 바꾸고 이용할 수 있었다면… 세상은 그들이 지배했겠지.”
나와 성하리의 관계를 알 정도로 철저하게 날 조사했다면… 내가 걸어온 행보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근데 자네는 달라. 미래를 알고 미래를 바꿨지.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고작 인간 따위가 말이야. 처음에는 내 권능에 버금가는 미래시 능력자로 생각했네. 그러나 자네를 살펴보니 그건 아닌 것 같더군. 당장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자네는 날 죽이기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이 던전에 들어왔겠지.”
“한 대만 맞아주면 전부 알려줄게.”
“…솔깃한 제안은 항상 거짓이더군. 뭐, 내 생각을 말하자면 말일세. 자네는 미래를 보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걸로 추정되네. 어디 쓸만한 예언서라도 얻었나?”
“들켰군.”
“오오. 좋은 예언서를 들고 있나 보군. 근데 예언서로는 자네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네.”
“…이 새끼가. 지금 날 놀리는 거냐? 내 행동을 왜 설명할 수 없다는 거냐?”
“악마에 대한 증오. 특히 메킨에 대한 증오. 예언서로는 자네의 동기를 설명할 수 없네.”
“악마 새끼를 증오하는데도 이유가 필요하나?”
“우리가 사악하다는 건 인정하지. 근데 자네는 정의로운 게 아니지 않나.”
“…….”
“그래서 결론인데 말일세. 자네 혹시 회귀했나? 회귀라면 미래를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고, 접점이 없는 메킨을 증오하는 이유도 설명되지.”
“넌 회귀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불가능할 건 또 뭔가. 바깥 신이 힘을 써준다면… 2~3번은 쉽게 회귀하겠지.”
“그래. 나는 회귀했다. 이번이 2회차지.”
“…………아닌가?”
라플라스가 턱을 짚으며 미간을 좁힌다.
나는 일부러 말을 아꼈다. 라플라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라플라스의 권능은 가능성. 놈은 정보를 바탕으로 가능성을 넓힐 수 있다.
‘슬슬 한 방 먹여볼까.’
숨을 삼키며 집중력을 끌어올린다. 마나를 사방에 흩뿌린다.
라플라스는 미래를 본다.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허나 그게 만능이고 무적이란 소리는 결코 아니다.
‘라플라스를 카운터 치는 아이템만 5개가 있지만… 그중에 내가 가진 건 하나도 없어.’
원작 게임에서 라플라스는 미래를 본다는 설정 때문에 일반 공격, 대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광역기는 다르다. 피할 가능성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광역기에는 데미지가 확실하게 들어갔다.
‘공명해라, 뇌전.’
파지직. 사방에 뿌린 마나가 뇌전에 공명한다. 시퍼런 전류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
전류에 갇힌 라플라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수십 개의 뇌전이 그의 몸을 때린다. 평범한 뇌전이었다면 무시했을 테지만, 전류 하나, 하나에 악마 사냥꾼(S)의 힘이 묻어있다.
라플라스는 이를 악물며 비명을 삼켰다. 한순간 드러난 고통스러운 얼굴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평온하게 변했다. 그는 허공을 발로 차며 더 높이 날아올라 휘몰아치는 전류의 폭풍 속에서 벗어났다. 그의 몸에서 시커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깜짝 놀랐군.”
그의 손바닥이 정장을 쓸었다. 전류에 의해 훼손되었던 정장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깔끔해졌다.
“미래가 안 보였나 보지?”
“비아냥거리는 걸 보니… 자네는 내 권능을 확실하게 알고 있군.”
젠장. 실수로 놈에게 정보를 줘버렸다.
나는 경련하는 입가를 만졌다. 방금 공격으로 마나가 10%도 남지 않았다. 완전 회복을 써야 할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
“선택할 가능성이 없다는 건 몇 번을 경험해도 불쾌하군.”
목덜미를 쓰다듬은 그는 내 뒤를 쳐다봤다. 보지 괴물이 지상으로 추락하는 게 느껴졌다. 성하리가 보지 괴물을 쓰러뜨린 것이다.
라플라스는 주머니에서 살덩어리들을 꺼내 허공에 던졌다. 살덩어리는 크기를 부풀리더니 보지 괴물로 변한다. 그 수만 20마리가 넘는다. 하늘은 거대 보지 괴물들에게 점령당했다. 보지의 악취가 진동한다.
“오늘은 인사하러 왔을 뿐이라네. 나중에 다시 보지.”
“인사하러 온 게 아니라 내 정보를 캐내려 온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