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6화 〉 1146. 아카데미의 구원자
나는 화련비도를 소환했다.
벼락이 통하지 않으면 직접 가서 썰어 죽이면 된다. 다행히 내 눈에는 진흙 거인의 심장이 어느 부위에 있는지 훤히 보인다.
‘가속.’
[가속을 사용합니다. 10분 동안 유지됩니다. 남은 스택: 5]
진흙 거인에게 접근한다. 놈의 발, 무릎, 옆구리를 밟고 어깨 위에 올라갔다. 10m가 넘는 높이다. 시야가 탁 트였다. 그러나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찰나.’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4]
느려진 세계에서 순식간에 자세를 잡았다. 붉은 전류가 칼날을 질주한다.
영천류(影天流) 뇌광(雷光).
진흙 거인의 목을 베어낸다. 놈의 머리가 목에서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진다. 목 부위를 쳐다봤다. 진흙이 뭉쳐있다.
푸욱.
자른 목에 칼을 찔러넣었다.
칼날은 진흙 거인의 심장, 핵에 닿았다. 그러나 꿰뚫지는 못했다. 갑자기 놈의 심장이 가슴 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젠장.’
잘린 목의 단면을 바라봤다. 진흙은 마치 물결처럼 꾸물거렸다. 진흙 속에서 단단한 바위 일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또 바위를 쏘려는 거군.’
놈의 몸을 박차고 지상에 내려섰다. 말뚝 바위가 나를 노린다.
영천류(影天流) 뇌음보(雷音步).
발에서 작은 천둥소리가 울렸다. 나는 춤을 추듯 진흙 거인의 공격을 모조리 피했다.
진흙 거인은 그새 머리를 재생했다.
‘쉽게 가려고 했는데 안 되네.’
나는 내가 가진 두 번째 특성을 떠올렸다.
『악마 사냥꾼(S)
마를 상대할 때 능력치가 상승한다.
마를 상대할 때 피해를 덜 받는다.
마를 상대할 때 추가 피해를 준다.
마를 죽일수록 효과는 더 강해진다.
마를 척살한다.
권능: 괴력의 권능(A-)』
몸이 뜨거워진다. 본능이 말하고 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진흙 거인을 찢어버리고 어딘가에 숨어 있을 악마를 추적하라고.
‘괴력.’
『괴력의 권능(A-)을 사용합니다.』
넘쳐흐르는 힘으로 화련비도를 휘둘렀다.
거대한 풍압이 일어나 진흙 거인의 몸을 반으로 가른다. 약간의 마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순수한 힘만으로 만들어낸 광경이었다.
‘저게 심장이다.’
붉은색의 동그란 돌.
나는 다시 한번 화련비도를 휘둘렀다. 어마어마한 풍압이 심장을 노렸다. 진흙이 방해했다. 진흙이 심장 앞에 모이더니 방패를 형성했다. 풍압은 방패를 찢어발겼으나 심장을 끝장내지 못했다.
덜덜 떨리는 팔을 무시하고 다음 공격을 생각한다. 여기서 끝내지 않으면 더 귀찮아질 것이다.
찰나를 사용하려 할 때였다. 뒤쪽에서 창이 날아와 정확히 심장을 박살 냈다. 주위에 떠 있던 진흙이 아래로 떨어진다.
고개를 뒤로 돌렸다. 성하리가 당당하게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가 알고 있던 진흙 거인과 조금 다르네요. 뭐, 그래도 별거 없던 것 똑같지만요.”
“막타충.”
“…막타충?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기분 나쁜데요.”
“네가 없었어도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었어.”
“제가 없었으면 오빠가 더 고생했겠죠.”
한 마디도 지려고 하지 않는다.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마석은 절반씩 나눠 가지죠.”
진흙 거인의 심장은 빛을 잃고 마석이 되었다.
“그냥 너 다 가져.”
“진짜죠?! 요새 용돈 다 떨어져서 곤란했었는데… 이거면 용돈 수준은 되겠네요! 오늘은 운이 좋네~”
용돈 수준. 듣고 있자니 기가 찼다. 악마의 힘에 의해 강화된 진흙 거인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수십억은 할 터.
‘이때부터 씀씀이가 남달랐군. …지금 중요한 건 성하리의 씀씀이가 아니지.’
기뻐하는 성하리를 무시하고 주위를 둘러본다.
『악마 사냥꾼(S)이 악마의 흔적을 찾습니다.』
『악마 사냥꾼(S)이 악마의 흔적을 찾습니다.』
『악마 사냥꾼(S)이 악마의 흔적을 찾습니다.』
알림창이 연달아 떴다.
악마를 반드시 찾아내 죽여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피식 웃었다.
『악마 사냥꾼(S)이 악마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오른방향에 불그스름한 연기가 아른거렸다. 연기는 마치 날 유혹하듯 흔들린다. 악마 사냥꾼(S)이 내게 보여주는 악마의 흔적이다. 나는 오른쪽으로 달렸다.
“잠깐만요, 오빠! 갑자기 어디 가요?!”
성하리가 내 뒤를 따라온다.
“넌 집으로 돌아가.”
“…싫어요. 제가 오빠 말을 들을 이유는 없어요.”
“그래. 마음대로 해라.”
가짜인 그녀와 실랑이를 벌일 이유는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악마다.
‘아마 악마도 가짜겠지만…, 악마 사냥꾼(S)이 반응했으니 악마를 죽이면 악마 사냥꾼(S)이 성장할 거야. 악마의 다른 권능도 얻을 수 있겠지.’
악마 사냥꾼(S)을 성장시킬 기회. 흔히 오지 않는 기회니 놓칠 수 없다.
“……뭔가 이상한데.”
성하리가 중얼거렸다.
“이상해? 뭐가?”
“…우리 집 바로 근처에서 몬스터가 나타났는데, 우리 집에서 반응이 전혀 없어요. 전투 상황은 정령들이 먼저 파악하고 알려줬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니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악마는 개체마다 성격과 권능이 다르다. 대놓고 파괴행위를 즐기는 악마가 있는가 하면 뒷공작을 즐기는 악마도 있다. 악마가 상대라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악마의 흔적은 시내 쪽으로 이어졌다. 성하리는 눈알을 굴리며 내 뒤를 따라왔다.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게 확실했다.
콰아앙! 쾅! 콰콰쾅!
폭음이 울린다.
시내에서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나온 몬스터들이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다. 몬스터의 피부에 검은 문양이 있다. 악마의 힘을 받은 것이다.
『악마 사냥꾼(S)이 분노합니다.』
『악마 사냥꾼(S)이 악마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붉은 연기가 선명해진다.
다른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악마의 본체를 노리라는 뜻이다. 어차피 가짜 세계. 잡몹을 처리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잠깐, 오빠! 근처에 몬스터가 있어요! 사람들이 위험해요!”
“네가 가서 도와.”
“…오빠. 이런 사람이었어요?”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
성하리는 내 뒤를 따라왔다.
“왜 계속 따라오는 거야? 사람들은 안 구해?”
“이미 히어로 협회가 움직였어요. 히어로들이 알아서 구하겠죠. 그게 히어로의 일이니까요.”
“너도 히어로잖아.”
“전 아직 히어로 아니에요.”
“아, 그렇지….”
흔적을 쫓아 시내를 달리던 도중이었다. 도망치던 시민 중 하나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경악해서 외친다.
“테, 테러리스트다!!”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성하리가 내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테러리스트? 저게 무슨 소리예요?”
“아, 내가 사실 테러리스트야.”
“…….”
“…….”
성하리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내 말을 농담으로 치부한 듯했다.
내가 테러리스트인 걸 안 성하리가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혹을 달고 악마와 싸울 수는 없지…. 떨쳐내자.’
[가속을 사용합니다. 10분 동안 유지됩니다. 남은 스택: 3]
영천류(影天流) 뇌음보(雷音步).
속도를 올린다. 나는 질주하는 자동차보다 빠르게 앞으로 달려갔다.
“뭐, 뭐야?!”
당황한 성하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하리의 기척이 점점 멀어진다.
‘미래의 성하리라면 모를까. 중학생 성하리는 나한테 안 되지.’
흐뭇하게 웃으며 다리를 놀린다. 밤바람이 시원하다.
콰앙! 쾅! 쾅!
뒤에서 폭음이 들렸다. 주위 여기저기서 전투가 일어나고 있으니 그러려니 했는데 폭음이 점점 크게 들려왔다. 가까워지고 있다. 고개를 뒤로 빼서 확인했다. 성하리가 이를 악물고 내 뒤를 쫓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불꽃처럼 이글거린다.
‘…성하리의 자존심을 건드린 건가?’
성하리는 달리는 게 아니라 마나를 이용해 도약하고 있다. 폭음은 그녀가 도약할 때 나는 소리다.
‘무식하게도 달리네. 저러면 마나가 떨어지는 건 둘째치고 신체에 부담이 갈 텐데.’
혀를 차며 속도를 줄였다. 내가 중학생 성하리의 고집을 너무 얕본 것 같았다.
“적당히 하고 집에 돌아가지.”
“전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성하리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목적지가 바로 코앞이었기 때문이다.
올림픽 공원, 평화의 문 광장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머리에는 중절모를 썼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다. 그의 등에는 고양이 꼬리가 살랑인다.
『악마 사냥꾼(S)이 악마의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거악을 마주했습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악마에 대한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나는 어느때보다 강력해진 힘을 느꼈다. 좋지 않았다. 악마 사냥꾼(S)이 이렇게나 힘을 줄 정도면 상대 악마가 범상치 않다는 뜻이다.
‘저 차림새…. 그리고 저 고양이 꼬리…. 설마.’
악마의 정체를 파악한 나는 얼굴을 굳혔다.
평화의 문을 보고 있던 악마가 몸을 돌렸다. 보라색 피부의 중년 남자였다. 수염이 없고 귀가 뾰족했다. 눈동자는 피처럼 붉었다.
“만나서 반갑네, 우리의 천적이여.”
그가 입을 열었다. 이빨이 검었다.
“나는 라플라스라고 하네.”
『악마 사냥꾼(S)이 악마를 간파합니다.』
『라플라스. 제 8 군단의 주인. 여덟 번째 군단장.』
숨이 턱 막힌다.
‘과거 서울에 군단장이 나타난 적은 없었어. 나타났었다면 서울이 없어지고도 남았지. 군단장 정도 되는 놈이 함부로 움직일 리도 없고.’
그러니 다시 말해 놈은 나와 류하나처럼 밖에서 던전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모종의 방법을 써서 먼저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던전에 들어오면서 봤던 알림창을 떠올렸다.
『특수 던전, ???에 입장했습니다.』
???
물음표 세 개.
어떠한 이유로 던전이 변질 되었다는 증거. 그리고 그 어떠한 이유는 내 눈앞에 있었다.
“망할…. 군단장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미래를 볼 수 있다네. 자네와 검의 무녀가 이곳에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네.”
“그래서 나를 죽이기 위해 여기에 와있었다? 이 세계는 네 무덤이 될 거다.”
놈을 보자마자 준비했던 벼락을 떨군다.
쿠르르르릉.
거대한 낙뢰가 어두운 밤하늘을 밝혔다.
“말하지 않았나.”
라플라스는 멀쩡했다. 그의 발치 주변의 검게 탄 땅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벼락을 피한 것이다. 사격 특성의 영향을 받아 백발백중을 자랑하는 내 벼락을.
“나는 미래를 볼 수 있다고.”
라플라스가 여유롭게 말했다.
나는 화련비도를 손에 들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영천류(影天流) 벽계(碧溪).
라플라스에게 달려가며 칼을 휘두른다. 라플라스는 뒤로 물러나며 내 공격을 피했다.
“자네의 공격은 특히나 우리에게 치명적이지. 무섭군, 무서워.”
라플라스는 물 흐르듯 이어지는 참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낸다. 마치 탭댄스를 추는 것처럼.
“일생일대의 소원이다. 제발 한 대만 맞아줘라.”
“무리한 소원이군. 뭐, 이래 보여도 악마이니 대가만 적절하게 치른다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대가는 뭔데?”
“자네 목숨.”
“지랄!”
뇌전을 일으켰다. 전류가 그를 덮치기 전에, 그는 바닥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저놈, 원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다. 억지로 던전에 들어왔다면 제약이 있겠지. 무리해서라도 여기서 죽여야 한다.’
“나는 직접 싸우는 걸 싫어하네. 그야 격이 떨어지지 않나.”
라플라스는 정장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살덩어리였다. 살덩어리는 그의 손에서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린다.
“자네를 위해 준비해 둔 게 있지. 자네가 좋아할 모습이 눈에 선하군.”
그가 살덩어리를 하늘로 던졌다. 살덩어리는 하늘을 부유하며 그 크기를 증식해나갔다. 그것은 여성의 외음부를 닮았다.
클리토리스, 소음순, 요도, 질구…. 까놓고 말해 보지였다. 다만, 클리토리스 부위에는 커다란 눈알 하나가 박혀 있다. 충혈된 눈알이 지상을 바라보며 움직인다.
“미친 새끼. 저런 마수를 만들어? 대가리 돌았군.”
“왜. 자네가 좋아하는 게 아닌가? 난 자네 취향을 100% 반영했을 뿐이네.”
“아니, 좋아하긴 하는데….”
저건 보지를 닮은 괴물일 뿐이었다.
나는 멍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보지 괴물의 소음순이 팔랑인다. 질구가 거대한 바람을 끌어모으더니 다시 배출해낸다.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지상을 덮쳤다. 보지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