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145화 (1,145/1,497)

〈 1145화 〉 1145. 아카데미의 구원자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인기척이 느껴지는 쪽을 바라봤다. 가로등 아래에서 한 여자가 이쪽으로 걸어온다. 아카데미와는 다른 검은색 교복,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검은색 단발머리. 등 뒤에는 2m가 넘는 길쭉한 무언가가 비스듬히 걸려 있다.

“와. 애들이 엄청 모여 있네. 오빠도 정령사예요?”

키가 작다. 가슴은 봉긋한 수준이다. 얼굴에는 젖살이 빠지지 않고 남아 있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알았다.

그녀는 중학생 시절의 성하리다.

『이름: 성하리

근력: B- 체력: B 민첩: A 내구: C 마나: C+

특성: 정령 포식자(S)

스킬: 전투감각(A), 정화(E), 역장(D)

호감도: 15』

무심코 성하리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중학생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능력치였으니까. 물론 바깥의 성하리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의 능력치다.

‘지금의 성하리와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상대는 성하리였다. 수치로 확인할 수 있는 능력치만이 전부가 아닐 터.

‘……내 모든 능력을 사용하면 어떻게 이길 것 같긴 하군.’

생각에 잠겼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중학생 상대로 무슨 짓인가.

“오빠. 벙어리예요?”

성하리가 성큼 다가왔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반반한 얼굴에 비해 싸가지가 좀 많이 없어 보였다.

“…무슨 볼일이야.”

“말할 줄 아네. 아까부터 입 다물고 날 보고 있어서 벙어리인 줄 알았잖아요.”

“무슨 볼일이냐니까. 혹시 나한테 반했어?”

“미쳤어요?”

성하리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녀의 반응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 같다. 던전 밖의 성하리는 날 미치도록 좋아하는데.

다가오던 그녀는 어느 순간 멈췄다. 대충 10m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나를 경계하는 건가? 그런 것 치고는 너무 거리를 벌렸는데?’

이유는 뒤늦게 눈치챘다. 내 곁에는 하급 정령들이 모여 있었다. 정령들은 성하리의 눈치를 보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다가오면 당장이라도 도망갈 기색이었다.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못 보던 정령사가 우리 집 근처에 나타났으니까요. 평범한 정령사면 저도 이러지 않는데… 그 애들이 그렇게 잘 따르는 광경은 처음 봐서요. 오빠는 이름이 뭐예요? 제 이름은 성하리예요.”

나는 잠깐 고민했다.

이름을 말해줄까?

어차피 여긴 평행 세계를 기반으로 구현된 던전 속 세계다. 내가 여기서 뭘 해도 바깥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성유진.”

“…성이 성이네요? 혹시 우리 가문 출신이에요?”

“아니. 그냥 성씨만 같을 뿐이야.”

“아. 뭐, 그럴 수도 있겠죠. 근데 제가 진령성가의 사람이란 걸 듣고도 안 놀라시네요?”

“근처에 진령성가의 본가가 있으니, 네가 진령성가의 사람이라도 놀랄 건 없지. 넌 정령이 보고 싶은 거겠지? 가까이 와서 봐도 돼.”

“그렇긴 한데… 정령들이 절 싫어해서요.”

“이러면 돼.”

나는 근처에 있는 정령들을 향해 손을 뻗어 잡았다. 쉽게 잡았다. 정령 친화력이 높아서 그런지 도망치지도 않는다. 보통은 영체 상태인 정령을 못 잡지만, 내게는 정령안이 있었다.

“그, 그 애들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면 화낼 텐데.”

“지들이 화내봤자지. 자, 가까이 와서 봐.”

“…….”

정령들은 성하리를 무서워하고 싫어하지만, 정작 성하리는 정령들을 좋아한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성하리는 잠깐 고민하다가 가까이 다가왔다. 내 옆에 앉아서 붙잡힌 정령들을 빤히 바라본다.

“…도망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 치는 게 가여우면서도 귀엽네요.”

“뭘 그리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있어? 진령성가의 일원이면 정령 정도는 매일 보지 않나?”

“전 좀 특수해서요. 정령들이 저만 보면 도망가거든요. 집에 들어가면 정령들이 절 피해 숨어버려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따돌림당하는 것 같아서 좀 슬퍼요.”

“…….”

“오빠가 부러워요. 정령들이 이렇게 허물없이 다가오니까요. 원래 이러면 정령들은 힘을 써서라도 도망치기 마련인데… 힘을 쓰지 않는 건 오빠가 있어서겠죠. 혹시 오빠의 그 눈이랑 관계있어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거 정령안이야.”

“정령안! 들어본 적 있어요. 정령사에겐 최고의 능력 중 하나라고 하던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진짜 우리 식구 아니에요?”

“내가 진령성가 출신이면 이미 너도 날 알고 있었겠지.”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오빠,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요?”

“…진짜 나한테 반했나.”

“그런 거 아니라고요!”

성하리가 주먹으로 내 어깨를 때렸다. 어처구니없는 말에 장난삼아 때린 것 같은데, 어깨가 아프다.

“오빠가 우리 집 근처에 있다는 건, 우리 집에 볼일 있다는 거 아니에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아빠나 할아버지도 오빠를 보면 좋아할 거예요.”

“…아니. 난 진령성가에 볼일 없어.”

“그럼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냥?”

“…갑자기 엄청 수상해지네.”

성하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바라본다. 나는 하급 정령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하급 정령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저 멀리 달아난다. 성하리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도망가는 하급 정령을 지켜봤다.

“인생 선배로서 한 가지 충고해줄게. 낯선 사람을 너무 살갑게 대하지 마.”

“전 애가 아니에요. 처음 보는 사람을 살갑게 대하는 성격도 아니고요.”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자 성하리가 얼굴을 붉혔다.

“그게 뭐랄까. 오빠는 왠지 낯선 사람 같지가 않아요. 뭐라… 잘 설명하기는 힘든데….”

“가족 같다고?”

“아니, 아니. 오빠는 가족이 아니잖아요. …음. 가족이 아닌데 가족 같기도 하고…?”

“나한테 반했군.”

“아니라니까!”

『성하리의 호감도: 27』

짧게 이야기했을 뿐인데 그새 호감도가 올랐다.

‘그래도 성하리를 공략하기엔 시간이 부족하고…. 확 덮쳐 버릴까?’

중요한 건 성하리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나는 중학생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시게요?”

“어. 대화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

“진짜 우리 집에 안 갈 거예요?”

“진령성가에 관심 없어.”

“…안녕히 가세요. 나중에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운이 좋으면 또 만나겠지.”

“운이 좋으면 이라니 뭐예요.”

불만스럽게 말하는 성하리를 뒤로하고 걸음을 내디딘다. 류하나를 찾아갈 생각이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짐작 간다. 원작대로라면 젊은 시절의 부모님을 찾아보고 있겠지.

쿠우웅.

땅이 울린다.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벤치 앞에 서 있는 성하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도 당황한 눈치다.

‘성하리가 아니면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는 건데.’

쿠웅, 우지끈, 쿠웅.

나무가 부서지고 땅이 울린다.

나와 성하리는 동시에 소란스러움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벤치 뒤쪽, 나무가 모여 있는 곳에서 진흙 거인이 몸을 일으키고 있다.

몬스터의 등장에 성하리가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그녀는 등에 비스듬히 걸어둔 창을 꺼내 들었다.

“…중학생이 창이라니.”

“히어로 협회에 허락받았어요.”

지금 시대를 생각해보면 마냥 이상한 일은 아니다. 미래에서는 지금을 격변의 시대. 혹은 혼돈의 시대 등으로 부를 정도니까.

‘귀찮은데 그냥 튈까. 근처에 진령성가도 있잖아.’

이 세계는 가짜다. 여기서 누가 죽더라도 바깥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성하리가 계속 눈에 밟힌다. 젊다 못해 어린 성하리가 죽는 걸 상상해보니 기분이 확 나빠졌다. 나는 저 진흙 거인을 없애기로 했다.

근데 나보다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성하리였다. 허공에 역장을 만들고, 그 역장을 밟아 아직 온전히 몸을 일으키지 못한 진흙 거인에게 돌진한다.

콰아아앙!

폭발음이 들렸다. 성하리가 휘두른 창에서 난 소리였다. 진흙 거인의 오른팔이 날아갔다. 진흙 거인이 왼팔을 성하리에게 내질렀다.

성하리가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진흙 거인의 공격을 피하려 했으나, 조금 어설펐다. 주먹 일부가 그녀의 몸을 때렸다. 성하리가 날아간다.

‘찰나.’

날아가는 성하리의 뒤로 달려가 그녀의 몸을 잡았다. 내가 직접 쿠션 역할을 한 것이다.

“으윽…. 오빠…?”

“너무 무모했어. 어쩌려고 그렇게 돌격한 거야?”

“그게… 진흙 거인은 몇 번 상대해본 적 있거든요. 완전히 일어나기 전에 큰 거 한 방 먹이면 바로 넉다운 되는데…. 저 진흙 거인은 좀 이상해요.”

“그래…?”

“근데 손 안 치워요? 남의 가슴 만지니 좋아요?”

“어쩌다보니 만지게 된 거야.”

나도 모르게 성하리의 가슴을 꽉 주물렀다. 미래의 성하리와 달리 지금의 성하리의 가슴은 내 손보다 작은 정도라 주무르는 느낌이 색달랐다.

성하리는 오른팔을 들어 팔꿈치로 내 복부를 내려찍었다.

“……!”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 나는 성하리에게서 떨어졌다. 하마터면 그대로 토할 뻔했다. 성하리는 새빨개진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변태 새끼. 그렇게 안 봤는데….”

“사고였다고 사고. 내가 너 도와준 거 벌써 잊은….”

나는 말을 잇다 말고 고개를 홱 돌렸다.

『악마 사냥꾼(S)이 악마의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악마에 대한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진흙 거인의 거체가 붉은색으로 변하고, 그 위로 검은색의 복잡한 문양이 떠오른다.

『악마 사냥꾼(S)이 악마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정보가 부족합니다.』

진흙 거인은 악마가 아니다. 악마의 힘을 받아 변질된 몬스터에 불과하다. 진짜 악마는 어딘가에 숨어서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겠지.

‘갑자기 악마가 나타나다니… 우연인가?’

우연히 내가 있던 근처에서 악마가 나타났다. 그런데 정작 악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몬스터를 이용해 나를 공격한다. 우연으로 생각하기 힘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진흙 거인이 우리를 향해 입을 쩌억 벌렸다. 말뚝 형태의 바위 수십 개가 떨어진다. 나와 성하리는 보법을 밟으며 진흙 거인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파지직.

내 손에서 뇌전이 한 차례 번뜩였다가 사라진다. 몸 안에서 빠져나간 마나가 하늘에서 반응을 일으킨다.

콰르르르릉!

진흙 거인의 정수리에 시퍼런 벼락 한 줄기가 내려꽂혔다. 거인의 머리가 살짝 뭉개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필 흙이라 번개가 잘 안 통하는군.’

혀를 차며 다른 방법을 모색한다.

“오빠! 정령! 정령술을 사용해요!”

“나 정령술 못 써.”

“예?! 그, 그럼 정령을 소환해서 싸워요!”

“지금 정령을 소환할 수 없는 상황이야.”

“…….”

성하리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본다.

나는 화련비도를 소환했다.

벼락이 통하지 않으면 직접 가서 썰어 죽이면 된다. 다행히 내 눈에는 진흙 거인의 심장이 어느 부위에 있는지 훤히 보인다.

‘가속.’

[가속을 사용합니다. 10분 동안 유지됩니다. 남은 스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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