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6화 〉 1136. 아카데미의 구원자
“주물과의 주물 리스트를 확인했다. 대결에 사용되었던 주물의 절반 이상이 리스트에 없는 물건이었다.”
권상훈이 눈을 치떴다.
“…김제오가 개인적으로 주물을 구한 것입니까?”
“김제오의 재산과 사용한 주물을 전부 추적했다. 김제오의 재산은 그대로였다. 반면, 주물은 경매, 암시장, 도난 등 다양한 출처가 나오더군.”
강지영이 권상훈을 빤히 쳐다봤다.
“맹세합니다. 전 아닙니다.”
“그 말을 내가 쉽게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제 모든 것을 걸고 말하겠습니다. 전 아닙니다. 거짓말 탐지기든, 사이코메트리 능력자든 뭐든 협조할 테니 믿어주십시오.”
“믿도록 하지. 그럼 질문을 달리해서… 김제오에게 주물을 준 자는 누구라고 생각하나?”
“…….”
침묵이 찾아왔다.
강지영은 3분이 지나도록 기다렸으나, 권상훈의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강지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김제오는 반드시 잡아야 한다.”
“물론입니다. 이미 정부와 히어로 협회에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부학장은 김제오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김제오는 능력에 비해 오만합니다. 자기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리고 의외로 담이 큽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 놈은 아마 그 속담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러니… 김제오는 아카데미에 숨어 있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허나 찾을 수 없었다. 아카데미에는 김제오의 흔적이 없다.”
“김제오는 모든 주물을 가져갔습니다. 그중에서 몸을 숨기는 능력을 가진 주물이 있는 거겠지요.”
강지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부학장. 이번 일은 아카데미의 명예가 걸렸다. 김제오는 반드시 잡아야 한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김제오를 잡는데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김제오가 아카데미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학생들이 위험할 수 있다.”
“학생들을 아카데미 밖으로 내보낼 수 없습니다. 고작 김제오 하나 때문에 아카데미가 멈추는 건 치욕입니다. 마루한 아카데미는 이보다 더 심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겠다?”
“적절히 조치하겠습니다.”
강지영은 다시 의자를 돌렸다. 부학장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 말이 남았나?”
“성유진과 신나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애들은 학생이다.”
“성유진은 특별한 눈을 가졌고, 신나리는 주물에 민감합니다.”
“……고려해보지.”
부학장이 묵례한다. 그는 떠나기 전에 강지영에게 물었다.
“…기하욱 학생의 장례식은 언제 치를 생각이십니까?”
“김제오를 잡은 뒤에 치른다. 그러니 늦어도 이주 내로 김제오를 잡아라.”
“알겠습니다.”
•••
마루한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불안했다.
자유를 추구하던 아카데미에 통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등교 시간, 하교 시간이 엄격해지고 쉬는 시간에는 강의실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일과가 끝난 뒤에는 바로 기숙사에 들어가서 다음 날 아침까지 나올 수 없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은 당연히 불만을 느꼈다. 그러나 불만을 표출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도 봤기 때문이다. 주물과 1학년 기하욱의 비참한 죽음을.
기하욱의 죽음은 이슈가 되었으나 곧 잠잠해졌다. 평범한 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폐교를 고려해도 이상하지 않다. 허나 여긴 아카데미였다. 히어로 지망생이 모인 곳. 대한민국이 안정되지 않았던 몇십 년 전에는 아카데미 학생들이 심상치 않게 죽어 나갔다고 한다.
전공과 수업 시간이 되었다. 학생들이 모여서 전공과 건물로 향한다. 개별 행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화장실을 갈 때도 3명 이상 모여서 가야 했다.
나는 전령과 대표 교사인 칼레스와 함께 정령과로 향한다. 특이한 점은 내 옆에 신나리가 있다는 거다.
“유진아. 이번에 나리가 정령과로 전공과를 옮겼어.”
이번 사건으로 주물과는 해체되었다. 기하욱의 사인이 주물에 의한 저주라 그렇다. 주물과 학생들은 비슷한 전공과인 주술과로 이동했다. 신나리를 빼고.
“선배가 정령과에 온 건… 선배의 의견이 반영된 거겠죠?”
“응.”
“내 도움을 받기 위해서?”
“…응.”
그녀가 내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말한 게 바로 어제다. 신나리도 부끄러움은 아는지 느릿하게 대답했다.
정령과 건물에 도착했다.
“얘들아. 수업 시작하기 전에 할 이야기가 있어.”
칼레스가 말했다. 신나리가 새로이 정령과에 들어와서 분위기를 잡는 건 아니다. 칼레스는 그럴 선생이 아니었다.
“무슨 일인데요?”
“김제오에 관한 일이야. 난 웬만하면 너희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데… 학장님과 부학장님이 너희에게 도움을 청하셨어.”
“저희에게요?”
“……,”
신나리는 조용했다. 그러려니 했다. 원작에서도 신나리는 말수가 적은 캐릭터였다.
“아카데미 학생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을 들어봤니?”
“김제오가 아카데미에 숨어 있다는 소문이요? 쉬는 시간마다 괴담처럼 떠들던데요.”
“그게 아마 교사 중 한 사람이 흘린 말에서 시작된 소문일 거야. 학장님이랑 부학장님도 기제오가 아카데미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하셨거든.”
“…저희에게 원하는 건 혹시….”
“나리는 저주를 눈으로 볼 수 있고, 유진이 너는 이번에 인공 던전에서 숨었던 상대들을 찾아냈잖니.”
“그거 때문에 저희 도움을 원한다는 거군요.”
“거절해도 돼. 어떤 페널티도 없으니까.”
“보수는요?”
공짜로 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쌓인 별점이 사라질 거야. 유진이는 지각, 나리는 수업태도 불량으로 별점이 꽤 쌓였지?”
공짜로 부려 먹겠다는 거다.
거절해도 상관없긴 한데 원작에 없던 행동을 한 김제오가 꽤 신경 쓰인다.
“알았어요. 도와드릴게요.”
“…저도요.”
“둘 다 고마워. 방과 후에 나랑 같이 움직이면 돼. 지금은 수업에 시작하자. 그런데… 난 악령에 관해 잘 모르는데… 어떡하지.”
• • •
수업 중 칼레스는 악령에 관한 자료를 찾겠다며 자료실로 이동했다.
정령과 악령은 이름은 비슷해도 명백히 다른 존재이기에 도움이 되는 자료는 없을 것이다.
강의실에 나와 신나리 둘만 남게 되었다. 어색하다고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칼레스가 강의실을 나가면서 방 안에 있으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으니까.
“신나리 선배.”
“응?”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붕대가, 없어서.”
제마의 붕대.
김제오가 그녀에게 준 붕대는 저주의 힘을 봉인하지만, 그녀를 편하게 해준다. 몸 자체가 주물인 그녀는 저주에 당해 죽을 일은 없으나 안 좋은 영향은 받는다. 오감이 희미하고, 악몽을 꾸고, 느닷없이 두통이 찾아오는 등의 일이다.
“선배. 지금 내가 어떻게 보여요?”
“…피부가 파래. 바다처럼 보여. 눈은 석양 같아.”
또 다른 부작용. 사람을 이상하게 본다는 거다.
『이름: 신나리
근력: D+ 체력: D- 민첩: C+ 내구: D 마나: C
특성: 저주받은 몸(S)
스킬: 빙의(S), 저주(S), 유연성(C)
호감도: 31』
나는 그녀의 호감도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감도 31. 내게 관심 있다는 뜻이다.
“제가 선배를 도와줄 수 있어요. 선배에 달라붙은 악령의 정체도 알려줄 수 있죠.”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알아. 얼마를 원해?”
“돈은 있고요?”
“…….”
신나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 돈 말고도 받아요. 다른 건 있어요?”
“…….”
이번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신나리는 협회가 운영하는 고아원 출신이다. 가진 건 딱 하나. 그 저주받은 몸뚱이뿐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검은색 새끼줄을 꺼냈다.
『저주받은 신목의 새끼줄
랭크: S
저주를 흡수한다.
흡수한 저주 47/100』
“이 아이템이면 제마의 붕대를 대신할 수 있어요. 오히려 제마의 붕대보다 나은 부분도 있죠. 마냥 저주를 봉인하는 것만은 아니니까요. 아마 선배는 일주일 한 번씩 저주를 빼줘야 할 거예요. 저주를 다룰 줄 알죠?”
“…이게 대단한 아이템이란 건 알겠어. 나도 갖고 싶어. 하지만… 난 가진 돈이 없어.”
그녀의 시선은 새끼줄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이거 못해도 800억이 넘는 물건이에요. 저주를 흡수한다는 건 즉 저주 면역이랑 비슷하거든요.”
정식 히어로가 되어 일한다면 800억은 마냥 불가능한 돈이 아니다. 허나 신나리는 정식 히어로가 아니라 학생이었다.
“단점은 저주가 쌓였을 때인데… 그것도 방법이 있어요. 다른 사람에게 넘겨서 쌓인 저주를 없애는 거죠. 뭐, 저주를 다루는 선배에겐 여기에 쌓인 저주를 뽑아내서 전투 때 사용하면 그만이지만요.”
말하자면 이 새끼줄은 그녀 전용 배터리였다.
“800억… 너무 비싸.”
“선배에게 들러붙은 악령의 정체랑, 그 악령을 다루는 법까지 합치면 총 3,000억이 넘어요.”
3,000억은 과장해서 말한 금액이다. 순진한 신나리는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푹 떨궜다.
“외상은… 안 될까?”
“미쳤어요?”
“…….”
“선배 너무 낙심할 필요는 없어요.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죠. 돈이 없으면 몸으로 갚아라.”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도와줘.”
망설임이 없었다.
“익숙해 보이네요.”
“김제오 선생님이….”
“선배, 김제오는 교사가 아니에요. 범죄자죠.”
“…김제오가 붕대를 주면서 말했어. 자기 말만 들으라고.”
“김제오가 선배 몸도 만지고 그랬어요?”
“아니. 내 몸은… 저주받았으니까. 누구도 만지고 싶지 않아 해.”
난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 설정이 맞는지 확인한 것뿐이다. 원작의 김제오는 신나리를 손에 넣었으면서도 두려워했다. 신나리가 어렸을 때는 몰라도 성장한 그녀의 몸은 농도 짙은 저주 그 자체였다.
“선배. 전 김제오처럼 나쁜 놈은 아니에요. 선배가 3,000억을 전부 갚으면 놓아 줄게요. 대신 돈을 갚는 동은 그 몸뚱이는 절 위해 사용해주세요. 뭘, 선배는 재능있으니 A급 히어로가 될 거예요. A급 히어로의 벌이는 어마어마하니 3,000억은 푼돈이에요.”
“응.”
“다시 물을게요, 선배. 내 도움이 필요해요?”
“필요해. 도와줘.”
무덤덤한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담긴 절망을 안다.
[아카데미의 구원자]는 게임 타이틀이다. 그리고 게임 내용 대다수가 구원하는 내용이다.
원작의 신나리는 일종의 서브 퀘스트다. 구해도 되고, 구하지 않아도 된다. 구하면 경험치나 업적, 돈 등 얻는 것들이 있다. 구하지 않더라도 페널티는 없다. 다만, 나중에 신나리에 대해 짧게 언급된다. 신나리의 미래는 두 개.
실종과 자살이다.
아카데미 3학년 때.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나오지 않는다.
자살은 실종과 같이 아카데미 3학년 때 자신의 기숙사에서 목을 매단다. 유서는 없다. 대신, 그녀의 몸을 휘감은 붕대가 검게 물들었다는 묘사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추측하게 해준다. 제마의 붕대에도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럼 선배. 계약한 거예요. 계약서는 없지만요.”
“응.”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녀의 뺨을 잡고 입을 맞췄다. 입술 혀를 집어넣었다. 작은 입안이었다. 그 안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그녀의 혀를 있는 힘껏 유린하다.
정령안을 발동하지 않았기에 신나리에 달라붙은 악령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 지금쯤 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짧지만 격렬한 키스가 끝나고 입을 뗐다. 온몸이 저릿하다. 저주의 영향이리라.
그녀가 멍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선배. 어땠어요?”
“…따뜻했어.”
『신나리의 호감도: 44』
억지로 한 키스에 호감도가 대폭 올랐다. 그만큼 그녀가 특이한 캐릭터라는 증거다.
“선배. 첫 번째 명령이에요.”
“응.”
“보지 보여주세요.”
신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지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