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5화 〉 1135. 아카데미의 구원자
쨍그랑!!
공간이 거울처럼 부서진다. 부서진 공간의 틈에서 나온 건 강지영이다. 그녀의 등 뒤로 당황하는 아카데미 교사와 학생들이 엿보였다.
강지영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빠드득.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
“당장 김제오를 잡아!!”
그녀의 분노가 담긴 일갈은 공간마저 흔들었다.
강지영의 명령은 던전 밖의 교사들에게 향한 것이다. 나를 향한 목소리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깜짝 놀랐다.
부서진 공간의 틈으로 박의 상황을 확인한다. 아카데미 교사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김제오는 이미 몸을 내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당황할 리 없다.
“키힛, 키히히힛!”
저주에 씌어 귀신이 된 1학년이 난입한 강지영을 보며 소름 끼치게 웃는다. 강지영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어쩌면 당연했다. 저주를 감당 못 한 1학년은 죽었으니까.
흔들.
피 웅덩이가 요동치더니 위로 솟구쳤다. 피는 수십 개의 팔이 되었다. 피로 이루어진 저주의 손들이 나와 강지영을 덮쳐온다.
이대로 순순히 당해줄 수는 없다. 마나를 끌어올리고 대처하려 할 때, 강지영이 내게 말했다.
“내가 해결할 테니 가만히 있어라.”
강지영이 진각을 밟는다. 팔의 형태를 취하던 핏물이 부서지고 동굴 벽에 부딪힌다. 핏물을 쏟아내던 해골 주물이 부서졌다.
어느새 1학년의 앞에 다가간 그녀는 일그러진 얼굴로 주먹을 휘둘렀다.
“키히이이이이잇!”
1학년이 비명을 내지른다.
“……미안하다.”
강지영이 작게 사과하며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귀신은 이번에도 버텨냈다. 막대한 저주가 귀신의 원동력이었다. 허나 강지영의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녀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공간이 떨렸다.
파삭! 팟! 파사사삭!
귀신이 몸에 걸치고 있는 주물이 하나씩 부서진다. 저주의 원천이다. 귀신의 힘도 덩달아 약해졌다.
“키헤에에에에에엑!”
귀신이 발악하듯 저주를 내뿜었다. 저주가 강지영의 몸을 관통했으나, 강지영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모든 주물이 박살 나고, 귀신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강지영의 주먹이 마무리를 지었다. 귀신은 사라지고 처참한 시체 한 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잠깐 시체를 바라보던 강지영이 내게 말했다.
“성유진. 대결은 정령과의 승리다. 밖으로 나가서 대기해라. 경거망동하지 말고.”
“…네.”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기 힘들 정도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강지영이 부숴버린 인공 던전 공간을 이용해 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혼란 그 자체였다.
“아직 아카데미를 나가진 못했을 거다! 아카데미 결계부터 확인해라!!”
50대 남자, 부학장 권상훈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그에게 지목당한 교사들은 부리나케 달려 나간다.
비전투계 교사들은 학생들은 인솔하고 있고, 전투계 교사들은 김제오를 찾아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김제오가 저항하면 죽여도 좋다! 놓치지만 마라!”
나는 내게 다가오는 교사를 확인하고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게임 원작의 김제오는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바뀐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 세계에 나라는 이물질이 들어서면서 바뀌는 건 확정이니까.
내가 궁금한 건 바뀐 이유다. 그걸 모르니 무척 찝찝했다.
•••
김제오는 다른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정령과와 주물과의 대결을 지켜봤다.
그는 주물과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래된 창고에서 꺼내 온 귀한 주물과 그에게서 받은 주물들. 그것들이 있으면 성유진은 30분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상황은 김제오의 예측대로 흐르지 않았다.
성유진은 저주를 막아주는 아이템을 가져왔다. 중급과 상급 저주를 쉽게 막아준다. 딱 봐도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성하리! 성하리 그 여자가 자기 아들을 위해 개입한 거다!’
김제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건 공평하지 못하다고 소리치고 싶으나, 다른 교사와 학생들은 자신과 다르게 생각할 것을 알고 있었다.
‘괜찮다. 성물이 아닌 이상에야 저주에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있길 마련이니.’
성유진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래야 했다.
그러나 상황은 김제오의 바람과 다르게 이어졌다.
‘…기하욱이 저주를 시작했군.’
기하욱.
올해 주물과에 들어온 1학년.
1학년이지만, 그 재능은 신나리 다음으로 뛰어났다. 김제오는 기하욱에게 수 십개의 위험한 제물들을 건넸다. 기하욱이라면 1시간은 족히 버틸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은 끝난 뒤였다.
기하욱의 저주는 완벽했다.
미리 준비해둔 성유진의 머리카락을 이용해 저주의 대상을 특정하고, 주물의 힘을 빌려 저주를 기원한다.
그러나 성유진은 그 저주 또한 버텨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아이템을 가져온 거냐…!’
김제오는 초조함을 숨기듯 이를 악물었다.
한 번 시작된 기하욱의 저주는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 없다.
저주는 리스크가 심하다. 한 번 실패하면 저주가 되돌아오는 건 기본이다.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물을 사용한다. 허나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빨리. 빨리 쓰러져라, 성유진!’
치명적인 피해를 막아주는 결계옷이 있으나, 저주의 리스크는 그 성질이 달라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리스크가 너무 많이 쌓이면 기하욱은 죽을 것이다.
김제오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신나리다! 드디어 나서는군!’
신나리의 등장에 김제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거대한 화면 속에 신나리와 성유진의 전투 장면이 송출된다. 공격을 몰아치는 건 신나리지만, 전투의 주도권은 시종일관 성유진이 가지고 있었다.
“…대단하군. 검술은 이미 달인의 경지로군. 근데 저 검술이 뭔지 아나?”
“내가 검무과의 교사라고 모든 검술을 안다고 생각하지 말게. 저 검술은 나도 처음 보는군. 역시 저 녀석은 정령과가 아니라 검무과에 들어왔어야 했다….”
“무슨 헛소리를. 성유진은 성하리의 아들이다. 창무과가 딱이지. 투창 솜씨를 봤나? 날아가 꽂히는 창은 아름다울 지경이더군.”
“정령…. 저게 정령인가.”
수군거리던 교사들은 성유진과 신나리의 전투에 집중하면서 자연스레 입을 다물었다.
굵은 번개가 떨어진다.
아카데미 교사들도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번개가 정확히 신나리에게 꽂혔다. 교사들은 성나리의 패배를 예측했으나, 김제오는 반대로 신나리의 승리를 예측했다.
‘저 위력이면 제마의 붕대를 풀고도 남겠군.’
신나리의 봉인이 풀린다.
2학년인 신나리가 실습을 나가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 힘을 온전히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막대한 저주가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신나리의 육체는 주물 그 자체. 저주는 곧 그녀의 힘이었다.
“……!!”
아카데미 교사와 학생들이 소리 없이 경악한다. 김제오는 그들의 반응에 흐뭇해졌다.
‘신나리의 봉인이 풀린 이상… 이 대결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인공 던전에서 성유진이 사라지면, 기하욱의 저주도 끝날 것이다. 저주는 성유진이 죽었다고 인식할 테니까.
그러나 상황은 김제오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비, 빌어먹을! 신나리의 저주가 한순간 전부 사라졌다고?! 저 아이템은 대체 뭐냐!’
분노와 상관없이 그의 머리는 냉정하게 돌아갔다.
기하욱.
이대로면 기하욱이 죽는다. 성유진이 기하욱을 찾아내 리타이어 시키는 게 기하욱이 살아날 유일한 방법이다. 허나 주물의 힘을 받아 숨어 있는 기하욱을 성유진이 쉽게 찾아낼 수 있을 리 없다. 찾을 수 있었다면 이미 찾아냈겠지.
김제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 있던 교수가 의아한 눈으로 김제오를 쳐다본다.
“김 선생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오지.”
“아, 그렇군요. 제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결의 승자가 정령과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김제오는 그가 자신을 조소하는 것 같아 울컥거렸으나 꾹 눌러 참고 밖으로 나갔다. 최대한 여유롭게 걸어 나가던 그는 시선이 사라지자마자 복도를 내달렸다. 당연히 화장실 방향이 아니다.
‘기하욱은 죽는다! 그리고 내 인생은 끝장이다!’
학장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럼 기하욱을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강지영 학장과 권상훈 부학장이 자신을 살려둘까? 분명 책임을 추궁할 것이고, 한 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범죄자로 만들어 히어로 협회에 넘길 것이다.
자랑스러운 아카데미 교사라는 직함은 가중처벌을 부를 것이다.
‘남은 평생을 감옥에서 썩는 건 사양이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아카데미를 빠져나가야 한다!’
달려나가는 김제오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힌다. 그의 머릿속에 한 인물이 떠오른다.
‘주물은 준 그놈! 그놈에게 내 죄를 뒤집어씌워서….’
그의 다리가 뚝 멈췄다.
‘…그놈이 누구지? 이름이 뭐지? 아니, 남자였나? 말투가 유치했던 것 같은데…. 학생? 교사?’
기억이 나지 않는다.
키, 성별, 말투, 목소리, 눈빛.
특징할 수 있는 모든 게 기억나지 않는다.
무언가 잘못됐다.
“빌, 어… 먹을…!”
김제오는 이를 악물며 주물과로 내달렸다. 주물과에 도착한 그는 다급히 주물을 뒤적였다. 밀짚 인형이 나왔다. 김제오는 작은 칼로 손목을 그어 밀짚 인형 위에 피를 뿌렸다. 피를 빨아들인 밀짚 인형은 김제오의 분신이 되었다.
“넌 아카데미 밖으로 도망쳐라! 지금 당장!”
밀짚 인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물과 건물 밖으로 달려 나간다.
‘저놈이 아카데미에 혼선을 줄 거다.’
김제오는 가방 하나를 꺼내 주물들을 쑤셔 넣었다.
‘이 주물들이 있으면… 유럽이나 미국의 범죄 조직에 들어가 괜찮은 지위를 얻을 수 있다.’
주물을 모두 챙긴 그는 바로 주물과를 나왔다. 식은땀에 젖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등잔밑이 어두운 법…. 상황이 잠잠해질 때까지 아카데미에 숨다가 기회를 봐서 도망친다.’
아카데미는 넓다.
그리고 김제오에겐 주물이 있다.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억지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주위에 거울이 없어 다행이었다. 김제오가 자신의 얼굴을 봤다면 마음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추악한 얼굴이었다.
•••
강지영은 자신의 앞에 앉은 권상훈 부학장을 노려봤다.
“부학장. 그대가 김제오를 이번 대결을 부추겼다는 걸 알고 있다.”
“죄송합니다, 학장님. 면목 없습니다. 김제오. 그놈이 그런 놈일 줄 전혀 몰랐습니다.”
권상훈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보다 어린 강지영에게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이는 점이 그의 대단한 점이었다.
“…어제 아카데미에서 도망친 김제오를 잡았다. 그 김제오는 분신이었다. 지금 김제오의 행방은 묘연하다.”
“저와 김제오는 그리 친한 관계는 아닙니다. 김제오가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될 수만 있다면… 김제오를 제 손으로 찢어 죽여버리고 싶습니다.”
이번 일로 권상훈의 입지가 흔들렸다. 김제오의 뒤에 있던 건 권상훈이었기 때문이다.
“주물과의 주물 리스트를 확인했다. 대결에 사용되었던 주물의 절반 이상이 리스트에 없는 물건이었다.”
권상훈이 눈을 치떴다.
“…김제오가 개인적으로 주물을 구한 것입니까?”
“김제오의 재산과 사용한 주물을 전부 추적했다. 김제오의 재산은 그대로였다. 반면, 주물은 경매, 암시장, 도난 등 다양한 출처가 나오더군.”
강지영이 권상훈을 빤히 쳐다봤다.
“맹세합니다. 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