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9화 〉 1129. 아카데미의 구원자
성하리가 운전하는 자동차는 평안도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이름은 진구 마을. 인구수 70명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우리 목적은 마을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곳이었다.
거긴 울타리로 통제된 곳이었다. 한국 히어로 협회와 경찰 로고가 그려진 울타리다. 뿐만이 아니라 무장을 한 E급 히어로들이 울타리 안으로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경계를 서고 있다.
우리는 마을의 집 한 채를 빌렸다. 원래 노부부가 살던 집인데 돈을 주고 이틀 동안 빌렸다. 집에 집을 내려놓은 우리는 성하리의 주도하에 마당에 모였다.
“얘들아. 우리가 들어갈 곳은 B급 오염 구역이야. 너희들 모두 마나를 사용할 수 있으니 오염의 영향은 받지 않겠지만… 절대로 방심해선 안 돼.”
성하리가 거듭 말했다.
오염구역.
말 그대로 오염된 곳을 말한다. 던전 파괴, 저주, 전투 폐해, 악마 등의 여러 이유로 오염된 곳을 말한다. 마나가 변질되어 일반인이나 동물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여기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곳곳에 오염구역이 존재한다.
C급 이하는 시간만 들이면 오염을 정화할 수 있다. 반면 B급 이상부터는 오염 매개체를 찾아 없애야 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내버려 두면 오염구역이 점점 넓어진다는 것. 그래서 협회는 B급 이상의 오염구역은 재빨리 처리하려고 한다.
‘근데 여기 진구 마을은 좀 다르지.’
진구 마을의 오염구역은 몇 년이 지나도 크기가 그대로다. 오염이 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오염 규모는 B급이라서 협회는 처리하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했지.’
오염구역 공략은 던전과는 달라서 애를 먹고 있다. 여기 오염구역은 B급이면서도 오염이 퍼지지 않기에 협회에선 반쯤 방치하고 있다. 여기보다 급한 오염구역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마당의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아카데미 학생이라 함은 히어로 지망생 중에서도 엘리트들이다. 여기서 오염구역을 모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으음. 다들 얼굴이 심각하네. 너무 긴장해도 곤란해. 여기 B급 던전은 매개체가 숨겨져 있어서 정화하지 못했을 뿐이야. 위험도로 따지면 C급에서 D급 던전? 그 정도니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
성하리가 옅게 웃으며 무거운 분위기를 풀었다.
“내가 있잖니. 너무 걱정하지 마. 아니면 좀 더 쉬고 난 뒤에 시작할까?”
류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미 전투를 앞선 무사처럼 날카로운 기세를 흘렸다.
“아니요. 지금 당장 오염구역에 들어가고 싶어요.”
최다연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한걸음 나섰다. 그녀의 손에는 고풍스러운 활이 들려있었다.
“던전 공략에는 몇 번 참가해본 적 있는데, 오염구역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좋은 경험이 되겠네요.”
김천우는 대검을 붕붕 휘둘렀다. 개인 장비를 가져온 류하나와 최다연과 달리 그는 아카데미 무기를 들고 왔다. 그는 과할정도로 어깨에 힘을 빡 주면서 눈을 빛냈다.
“성하리 님… 아, 아니, 아줌마. 제가 쌓아온 힘을 보여드릴게요.”
김천우는 의욕으로 넘쳤다.
마진배는 굳은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투를 앞두고 흥분한 기색이다. 이강후는 만일을 대비해 최다연을 지킬 궁리만 하고 있다. 이시은은 내 근처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나는 담담하게 장비를 챙겼다. 화련비도와 창 형태의 스톰브레이커.
“역시 미래의 히어로들이야. 좋아, 가자.”
우리는 성하리의 뒤를 따라 오염구역으로 향했다.
성하리는 오염구역을 지키는 히어로들에게 다가갔다. 이미 우리의 도착과 성하리의 신분을 상부에서 들어 알고 있던 히어로들은 군기가 잔뜩 잡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상부에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성하리 님. 진구 마을 B급 오염구역에 들어가셔도 됩니다. 저희의 지원이 필요하다면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됐어. 너희는 너희의 일을 해.”
성하리가 나서는 프리패스였다.
내가 성하리에게 이번 일을 부탁한 이유였다. 아카데미 학생이라곤 하나 우리는 1학년. 협회나 아카데미 교사진이 제정신이 박혔으면 파견을 허락할리 없다.
‘하지만 성하리가 담당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B급 오염구역에 SS급 히어로인 성하리가 들어간다. 성하리 혼자서 공략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장소다. 그녀 앞에서 오염구역이라는 특이점은 아무 일도 아니다.
“커으읍?!”
당당하게 걸어가던 김천우의 무릎이 살짝 꺾였다. 오염된 마나가 육체를 압박한 것이다. 다른 이들도 김천우 정도는 아니지만, 눈살을 찌푸리며 반응했다. 멀쩡한 건 성하리와 나, 이시은 정도다. 나는 다른 세계에서 겪은 경험 덕분에 오염된 마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이시은은 에너지 관련 특성과 스킬을 가졌다.
“오염된 마나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마나를 활성화 해. 그럼 괜찮아질 거야. 그리고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어. 마나가 오염되었다고 해서 완전히 변질되는 건 아니니까.”
정령은 영향을 받을 수 있으나, 상급 정령이 된 모카는 이 정도 오염에는 아무렇지 않다.
오염구역은 기괴했다.
땅은 푸르죽죽했고, 그 위에 자라는 식물은 녹아내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던전에 들어온 것도 아닌데 던전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든다.
바스락, 바스락.
수풀 사이로 토끼 한 마리가 깡총 튀어나왔다. 인형 같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새하얀 토끼였다. 허나 누구도 토끼의 귀여움에 빠지지 않았다.
채앵.
류하나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양손에 각각 검을 꼬나쥐고 귀여운 토끼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자비 없는 여자였다.
토끼가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류하나에게 총총 다가갔다.
“엄마. 저거 괜찮아?”
지켜만 보고 있는 성하리에게 물었다.
“괜찮아. 하나가 방심하고 있는 건 아니잖니. 근데 손에 힘이 좀 많이 들어갔네.”
토끼가 완전히 다가오기 전에 류하나가 먼저 움직였다. 두 개의 검이 X자로 교차하며 휘둘러진다. 그 잔상은 허공에 남을 정도로 강렬했다.
“샤아아아아아악!”
돌연 토끼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더니 몸이 부풀어 올랐다. 땅을 박차고 류하나를 향해 돌진한다. 류하나의 검은 토끼의 가죽을 갈랐으나 깊지 않았다. 토끼의 형체가 흐느적거렸다. 4개의 다리가 사라지고, 길쭉한 두 개의 귀가 칼날처럼 단단해졌다. 토끼의 귀여운 얼굴은 악마처럼 일그러진다.
류하나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며 두 개의 검을 휘둘렀다.
전투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류하나. 도와줄까?”
김천우가 물었다.
“됐어. 이건 내 싸움이야.”
류하나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끼어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경고한 것이다. 김천우는 그 서슬 퍼런 기세에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지켜보던 성하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창을 가볍게 던졌다.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창은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가 토끼의 몸을 꿰뚫고 땅에 떨어졌다. 폭음과 함께 땅바닥에 자그마한 크레이터가 생겼다.
“…….”
류하나의 입이 벌어졌다. 놀란 그녀가 뒤돌아서 성하리를 바라본다.
“하나야. 네 심정은 이해해. 싸우고 싶지? 힘을 증명하고 싶지? 나도 옛날에 그랬으니 잘 알아. 하지만 지금은 네 힘이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린 네 실력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염구역을 공략하러 온 거야. 지금 가장 중요한 목표가 뭔지 잊으면 안 돼.”
“…네. 아줌마 말이 맞아요. 지금은… 공략 중이었죠. 공략에 집중할게요.”
“알아들었으면 됐어.”
성하리가 정면에 손을 뻗는다. 파지직, 그녀의 손에 전류가 번뜩인다. 땅에 박혔던 창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성하리의 손으로 날아왔다. 자력을 이용해 창을 회수한 것이다.
일행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토끼가 나타났다. 류하나가 나섰다. 김천우와 마진배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성하리 아줌마 말대로 이건 공략이야. 효율적으로 몬스터를 죽여야 해.”
“설마 또 불평을 쏟아내는 건 아니겠지?”
“……내 발목만 잡지 마.”
셋이 동시에 움직이자 토끼 괴물을 처리하는데 10초 도 걸리지 않았다.
김천우는 토끼 시체의 몸을 갈랐다. 몬스터라면 응당 가지고 있을 마석을 찾기 위함이다.
“오염구역의 몬스터는 마석이 없어. 오염된 마나가 원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게 오염된 몬스터니까.”
류하나의 말에 머쓱해진 김천우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울렁울렁울렁.
공간이 울렁거린다. 땅이고, 하늘이고, 나무고 요동치는 파도처럼 흔들린다. 멀미가 나는 것을 넘어 감각이 이상해진다. 그걸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닌 듯 아카데미 학생들이 모두 비틀거리고 있었다.
내 옆에서 쓰러지려는 이시은의 몸을 팔로 뻗어 붙잡았다. 유일하게 멀쩡한 건 성하리 뿐이었다.
공간의 흔들림이 곧 사라졌다.
우리는 숲이 아니라 축축한 동굴에 와있었다. 공간이 한순간에 변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모두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이 오염구역은 꽤 특이한 곳이야.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공간이 획획 바뀌어 버리지. 협회가 이 오염구역을 정화하지 못한 이유야.”
성하리가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환하게 빛나며 동굴 천장을 지운다. 성하리가 가진 스킬 중 하나인 정화(D+)다. 일시적으로 오염된 공간을 정화한 것이다.
허나 그녀의 손에서 빛이 사라지자 정화된 공간이 울렁이더니 다시 동굴 천장이 생겼다.
“우리 목적은 숨겨져 있는 매개체를 찾는 거야. 그걸 잊지 마. 이번에는 하나랑 천우가 뒤로 빠지고… 진배랑 강후가 진위를 맡으렴. 다연이는 긴장을 늦추지 말고. 자, 전진하자.”
토끼가 나타났다. 마진배와 이강후는 동시에 토끼에게 달려들어 묵사발로 만들었다.
“…제법이군.”
“너야말로.”
두 남정네가 눈빛을 교환했다. 같잖았다. 나는 정면에 보면서 어쩌다 보니 품에 안게 된 이시은의 몸을 여기저기 쓰다듬었다. 이시은은 저항하지 않았다. 얼굴을 붉히며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좋은 몸매다. 관리하는 티가 느껴진다.
“…….”
이시은의 가슴을 만지고 있을 때 옆에 걷던 최다연이 이쪽을 바라봤다. 최다연의 눈동자가 커진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이시은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읏….”
이시은이 자그마한 신음을 흘린다. F컵의 풍만한 가슴은 내 손에 착 달라붙는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음란하게 짓눌린다. 옷 위로 만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로 감촉이 좋았다.
이시은의 얼굴이 더욱 붉어진다. 그녀도 최다연의 시선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더욱 흥분하고 있었다.
최다연은 잔뜩 얼굴을 붉히고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나는 이시은의 가슴에서 손을 뗐다. 계속 만지고 있기에는 보는 눈들이 많았다.
“하으….”
이시은이 나를 바라본다.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시은이 침울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행은 계속해서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