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7화 〉 1127. 아카데미의 구원자
김제오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다음날 바로 정령과와 주물과의 대결이 결정되었다. 꽤 의외였다. 강지영 학장은 둘째치더라도 부학장의 승인을 받아내는 건 시간이 좀 걸릴 거라 생각했으니까.
‘부학장이 김제오에게 거는 기대가 상당한가 보군. 그게 아니면 강지영에게 엿먹이고 싶어서 안달 났거나.’
대결 방식은 던전 공략이다. 정령과와 주물과가 동시에 인공 던전에 들어가 먼저 던전을 공략하는 쪽이 이긴다.
단, 교사는 참가 불가다. 다시 말해 나는 혼자서 주물과 7명을 상대해야 한다.
‘김제오랑 부학장은 칼레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예상 밖의 사태이긴 했으나, 따질 생각은 없었다. 먼저 내기를 제안한 건 나고, 그들에게 대결 방식을 선택한 것도 나다.
‘칼레스가 없어도 나 혼자 상대할 수 있어. 주물과 학생 7명 중에 신나리를 제외하면 별 볼 일 없는 놈들이니까. 다만….’
주물과의 특성은 주물의 저주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신나리를 제외한 6명이 대량의 주물을 가져와 내게 저주를 걸어 될 수 있다. 상황이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절대 정신을 가진 내겐 정신 계열 저주가 통하지 않아.’
다르게 말하면 정신 계열이 아닌 저주는 통한다는 말이 된다. 몸이 느려지는 둔화 계열,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쇠약 계열 등등.
‘상태 이상을 해제하는 스킬인 완전 회복과 천심이 있긴 하나… 주물과가 몇 개의 주물을 가져올지는 모르는 일이야.’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아카데미의 구원자] 원작 게임을 떠올린다. 원작 게임에는 수많은 숨겨진 이야기와 수많은 아이템이 존재했다.
‘지금 시점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은 쳐내고… 그게 있군.’
방법을 떠올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물과와의 대결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충분하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나 같으면 준비 시간 없이 바로 다음 날에 대결을 진행했을 텐데. 일주일이란 시간을 주는 건 꿍꿍이가 있다는 거겠지.’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누가 이기는지는 다음 주에 결착 날 것이다.
•••
토요일 새벽 4시.
해도 뜨지 않은 시각에 아카데미 근처 사거리 도로에 서서 느긋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기척이 느껴졌다. 아카데미 입구에서 일련의 무리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아카데미 학생들이었는데 한 일행 같으면서도 서로 거리를 벌리고 있다.
나는 그들의 면모를 한 명, 한 명 살펴봤다.
나를 보자마자 웃음을 짓는 여학생은 파란색 긴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이시은이었다. 동시에 내 소꿉친구다.
그 옆에는 깔끔하게 생긴 김천우와 김천우의 절친인 마진배가 있다. 김천우는 담담한 얼굴이었고, 마진배는 내게 적대적이었다.
‘마진배가 올 줄 몰랐는데… 김천우가 걱정 돼서 따라온 건가?’
마음에 안 드는 놈이긴 하나, 이용할 가치가 있는 놈이다. 그리고 마진배는 내게 이빨을 드러내지 못한다. 내 시선은 뒤쪽으로 향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류하나가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연보라색 머리카락은 신비롭고, 다크 블루 색의 눈동자는 깊은 바다처럼 차갑다. 허리에 두 개의 검을 장비한 그녀의 걸음걸이에서 우아함이 느껴졌다.
류하나의 뒤에는 최다연과 이강후가 있었다.
팔짱을 끼고 걷는 최다연은 언제나처럼 도도했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풍만한 가슴이 조금씩 출렁인다. 최다연에게서 3m 떨어진 이강후는 손과 등에 짐을 들고 있었다.
“유진아. 왔어. 늦지 않았지?”
이시은이 다가와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어. 그리고 다 같이 올 줄 몰랐는데.”
“아카데미를 나오면서 우연히 마주쳤어. 설마 했는데 전부 같이 행동하게 될 줄이야. 잘 부탁해.”
“…….”
김천우가 주위 학생들에게 말했으나, 반응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김천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류하나와 최다연은 들은 체도 안 하고, 이강후는 경계 어린 눈으로 김천우를 노려봤다. 이시은은 나만 보고 있다.
“죄도 이상한 놈들만 모였군.”
마진배가 혀를 차며 말했다.
“유진아. 배고파? 김밥 만들어 왔어. 한 번 먹어봐.”
“도시락? 벌써부터 도시락을 까먹자고?”
“괜찮아. 도시락은 3개 더 있으니까. 유진이 주려고 준비했어.”
“출출하기도 하고 먹어 볼까.”
이시은이 환하게 웃으며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가지런히 놓인 김밥의 고소한 향기가 났다. 이시은은 젓가락으로 김밥을 집고 내게 내밀었다.
“유진아, 아~”
“아~”
김밥이 안으로 쏙 들어온다. 싱싱한 재료와 적절한 간. 김밥에 우엉이 안 들어가 있다는 게 특히 마음에 들었다. 맛은 뛰어났다. 김밥 맛집으로 유명한 곳보다 훨씬 낫다.
이시은이 주는 김밥을 넙죽넙죽 받아먹고 있자니, 어느 한 곳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최다연이었다.
‘뭐지. 김밥이 먹고 싶은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을 테고….’
『최다연의 호감도: 44』
지난 시간 동안 최다연과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호감도가 약간 오른 상태였다.
‘저번에 봤을 때는 42였는데… 대체 왜 호감도가 오른 거지?’
내 눈은 류하나에게도 향했다. 가만히 서 있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류하나의 호감도: 21』
‘가끔씩 대련을 해준 덕분에 이 정도까지 호감도를 쌓았어. 이 이상 쌓으려면… 대련만으로는 힘들겠어.’
『이시은의 호감도: 93』
『이시은의 심리: 유진이가 잘 먹어서 다행이다.』
이시은의 호감도는 굉장히 높았다. 내가 보지를 벌리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벌릴 수준이다. 덤으로 나를 위해 자기 목숨도 희생할 수 있는 수준이다. 물론 그녀에게 희생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이참에 다른 놈들의 호감도도 확인해볼까.’
『김천우의 신뢰도: 43』
『마진배의 신뢰도: 6』
『이강후의 신뢰도: 12』
호감도가 아닌 신뢰도. 이놈들은 나와 같은 성별이기 때문이다.
김천우의 신뢰도는 신경 쓴 보람이 있었고, 마진배는 여전히 날 적대하는 중이다. 이강후는 평범했다.
“시은아. 그 김밥 맛있어 보이네. 나도 한 입만 먹어 보면 안 될까?”
김천우가 절반 가까이 줄어든 김밥을 보며 말했다. 이시은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안 돼. 이건 유진이만을 위해 만든 도시락이야.”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에 김천우가 살짝 당황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그래.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어색한 바람이 주변을 떠돌았다. 이시은은 그러거나 말거나 내 입에 김밥을 넣는 데 집중했다.
도시락이 다 비워갈 때 쯤 저 멀리서 자동차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왔네.”
마지막 김밥을 입안에 욱여넣고 검은색 승합차가 다가오는 걸 바라봤다. 점점 속도를 줄이던 승합차는 내 앞에서 멈췄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청바지에 감싸인 길쭉한 다리가 도로를 내디뎠다. 이어 하얀 티셔츠 위로 머리카락이 출렁인다. 운전석에서 내린 여성은 성하리였다.
“안녕, 아들! 그리고 아들 친구들!”
성하리가 쾌활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이시은은 공손하게 상체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시은이는 여전하네. 아니. 조금 더 예뻐졌나?”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도시락도 준비했어요.”
“정말?! 고마워. 휴게소에 들릴 때 먹자.”
그녀의 등장에 분위기가 묘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가장 먼저 인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김천우가 성하리를 바라보며 멍을 때리고 있었다. 성하리를 보는 순간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설마 이 새끼…?!’
『김천우의 신뢰도: 52』
김천우의 신뢰도가 단숨에 50을 넘겼다.
그 이유는 명백했다. 김천우는 성하리를 보고 첫눈에 반했고, 그 아들인 내게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마 지금 머릿속으로는 내게서 아빠 소리를 듣고 있지 않을까.
‘시발.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군. 죽여버릴까?’
치솟는 살의를 참았다.
성하리에게 첫눈에 반하는 건 당연하다. 성하리는 누가 봐도 매력적인 여자니까. 그리고 그 여자는 내 여자다. 관점을 바꾸면 우월감을 느낄 수 있다.
‘단, 그 이상으로 선을 넘는 행동을 하는 건 용서할 수 없지.’
김천우는 쓸모 있는 놈이었다. 일단은 김천우를 지켜보기로 했다.
다른 이들은 성하리를 보며 긴장했다.
성하리.
한때 최강이라 불렸던 히어로. 설령 성하리와 같은 시대를 살지 못했더라도 그녀의 종적을 알고 있는 이들은 많다. 그녀는 대한민국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존재니까.
‘마진배놈이 급발진할 수 있는데… 머리가 있다면 가만히 있겠지.’
류하나는 성하리를 보며 눈을 빛내면서 차분하게 인사했다. 류하나가 내 뜻에 따라준 이유는 성하리 때문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하리 님. 류하나입니다.”
“안녕. 네가 1학년 수석이구나. 직접 보니 왜 수석인지 알겠어. 많이 노력하고 있네.”
“성하리 님에게 한 수 배울 수 있을까요?”
“투지가 느껴지네. 옛날 생각나서 좋은걸. 아들 친구를 박하게 대할 생각은 없으니 나중에 시간 날 때 상대해줄게.”
성하리의 시선이 최다연과 이강후에게 향했다. 이강후는 바로 시선을 아래로 떨궜고, 최다연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뇌성(雷聲)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금화 그룹의 최다연입니다.”
“네가 정화의 딸이구나. 정화가 자기 딸을 자랑할만한걸.”
성하리는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더니 손바닥으로 승합차 윗부분을 탁탁 내려쳤다.
“자, 갈 길이 머니 모두 차에 타도록 해! 그리고 성하리 님이라니. 너무 딱딱한 호칭이잖아. 아들 친구들한테까지 대접받을 생각은 없으니 간단히 아줌마라고 불러.”
그렇게 하여 모두 승합차에 탑승했다. 조수석에는 내가 앉았고, 바로 뒷좌석에는 이시은과 김천우, 마진배. 더 뒤쪽에는 류하나와 최다연, 이강후가 앉았다.
류하나와 최다연은 조용했다. 둘은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 접점이 거의 없었을 테니 당연했다. 다만, 최다연은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수석인 류하나를 의식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시끄럽게 떠드는 건 김천우였다.
“성하리 님. 아카데미에서 성하리 님의 행적에 대해서 배웠는데… 20년 전에 있었던 강릉 붕괴 사건 기억하세요?”
“강릉 붕괴? 아, 공룡 나온 사건? 그때 좀 힘들긴 했지. 그리고 아줌마라고 부르라니까?”
“아줌마라니… 너무 젊어 보이셔서 어울리지 않네요.”
“후후. 아부도 할 줄 알아? 고마워, 천우야.”
“아, 아뇨.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에요.”
김천우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불쾌감이 치솟는 것과는 별개로 성하리가 젊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고, 피부는 탱탱하다. 몸매는 완벽한 수준이다. 아무리 봐도 겉모습은 20대 초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들. 들었어. 이번에 주물과랑 한 판 한다며?”
“정령과의 해체를 걸고 대결하기로 했어.”
“엄마한테 말하면 엄마가 도와줬을 텐데.”
“이 정도로 뭐. 주물과는 별거 없잖아.”
“으음. 난 아카데미를 중퇴해서 잘 모르겠지만, 주물과에 대해 들어본 적 없는 걸 보면 별거 없는 게 맞을 거야.”
“어머니. 유진이라면 주물과랑 싸워도 이길 거예요.”
이시은이 차분하게 말했다. 성하리가 고개를 주억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저주는 좀 거슬리네.”
“엄마. 걱정하지 마. 이번에 가는 것도 저주 대책을 위해서니까. 아니면 날 믿지 못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엄마는 우리 아들 믿어.”
“어머니! 저도 유진이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