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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126화 (1,126/1,497)

〈 1126화 〉 1126. 아카데미의 구원자

주물과(呪物).

감히 내 섹스과를 해체하려고 한 놈들이다. 다른 소형 전공과들이 있긴 하나, 총대를 멘 건 주물과다. 분기탱천한 내 발걸음은 주물과 건물로 향했다.

주물과는 아카데미 별채 지하 1층에 있었다. 그 이름 그대로 음습한 곳에 있었다. 지상 1층에는 마음(魔音)인가 뭔가 하는 영문 모를 전공과가 있다.

“유진아. 진정하렴. 주물과에서 전투를 일으키려는 건 아니지? 그것만은 절대 허락할 수 없어.”

내 뒤를 따라오던 칼레스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선생님. 전 냉정해요. 퇴학당할 만한 일은 안 할 거니 안심하세요.”

칼레스는 차분히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막 나가지는 마렴. 주물과는 규모는 작지만, 역사는 검무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처음 주물과를 창설할 때 대표 자리를 맡은 선생님이 아주 유명한 분이셔.”

“그렇군요. 근데 제가 역사 과목은 영 안 좋아해서.”

계단을 내려간다. 절반쯤 왔을까. 갑자기 온도가 확 내려가며 서늘해졌다.

‘결계군. 밖의 사람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안의 것들로부터 밖의 사람을 지키기 위한 결계.’

계단 끝에 강철 문이 나왔다. 노크 따윈 하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물과는 발로 차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

들어가자마자 8명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7명은 학생이고, 1명은 교사다.

나는 주위를 조용히 둘러봤다. 형광등이 켜져 있는데도 밝은 느낌은 나지 않았다. 벽에는 기괴한 물건들이 걸려 있고, 책장 위에는 사람 혹은 몬스터의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올려져 있다.

“생각보다 더 음침하잖아. 역시 주물과야.”

“…갑자기 쳐들어와서 망발을 내뱉는군. 정령과가 여긴 무슨 일이지?”

소파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짜증 난다는 듯이 말했다.

미역처럼 흐르는 검은색 장발은 허리까지 내려오고, 상의는 말랐지만 단단해 보였다. 얼굴은 잘생긴 편이지만, 눈 아래에 짙은 다크 서클이 있어서 인상이 썩 좋지 않았다.

주물과 대표 교사인 김제오다.

나는 당당하게 걸어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김제오는 날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시선을 칼레스에게 돌렸다. 날 선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칼레스 선생님. 경우도 없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회의 때의 제 발언이 우스워서 이렇게 찾아오신 겁니까? 거기다 학생을 앞에 내세운다라…. 전 선생님이 지극히 상식적인 분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제가 선생님을 잘못 본 모양이군요.”

“유진이가 선생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해서요. 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유진이를 따라왔을 뿐이에요.”

“…만일의 사태? 제가 이 학생을 때리기라도 할 것 같습니까?”

그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높아진다. 칼레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샐쭉하게 뜨고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녀는 상대방이 매섭게 나온다고 해서 겁먹는 여인이 아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에요. 여긴 주물과. 저주받은 물건들이 가득하잖아요. 정령과의 유일한 학생인 유진이가 주물에 저주받을 수 있다는 거죠.”

“제가 여기에 있는데도 믿지 못한다는 말이시군요.”

“작년에 주물과에서 사고가 한 번 일어났다고 들었어요.”

“…….”

김제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칼레스를 한 차례 노려보다가 다시 내게 시선을 옮겼다.

“주물과에 온 용건을 말해라.”

“여긴 커피 한 잔도 안 내줍니까?”

“주물과에선 취식 금지다. 물도 허락하지 않는다.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나가서 먹어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주물 때문이다.

주물은 저주 받은 물건을 말한다. 저주에 사용하는 도구인 주구와는 다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저주받은 물건을 사용하는 능력자들이 있다. 주물과는 그런 자들이 모인 곳이다. 여긴 주물이 모여있는 곳이니 음식 섭취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게 당연하다.

“선생님은 저희 정령과가 해체되기를 바라신다면서요.”

“정령과 학생은 너밖에 없다. 네게 특혜를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이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파란색 소매. 1학년 남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야, 너도 인정 안 하냐?”

“어, 어…? 나, 나는….”

남학생이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미아에 식은땀이 맺힌다.

아카데미에선 순위가 곧 계급이고 권력이었다. 나는 입학 순위 5위. 어지간한 놈들은 내 앞에서 개기지도 못한다.

“내가 묻잖아.”

“그, 그게….”

남학생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가 필사적으로 김제오에게 신호를 보낸다.

김제오가 미간을 좁혔다.

“위협은 그만둬라.”

“위협이라뇨? 그냥 한 번 물어본 것뿐입니다.”

“…네가 원하는 건 정령과의 존속이겠지.”

“네. 정령과의 한 명이 저라 특혜를 받는 게 아니라, 아카데미는 소수의 한 명까지 챙겨주는 것뿐입니다. 어차피 제가 졸업하면 정령과도 사라지겠죠. 지금 강제로 없앨 필요가 있습니까?”

“네가 나를 설득한다고 해서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정령과가 해체되길 원하는 교사는 20명이 넘는다. 그들 모두를 네가 설득할 수 있다고 보나?”

“글쎄요. 제가 볼 땐 선생님만 설득하면 될 것 같은데요.”

“난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시간 버리지 말고 다른 전공과를 알아볼 것을 추천하지.”

“정령과가 예산을 포기하면, 해체는 없던 일로 해주시겠습니까?”

“예산 없는 전공과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내가 볼 때 정령과는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과다. 그 건물까지 땅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지. 정령과는 없어져야 마땅하다.”

“사실 예산 포기는 그냥 해본 말입니다. 저와 칼레스 선생님은 정령과의 예산을 포기할 생각 없습니다. 당연히 정령과 해체는 언어도단이고요.”

“…….”

타협은 없다. 김제오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정령과의 해체를 걸고 내기를 하죠. 그쪽이 이기면 깔끔하게 정령과 해체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웃기는군. 다음 회의에서 정령과 해체는 결정 날 거다. 여론이 그러하니 학장님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내기에서 저희가 이기면 정령과 존속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내기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정말 없습니까?”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1학년 3명. 2학년 1명. 3학년 3명. 총 7명의 학생들. 그중 1학년들은 내 눈을 마주치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우리 엄마가 누군지 아십니까?”

“……모르는 쪽이 더 이상하겠지. 왜, 어머니에게 다가가서 질질 짜며 정령과를 존속시켜달라고 부탁이라도 할 거냐?”

“예. 그럴 겁니다. 주물과를 없애 달라고 부탁할 겁니다.”

“하, 소용없는 짓이다. 아카데미가 외부의 압력을 받을 것 같으냐?”

“우리 엄마 학부모회장이에요. 외부인 아니라고요. 그리고… 우리 엄마의 힘이면… 선생님 정도는.”

나는 일부러 말을 끊고 입가를 비틀었다. 김제오는 뒷말을 짐작했음에도 반발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다. 그 눈빛에 스친 것은 두려움이다.

“선생님은 제가 얼마나 질척거릴 수 있는지 궁금하세요? 미리 말해드리죠. 전 지옥까지 질척거릴 자신 있습니다.”

“……”

김제오의 턱이 움찔거렸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다.

“내기로 정말 깔끔하게 끝낼 수 있나?”

“학장님과 부학장님에게 공증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기 내용은?”

“정령과랑 주물과의 대결. 간단하지 않습니까? 대결 내용은 그쪽에도 정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추천하는 건 정면 대결입니다. 빨리 끝나고 좋지 않습니까?”

“정령과는 너와 칼레스 선생을 합쳐서 2명이다. 정말로 우리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주물과가 떼로 덤벼도 절 못 이겨요. 왜냐, 그게 팩트니까요.”

빠드득.

김제오의 이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좋다. 내기는 학장님과 부학장님에게 보고하고 승인받도록 하지. 정령과의 무능함을 아카데미에 알릴 좋은 기회가 되겠군….”

“그럼 그렇게 알고 가보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주물과라 그런지 꽤 재밌는 물건들이 많군요.”

“…건들지 말고 나가라.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다.”

“잠깐 보기만 합니다. 보기만.”

핏방울이 맺힌 숟가락, 눈동자가 움직이는 초상화, 귀신 찍힌 심령사진, 붉은 이름이 적힌 수첩, 말라비틀어진 다리 등 이상한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기 있는 그 어떤 것들보다 내 흥미를 끄는 건 구석에 있는 한 여학생이다.

‘주물과 에이스. 김제오가 대결 내기를 받아들인 결정적인 이유.’

그녀는 키가 작았다. 나보다 1살 위지만, 겉모습은 5살은 더 어려 보일 정도의 앳된 외모다.

창백한 백발은 허리까지 내려오고, 동태 같은 붉은 눈을 가졌다. 아카데미 교복 아래로 전신을 감은 하얀 붕대가 있다. 목과 얼굴 일부도 붕대가 감겨 있다.

신나리. 아카데미 2학년 3반. 65위.

성적은 65위지만, 실력은 2학년 최상위권이다.

“……??”

내가 빤히 바라보자 신나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령안을 발동했다. 내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난다. 그와 동시에 신나리의 몸 뒤에 있는 존재가 보인다.

여자 귀신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귀신보다 격이 더 높은 악령이다.

검은색 긴 머리에 붉은 피부, 두 눈은 파여 있으며 검은색 손톱은 10cm가 넘는다. 악령은 신나리를 등 뒤에서 끌어안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게임을 볼 때보다 비주얼이 더 별로군.’

신나리는 내 시선의 방향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넌 보이는구나.”

“제 눈이 좀 특별해서 잘 보입니다. 선배, 도와드릴까요.”

“…날 도와준다고 말한 사람 중에 제대로 도와준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어.”

신나리가 말하는 사람은 김제오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반응은 예상대로다. 말 좀 했다고 날 믿고 따라올 리가 없다. 신나리에겐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편이 확실하다.

정령안을 해제하고 칼레스와 함께 주물과 밖으로 나갔다.

“유진아. 처음부터 주물과와 내기를 할 생각이었니?”

“네.”

다른 곳이었다면 진령성가나, 성하리에게 연락하는 걸로 좋게 끝낼 수 있다. 그러나 여긴 아카데미다. 진령성가와 성하리의 이름은 잘 통하지 않는다.

‘제대로 나선다면 김제오 하나 정도는 쉽게 요리하겠지만…. 신나리를 따먹으려면 이렇게 나가는 편이 좋아.’

신나리는 내 취향이 아니다.

‘그래도 신나리 정도의 미녀를 남에게 줄 순 없지.’

주물과에 있는 다른 것도 챙길 생각이다.

“…주물과의 규모가 작다고 해서 만만히 볼 곳은 결코 아니야. 누군가는 마법보다 더 무서워하는 게 저주야. 저주 대처법은 있니?”

“칼레스 선생님한테만 특별히 알려드리죠. 그 어떤 저주도 절 옭아매지 못해요.”

난 자신만만하게 말했으나, 칼레스는 걱정되는지 내 어깨만 주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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