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125화 (1,125/1,497)

〈 1125화 〉 1125. 아카데미의 구원자

저녁 식사는 거실에서 진행되었다. 세진 그룹 회장 일가뿐만이 아니라 사장들까지 저녁 식사에 참석했기에 인원만 40명에 달했다.

상석에는 당연히 회장인 하헌신이 앉았고, 그 옆에는 중년 남자가 앉았다.

‘부회장이라고 했던가. 하준수가 회장 옆에 앉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세진 그룹의 부회장은 하헌신의 핏줄이 아니었다.

이름은 권성오. 하헌신을 30년 이상 모신 충신이다. 세진 그룹의 사정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가 하헌신의 신뢰를 받는 건 알겠다.

‘하승희의 아버지는 옛날에 죽었고, 어머니는 해외에 있다고 했던가.’

부회장 다음 자리에 앉은 건 최 비서였다. 그는 회장의 왼팔이었다. 그다음 자리에는 하준수가 앉았다. 그의 옆에는 강나미가 앉아서 눈웃음을 짓고 있다. 그 맞은편에는 하승희와 내가 앉았다.

하승희를 바라봤다. 방금까지만 해도 내 아래에 깔려 앙앙 울던 그녀는 새침한 얼굴로 젓가락을 움직였다. 지금 그녀의 보지와 항문에는 내 정액이 가득 들어 있을 것이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식기를 들었다.

“음식은 입에 맞나?”

“대단합니다. 나중에 요리사를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군. 요리사는 이후에 소개해주겠네.”

식사는 계속되었다. 회장이 입을 열지 않으니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식사 후에 계열사 사장들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나도 슬슬 가봐야겠군.’

하헌신과 하승희에게 인사하고 정원 쪽으로 나왔다. 정원을 둘러보다가 강나미를 발견했다. 혼자서 정원을 걷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꼴이 무언가를 찾는 것 같기도 했다. 강나미는 나를 보더니, 눈웃음을 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강나미의 행동에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 일을 핑계로 추궁하는 건 마땅한 짓이 아니다. 걸어가서 말을 걸기에도 주변의 시선이 너무 많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 다음에는 강나미랑 대화할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군.’

나는 으리으리한 저택을 뒤로했다.

•••

“최 비서. 성유진. 자네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나?”

항상 앉던 서재의 자리에 앉은 하헌신이 물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최 비서는 창문 밖을 힐끔거렸다. 성유진이 정원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최 비서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지켜봤다.

“대단합니다. 저나 사장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장님 앞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연기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 시간에 그를 주의 깊게 봤습니다. 자유스러운 손놀림이었으나, 품격이 은근하게 비쳤습니다. 식사 예절을 배운 게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저희가 놓친 비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관두게. 식사 예절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네. 중요한 건 그의 재능이지. 내가 최 비서에게 묻고 싶은 것도 그것에 대한 거고.”

“…헌터로서의 재능만 따진다면… 회장님에 필적할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판단했지?”

“그의 나이 이제 스물셋입니다. 그 젊은 나이에 A등급에 필적하는 실력을 갖췄으며, 회장님에게는 상처까지 입혔습니다.”

“한아영과 비교해보지. 자네는 어느 쪽이 더 재능있다고 생각하나?”

“한아영도 A급 헌터의 기량을 갖추기까지 4년은 걸린 것으로 압니다. 반면 성유진은 정식 헌터가 된 지 3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아영 이상의 천재라 보는군.”

“…네. 그렇습니다.”

최 비서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하헌신이 누군가의 재능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묻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모르겠군.”

“네?”

“그가 천재인지 둔재인지 모르겠다.”

“성유진은 회장님께 상처를 입혔습니다. 또래 중에서 상대는 없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아마 첫째 도련님도… 성유진과 싸우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 그런데 그거 아나? 그의 전투 방식은 천재의 전투 방식이 아니었다.”

“……?”

최 비서는 회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최 비서는 몇 시간 전에 있었던 대련을 떠올렸다. 벼락을 부리며 하헌신을 몰아치는 그의 움직임이 천재의 전투 방식이 아니라고?

“영천류 기술은 완벽했다. 이미 달인의 경지지. 그건 논쟁거리도 아니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천재의 것이 아니다. 영감과 재능. 그것들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 하지만 성유진과 회장님의 대련은 대단했습니다. 회장님이 성유진을 상대로 진지하게 임하지 않은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성유진은 뛰어났습니다.”

“그건 경험이다. 그 젊은 몸과는 어울리지 않는 막대한 전투 경험이 그를 천재처럼 보이게 하는 거지. 무엇보다, 그는 아직 숨기고 있는 게 있다. 비장의 한 수를 숨겼다. 대련을 하면서 확실하게 느꼈지. …어쩌면 숨기는 게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일지도 모르겠군. ”

“성유진을 다시 조사하겠습니다.”

“됐다. 그는 협회도 주목하고 있으니 꼬리라도 잡히면 곤란해진다. 그것보다 승희의 반려로서 그를 어떻게 생각하나?”

“저는 찬성입니다. 그라면 아가씨께 가장 부족한 걸 채워줄 수 있을 겁니다.”

“가장 부족한 것…. 무력이지.”

하헌신은 창문에 시선을 던졌다. 밤하늘에는 달을 제외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세진 그룹이 지금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던 이유는 하헌신과 재력과 무력을 동시에 갖췄기 때문이다.

그는 막연하게 미래를 예감했다. 아마도 미래는 과거보다 훨씬 혼란스러울 것이며, 혼란스러운 상황을 타파하려면 돈보다는 힘이 더 필요했다.

돈을 지킬 힘이 없으면, 결국에는 힘을 가진 놈의 지갑이 될 뿐이다.

“내가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은 지켜보지.”

아직 시간은 많았다.

막연한 미래를 불안하게 느끼기에는, 하헌신은 아직 정정했다.

•••

아카데미 구원자 세계에 들어왔다.

정령과 소속이 된 나는 과수업이 있을 때마다 정령과 건물에 들어간다.

마루한 아카데미에서 정령사는 딱 2명이다.

나와 다크 엘프인 칼레스. 아카데미 학생으로만 따지면 정령사는 나 한 명밖에 없었다.

졸지에 아카데미에서 일대일 개인 교습을 받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칼레스와 나는 저번에 선을 넘었고, 그 관계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예를 들면 수업 시간에 눈이 맞자 바로 옷을 던지고 섹스를 한다거나….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정령과는 아주 편했다.

오늘도 정령술의 기초를 연습하다가 칼레스와 섹스하고 기숙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정령술은 몇 번을 연습해도 감이 안 잡힌단 말이지.’

정령술. 정령을 부리는 방법이 아닌 정령의 힘을 이용한 술법. 나는 정령친화력이 높으나, 정령술 재능이 전혀 없었다.

‘정령술을 사용할 수 있으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텐데. 계속 연습하다 보면 간단한 정령술 몇 개는 쓸 수 있겠지…?’

자신이 없었다.

시간을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유진아.”

매끈한 갈색 피부와 밝은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긴 귀. 블라우스와 긴 치마를 입은 미녀 다크 엘프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칼레스였다.

평소처럼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려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상 여유롭던 칼레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무슨 일 있었어요?”

“…정령과는 해체될 것 같아.”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칼레스는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설명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전공과장 회의가 있었다고 한다. 아카데미 학장과 부학장이 참석한 회의. 아카데미 실세들의 회의라고 보면 된다.

칼레스는 정령과의 유일한 교사로서 학과장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일부 학과에 공격을 받았다.

“정령과는 한 명밖에 없으니까. 다른 전공과장은 그게 특혜라면서 정령과의 해체를 요구했어.”

“강지영 학장님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나요?”

정령과의 뒤에는 강지영이 있다. 어지간한 교사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정령과에 대해선 조용히 넘어갈 것이다. 강지영의 권력이 흔들리지 않은 이상은.

“참석했어. 근데 이번에 다른 규모가 작은 전공과장들이 모여서 작정한 것 같아. 아무리 강지영 학장님이라도 무시하지 못했어.”

“…정령과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정령과가 다시 개설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럴 리가. 이건 예산 문제야. 아카데미 전공과는 예산이 좀 특이하게 할당되거든.”

“어떻게 할당되는데요?”

“우선 검무과, 창무과, 마법과 같이 대중적이고 역사가 깊은 대형 전공과는 정부와 히어로 협회의 지원 받아. 강지영 학장님도 대형 전공과의 예산은 손을 쓰지 못해.”

“…와. 대형 전공과는 일 년 예산이 어느 정도예요? 수십억은 받겠죠?”

칼레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수십억? 겨우 그 정도 일 리 없잖니. 내가 알기로 검무과의 이번 연도 예산이 420억 정도야. 특히 마법과는 숫자 자리가 하나 더 많아. 마법과의 정확한 예산은 나도 잘 모르지만… 1,500억이 넘는다는 말이 있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예산에 깜짝 놀랐다. 물론 인건비는 포함되지 않는 예산이다.

‘그래도 마법과는 이해가 가는군. 마법 인재는 특히 귀하니까. 그리고 마법 재료들을 생각하면… 1,500억도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네.’

이쯤 되니 정령과의 예산이 궁금해졌다.

“정령과의 예산은 얼마에요?”

“1억을 배정받았어. 정령과가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그 절반도 받지 못했지만.”

“겨우 1억이에요? 실망이네요.”

“정령과 학생은 너밖에 없잖니. 1억도 많은 거야.”

그녀는 대형 전공과를 제외한 중소규모의 전공과가 예산을 받는 방식을 말해줬다.

중소규모의 전공과는 예산을 나눠 가지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이번 연도 예산이 100억이라 하면, 학장이 전공과의 성과 등을 따져 각각 나눠준다.

“올해 중소규모 전공과 전체 예산은 1,422억이야. 중소 전공과의 수는 40개 정도.”

“0.1%도 되지 않는 예산 때문에 정령과를 물어뜯는다고요? 장난하나.”

짜증이 확 밀려왔다.

“여기서 중형 규모의 전공과가 수십억 씩 가져가고, 우리 같은 작은 전공과는 몇억 밖에 받지 못해.”

“중형 전공과는 1억 정도에 큰 관심 없을 테고…. 그 작은 놈들이 욕심을 부린다는 거군요.”

중형 전공과는 대충 20개다. 1억을 20개로 나누면 천만 원도 되지 않는다. 고작 500만 원 때문에 강지영과 대립하는 일을 저지를 리 없다.

그러나 소형 전공과는? 그놈들은 100만 원도 아까울 것이다.

‘다른 전공과가 새롭게 개설되는 것도 경계하는 거겠지. 정령과같은 일이 또 일어날 수 있으니까. 강지영과 대립하는 부학장이 뒤에서 밀어주니… 강지영이 크게 두렵지도 않을 테고.’

귀찮다.

돈 정도야 내가 얼마나 가져올 수 있다. 수백억? 아니, 수천억도 우습다.

문제는 예산이 빼앗긴다는 건 정령과가 해체된다는 말과 같다.

‘여긴 모여서 섹스하기 딱 좋은 곳인데 버릴 수 없지.’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칼레스 선생님. 그놈들 중에 총대 멘 놈들 있죠? 어디에요?”

“혹시 찾아가서 따질 생각이니?”

“네. 따져야죠.”

“…네가 가서 따진다고 말을 듣겠니?”

그녀의 말이 맞다.

학생이 따지면 가서 공부나 하라고 반응할 게 뻔하다.

하지만 학생도 학생 나름이다.

“선생님. 우리 엄마 학부모회 회장이에요. 그리고 우리 엄마 SS급이에요. 한국 히어로 협회장도 우리 엄마가 눈 깔라고 하면 눈 깔아야 해요. 작은 전공과 교사 따위가 감히 절 무시하겠어요?”

“으, 응…. 그렇네….”

작은 전공과 교사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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