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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123화 (1,123/1,497)

〈 1123화 〉 1123. 극기

“자네를 확인해보고 싶네. 나와 대련해보지 않겠는가?”

“…….”

S급 헌터와 공짜로 대련할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특히 괴신이란 별명을 가진 하헌신은 늙었다는 이유로 헌터계에서 은퇴한 상황이다. 허나 그 누구도 하헌신이 약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80이 넘는 나이임에도 40대 중반의 중년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걸 봐도 보통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내게 대련을 신청한 이유는? 정말로 내 재능을 확인해보고 싶어서?

‘왜 내 재능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는 거지?’

[백환] 세계의 대귀족이 나다. 몇 번 머리를 굴리자 답은 바로 나왔다. 아니, 바로 옆에 답이 있었다.

‘하승희와 관련 있기 때문이겠지. 내가 하승희와 연인관계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마도 하헌신은 내 재능을, 정확하게는 내 한계를 확인해보고 싶은 거다. 내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괴신과 대련할 수 있는 기회…. 쉽게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지요. 오히려 제 쪽에서 대련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해서 다행이군.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바로 하지 않겠나?”

“저야 영광입니다만, 아무 곳에서나 대련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평소에 이용하는 수련장이 있네. 거기서 하지.”

하헌신이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간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 나가려는데 하승희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뭐야.”

“할아버지와 대련하기로 한 이상 최선을 다하세요. 할아버지를 실망시키지 말아 주세요.”

하승희의 두 눈은 착잡했다. 무슨 뜻일까 고민하다가 그녀에게 헌터로서의 재능이 별로 없다는 걸 알았다. 예전에 하헌신을 실망시킨 적 있는 모양이다.

‘하준수도 헌터로서의 재능은 별로 없지. 대단하긴 한데 그 무력으로는 기껏해야 B급? 그 정도 수준이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S급인 하헌신의 손자라는 배경을 생각하면 시시하게 느껴진다.

“그 영감의 놀라는 표정이 보고 싶어졌어.”

“남의 할아버지를 영감이라 부르지 말아 줄래요? 그리고 할아버지를 놀래려면 많이 노력해야 할 거예요.”

하승희에게 어깨를 으쓱여주고 서재 밖으로 나갔다.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나와 하승희를 안내한다. 보아하니 하헌신은 다른 곳에 잠깐 들린 모양이다.

저택 옆에 있는 별채로 들어갔다. 이제 보니 별채 전체가 수련장이었다. 천장이 높고 벽에서는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결계인가? 뭔지 모를 결계인데 대단하다는 건 알겠군.’

이곳의 주인이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 중 한 사람이자, S급 헌터라는 것을 상기하니 이 대단한 수련장도 별거 없게 느껴진다.

웅성웅성.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하승희와 하준수 남매를 비롯한 사장들이 수련장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구경꾼들이 많아서 미안하군. 혹시 저들의 시선이 불편하나?”

도복을 입고 나타난 하헌신이 내게 물었다. 도복 사이로 그의 단단한 근육이 엿보였다.

“저들의 시선은 아무래도 좋습니다만, 호사가들이 멋대로 지껄이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요.”

“저들의 입단속은 내 이름을 걸고 단단히 시킬 테니 걱정 말게.”

“회장님의 이름을 믿겠습니다.”

하헌신은 옆에 있는 정장을 입은 나이 든 남자를 불렀다.

“최 비서.”

“네. 회장님.”

최 비서가 천에 덮인 상자를 내밀었다. 천 위에는 잘 관리된 칼 한 자루가 예기를 흘리며 존재감을 뽐낸다.

“자네가 칼을 사용한다고 해서 준비했네.”

“평범한 칼은 아니군요.”

“김유신이 사용했던 환도를 특별한 방법을 걸쳐 복원한 거네. 내 보물 중 하나지. 자네에게 빌려주겠네.”

“아, 김유신. 바다왕 말이죠. 잘 알고 있습니다.”

“…바다왕… 해상왕 장보고를 말하는 건가.”

“아, 제가 역사에 약해서 헷갈렸습니다.”

떨떠름한 하헌신의 표정을 못 본 척하고 칼자루를 손에 쥐었다. 서늘한 감각이 팔을 타고 머리까지 흐른다.

‘좋은 칼이군.’

그러나 화련비도에 비하면 아쉽다. 뭐가 아쉽냐고 묻는다면 뭐라 대답하기 힘들었다. 내 손이 화련비도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 화련비도를 꺼낼까? …보는 눈이 많으니 숨기는 편이 낫나.’

허공에 칼을 휘둘러봤다. 나쁘지 않았다. 마나를 움직이자 칼날에 푸른 검기가 맺혔다. 여기서 영천기공을 조금 운용하자 검기 위로 전류가 흐른다.

“영천류의 검기로군. 자네가 영천류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감회가 새롭군.”

“영천류를 아십니까?”

“전대 종주와 약간의 연이 있었네.”

하헌신은 추억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고리타분한 추억이라 자네에게 말해줄 정도는 아니네. 준비 시간이 더 필요한가?”

“이 정도면 괜찮습니다. 회장님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내 육체가 곧 무기네.”

나는 그가 걸친 도복을 바라봤다. 하얀색 도복에선 어떠한 특별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단순한 도복이다. 장신구 같은 것도 없다. 다시 말해 하헌신은 무기도 방어구도 없는 맨몸이었다.

하헌신이 S급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쯤 되니 나도 자존심이 상한다.

“대련을 하기 전에 확실히 하고 싶군요. 제가 회장님께 중상을 입히면 어떻게 됩니까? 사고로 회장님이 죽는 일이 발생….”

사방에서 적의가 쏟아진다. 계열사 사장들의 적의는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는 정면, 하헌신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다. 서재에서 느꼈던 것보다 몇 배나 더 농후한 기세가 나를 압박한다.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던 하헌신이 피식하고 웃었다. 몸을 압박하던 기세도 사라졌다.

“자네 좀 건방지군.”

“…기분 상하셨습니까.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 사과할 필요 없네.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듣는 건 10년 만이라 흥분되는군.”

하헌신이 뒤로 물러서며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갈무리된 기세가 눈을 통해 흘러나온다.

“날 죽일 수 있다면 죽여보게. 설령 이 대련에서 내가 죽더라도 자네에게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네.”

“…….”

“난 말뿐인 남자를 혐오하네.”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끼며 칼자루를 꽉 쥐었다.

‘S급과의 대련이고 나발이고. 누군가에게 시험받는 건 영 기분 나쁘단 말이지.’

마나와 함께 투지를 끌어올린다.

‘뒷일은 알 게 뭐야. 기회가 오면 바로 죽여버린다, 영감.’

내 살의를 느낀 하헌신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허나 그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작하지.”

그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가속과 찰나를 사용해 접근했다. 하헌신의 반응은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 기준의 최고의 속도는 그에겐 아무것도 아닌 속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헌신의 몸 위로 독수리 머리를 한 곰의 형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A급 몬스터인 이글베어다.

영천류(影天流) 뇌광(雷光).

빛살이 된 칼이 그의 손에 붙잡혔다. 이토록 쉽게 막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약간의 허탈함을 느꼈다.

“그게 회장님의 능력인 괴탈(怪奪)입니까?”

몬스터의 특성을 약탈하는 능력. 하헌신의 능력은 유명했다.

“그렇네. 지금 나는 이글베어의 신체 능력을 추가로 얻은 상태네. 이글베어의 힘과 반응속도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하지.”

파직.

전격이 내 의지에 반응한다.

‘봉뢰로 마나를 봉인하고 베어낸다. 아무리 S급이라도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상… 커억!’

낌새를 느낀 하헌신이 칼을 잡아 위로 내던졌다. 몸이 솟구쳐 천장과 부딪쳤다. 몸은 다시 아래로 떨어진다. 하헌신은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어퍼컷을 장전하고 있었다.

영천류(影天流) 극기(極技) 폭진뢰(爆震雷).

그에게 시퍼런 번개 한 줄기가 떨어졌다. 번개는 그의 몸에 닿자마자 폭발했다.

피해를 입히진 못했다. 그는 번개가 떨어지기 직전 백스텝을 밟아 공격을 피했다. 그의 하얀 도복에는 그을림 하나 없었다.

바닥에 착지한 나는 한숨을 토했다.

‘강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나는 한아영을 떠올리며 그와 비교했다. 이제 막 S급이 된 한아영과 하헌신이 싸운다면….

‘십중팔구 하헌신이 이긴다. A급에서도 격차가 존재하듯, S급에서도 격차가 존재해.’

대련 시작 전에는 내가 이길 가능성이 1%는 있지 않을까. 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직접 상대해보니 0.1%의 가능성도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지.’

하헌신의 몸 위로 하얀 늑대 형상이 떠오른다. 황금색의 눈동자와 이마에 달린 뿔. S등급 몬스터인 라이크로스다. 그리고 라이크로스의 특성은 번개.

‘…이 망할 영감이.’

하헌신에게서 번개가 날아온다. 평범한 번개가 아니다. 마나가 담긴 번개. 나도 무시할 수 없는 번개다.

‘쳐낸다.’

번개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번개가 칼에 달라붙어 내 몸을 감전시키려 한다.

‘번개를 사용하는 방향이 단순했어. 하헌신이 원래 자주 쓰는 기술이 아니야. 날 놀리려고 일부러 번개를 쓴 거지.’

번개에 담긴 의지가 약하다. 이 정도면 빼앗을 수 있다. 감전에 의한 통증은 무시하고 칼을 다시 휘둘렀다. 받아친 번개가 하헌신을 향해 날아간다.

“오호.”

하헌신이 감탄사를 흘리며 손을 뻗는다. 피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내가 받아친 번개를 다시 받아칠 속셈이다. 그 오만함은 예측했다. 하헌신에겐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그리고 번개는 폭발했다.

콰콰콰쾅!

영천류(影天流) 극기(極技) 폭진뢰(爆震雷).

‘번개를 받아 칠 때 폭진뢰의 묘리를 섞었지. 다른 극기와는 다르게 폭진뢰와는 유난히 상성이 좋거든. 아마 뇌전 특성의 영향이겠지만.’

“커흠. 이거 한 방 먹었군.”

짧은 폭발이 끝나고 하헌신이 가볍게 기침했다. 하얀 도복은 그을렸지만, 그의 피부는 어떠한 상처도 없었다.

‘…좀 충격적이군.’

흐트러지는 정신을 바로 잡았다.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하헌신의 목적은 내 재능의 확인이다. 그러니 적어도 3분은 대련이 진행될 것이다.

나는 땅을 박차고 하헌신에게 달려들었다.

•••

3분이 지났다.

“저력은 있구나.”

하헌신이 말했다. 칭찬이 아니었다. 그의 두 눈에 담긴 것은 지루함과 실망이었다. 나는 하헌신의 기준을 넘지 못했다.

거친 숨을 토하며 거리를 벌렸다. 땀투성이인 나에 비해 하헌신의 호흡은 고요했다.

“슬슬 끝내고 저녁식사나 하지.”

하헌신이 주먹을 꽉 쥐고 다리에 힘을 주어 진각을 밟았다. 힘의 충격은 바람이 되어 수련장을 한차례 쓸고 지나갔다.

본래의 나라면 여기서 포기했을 것이다. 하헌신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관심 없으니까. 그가 날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얻을 게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안전한 곳에 있는 하승희가 묵묵히 날 지켜보고 있었다.

‘승희한테 저 영감이 놀라는 얼굴을 보여준다고 약속했단 말이지.’

양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마나를 끌어올린다. 몸 구석구석에 있는 마나까지 모조리 쥐어 짜낸다. 후유증? 내가 언제 그딴 걸 신경 쓴 적 있던가. 여차하면 완전 회복을 쓰면 된다.

다음으로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하헌신이 아니라 양손에 쥔 칼을 바라본다. 하헌신은 이게 마지막 일격이란 걸 알아차리고 기다리고 있다.

‘천심.’

[천심(天心)을 발동합니다. 1분 동안 지속됩니다.]

내 의지는 마나를 정련하고, 마나는 검기가 되었으며, 검기는 뇌전이 되어 칼날에 스며들었다.

전투로 고조된 집중력은 한계를 넘어 아직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이끌었다.

칼이 나인가?

번개가 나인가?

모르겠다.

다만, 내가 베야 할 존재만큼은 뚜렷하게 보였다.

영천류(影天流) 극기(極技) 천광(天光).

한 줄기 빛이 되어 하헌신에게 돌진했다. 하헌신의 경악한 표정이 보인다. 그의 몸 위로 검붉은 바위 괴물의 형상이 번쩍였다. 하헌신이 처음으로 양손을 들어 올려 가드를 만들었다.

그를 베고 지나갔다.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꽉 주어 쓰러지려는 것을 막았다. 꼴사납게 자빠지고 싶지 않았다.

등 뒤에서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헌신의 피다.

나는 손끝에 남아 있는 참격의 감각을 되새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양팔이 베인 하헌신이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치명적인 피해는 아니었다.

“놀랍군. 설마 적암귀(赤巖龜)의 방어력까지 뚫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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