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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122화 (1,122/1,497)

〈 1122화 〉 1122. 극기

세진 그룹 회장에게 초대받았다.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기업 중 하나, 거기에 헌터계와 깊숙이 연관된 기업. 작은 인연이라도 만들어두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승희의 말로는 회장이 내게 호기심을 가졌다고 했던가.’

회장이 나와 하승희의 관계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하승희를 통해 들었다.

헤빌의 촉진제. HB-1.

회장은 나와 하승희의 관계를 사업적인 관계로 알고 있다. 설마 내가 손녀의 보지와 똥구멍을 좆으로 쑤시는 사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하고 있겠지.

이번 회장의 초청을 거절하지 않은 건 하승희의 면을 세워주려는 뜻도 있지만, 언젠간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이미 위에 자리한 이들과 만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유희 세계를 통해 이미 경험해봤다. 강해질수록 세계를 변한다. 현실의 내 세계도 변할 때가 온 것뿐이다.

나는 정장을 차려입고 하승희의 본가로 향했다.

본가는 귀족 저택 수준이었고, 그 주변은 경호원들로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다.

“성유진 씨. 어서 오십시오. 이곳까지 오시느라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입구에선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애도 아니고 뭐가 힘들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당히 정문을 넘었다. 마나의 흐름이 바뀐다. 피부가 저릿하다. 상당히 뛰어난 결계가 저택을 지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세진 그룹 회장의 거처이니 이 정도 결계는 당연하겠지.’

몸을 압박하는 결계를 무시하고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감시 카메라를 비롯한 이곳의 보안 체계가 내 등 뒤를 따른다.

•••

넓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하승희가 입구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선배. 의외로 정장이 잘 어울리시네요.”

“의외라는 말을 붙일 필요는 없을 텐데. 근데 넌 왜 정장을 입고 있는 거야? 여기 네 집 아니야?”

“평소에는 저도 편하게 입어요. 오늘은 격식이 필요한 날이니까요.”

하승희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입구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기세를 흘리는 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입가에 웃음을 걸고 내게 다가와 명함을 건네준다. 명함을 보니 세진 그룹 계열사 사장들이다.

“성유진 씨,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나 또한 준비해둔 명함을 그들에게 건네줬다.

“받은 명함은 버리지 말고 가지고 계세요. 나중에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하승희가 내게 말했다.

“…인맥의 중요성은 알고 있긴 한데… 크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군.”

“평범한 계열사 사장들이 아니에요. 할아버지의 측근들이죠. 헌터 시장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죠. 가령 방금 지나간 사장님은 마석 정제 회사를 이끌고 계시죠. 마석이 급하게 필요할 때 연락해보면 질 좋은 마석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이 명함도 너 때문에 주는 건 아니지?”

“저 사람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높은데 그럴 리가요. 할아버지 말이 아니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선배에게 명함을 줬다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저 사람들이 판단한 거예요.”

“뭐,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사람들이 모인 거실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한다. 계단 입구에서 하준수와 마주쳤다.

“…….”

“…….”

하준수와 하승희는 조용히 서로를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성유진 씨. 그때 했던 말은 아직 유효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

하준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하승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승희야. 네가 연구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할아버지에게 들었어.”

“더는 방해하지 마. 이번 일은 내가 이긴 거야.”

“기업에 도움이 되는 일인데 내가 왜 방해하겠어. 다만, 그 일을 네가 잘 이끌어갈 수 있을지 염려스러울 뿐이야.”

“오빠가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일은 잘 풀릴 거야. 그룹의 주가가 치솟는 게 벌써 눈에 보이네.”

“승희야, 네 오만함을 경계해. 그리고 이게 끝은 아니야. 내가 쌓아온 것들은 네가 아는 것 이상으로 훨씬 많아.”

하준수는 하승희를 지나쳤다. 그때, 1층 복도 쪽에서 한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하준수의 팔짱을 꼈다. 영화배우 강나미였다. 놀란 나는 두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청담동 며느리 스타일의 우아한 하얀 블라우스와 갈색 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TV로 보던 것보다 몇 배는 청순했다. 강나미를 보는 하준수의 얼굴은 살짝 풀어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오랜만에 뵙네요.”

“네. 오랜만이네요. 강나미 씨.”

“옆에 계신 분은 남자친구이신가요?”

“아뇨. 직장 동료예요.”

“흐음. 그런가요.”

강나미는 가벼운 인사만 건네고 하준수를 따라 거실로 이동했다. 나는 그 뒤를 빤히 쳐다봤다. 퇴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20대 초반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젊고 아름다웠다. 거기에 여배우 특유의 아우라까지 느껴진다. 여배우는 DNA부터 보통 사람과는 다른 건가.

“선배. 멍하니 뭐해요?”

퍼뜩 정신 차린 나는 여배우의 엉덩이를 탐닉하던 시선을 돌렸다. 하승희는 변태를 보는 시선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나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영화배우인 강나미를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라서… 시선이 좀 팔렸어. 내가 강나미 팬이거든.”

“아. 그러세요.”

“강나미는 3개월 뒤에 결혼한다던데… 혹시 그 상대가…?”

“네. 큰오빠예요.”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조금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재벌가라면 몰라도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세진 그룹의 장남이 연예인과 결혼한다?

“…강나미의 집안이 사실 어마무시한 집안이었나?”

“평범한 집안이에요. 아버지는 공무원에 어머니는 전업주부죠.”

“그런데도 하준수와 결혼한다고? 집안에서 반대 안 해?”

“저희 집안은 연애나 결혼이 자유로운 편이에요.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만 해도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어요.”

“…그래.”

하승희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강나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오랫동안 동경해온 그녀를 실제로 보니 꼬추가 바로 반응한다.

‘절대 최면 스티커를… 젠장. 포인트가 없어.’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나미의 모습을 지우고 다른 일에 집중한다.

“세진 그룹 회장을 만나러 가는 거지? 아마 서재에서 날 기다리고 있겠지?”

“…어떻게 알았어요?”

“드라마나 웹소설을 보면 보통 회장은 서재에 있더라고.”

“긴장 안 되세요? 보통 할아버지의 서재에 처음 들어가는 사람들은 얼어붙던데. 몇 년 전에는 구역질하는 사람도 봤어요.”

“긴장은 되지.”

유희 세계에서 높으신 분들을 만나는 일을 몇 번 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근데 딱히 내가 잘못한 건 없잖아. 날 죽이려고 부른 것도 아닌데 덜덜 떨 필요는 없어.”

3층의 고풍스러운 나무 문 앞에 도착했다. 하승희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세진 그룹 회장, 하헌신의 서재는 가족인 그녀마저 긴장할 정도다.

하승희는 천천히 오른손등으로 서재 문을 노크했다.

“할아버지. 저 승희예요. 유진 선배와 같이 왔어요.”

“들어와라.”

문 너머로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하승희가 문고리를 잡기 전에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밖으로 나온다. 정수리에 원형 탈모가 진행 중인 중년 남성이었다. 얼굴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그는 하승희에게 묵례하고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친척으로는 보이지 않으니 계열사 사장 중 한 사람이겠지.

‘1층에 모여있던 사장들을 보면… 아무래도 오늘이 정기로 보고하는 날인가 보군.’

하승희와 함께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조명이 켜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을 가득 채운 책장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어두운 편이었다. 그리고 서재 끝, 창문이 있는 곳에 한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세진 그룹의 회장인 하헌신이다. 실제 나이는 80대가 넘지만, 겉모습은 40대 중반의 남성으로 보인다.

하헌신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기백이 담긴 시선은 압력이 되어 내 몸을 옭아맨다.

너무 뻔해서 웃음을 흘릴 뻔했다.

‘꼭 높은 자리에 있는 놈들은 상대방의 기를 죽이고 싶어 한단 말이지.’

겨우 이런 압박에 쫄 내가 아니었다. 겁먹은 척 연기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당당하게 하헌신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보는군. 날 기억하나?”

“제주도에서 뵈었지요. 그날의 기억은 강렬했습니다. 잊지 못할 정도로요.”

제주도 MT에서 그를 만났다. 그때는 인사만 나누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헌신은 내가 이렇게 자신의 서재에 오리라곤 생각도 못 했으리라.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때와는 딴판이로군. 성장이 빨라도 너무 빠른 게 아닌가? 뭔가 따로 비결이라도 있나?”

“꾸준히 수련하는 게 비결입니다. 그보다 저를 부르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당돌하군. 자네 같은 젊은이를 싫어하진 않네.”

하헌신은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자네에 대한 정보가 적힌 서류지. 현재 재적 중인 학교는 국천대학교. 부모님은 강원도 평창에서 일하시는군. 능력을 각성한 건 약 2년 전. 고작 2년 만에 B급에 올랐고, 실제 실력은 A급. 특별한 가문 출신이면 이해할 수 있네만…. 자네의 배경은 평범 그 자체더군.”

“…….”

“아, 자네를 조사해서 기분 나빴나? 기분 나빴으면 사과하겠네.”

“썩 기분은 좋지 않지만… 괜찮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것들은 모두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정보들이니까요.”

하헌신이 말한 내 정보는 흥신소에 의뢰하면 하루 만에 나오는 정보들이었다. 부모님은 무사하다. 협회의 특별관리대상자로 지정되었으니까.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협회에서 바로 내게 연락이 온다.

“동요하지 않고 냉정함을 유지하는 자세는 대단하군. 내가 그 나이 때는 감정을 잘 조절 하지 못했었지….”

“어떤 상황에서든 냉정함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HB-1에 대한 건 승희와 계약을 했군. 자네는 정말 3,000 억 원으로 HB-1의 권리를 파는 건가? HB-1은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네.”

“이미 그 이야기는 끝난 일입니다. 훗날에도 HB-1의 권리를 주장할 생각 없습니다. 맹세하죠. 뭣하면 각서라도 쓰죠.”

“믿겠네. 뭐, 자네 같은 능력자에겐 돈은 그리 중요하지 않지. 내가 자네를 직접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재능을 확인하기 위해서네.”

“…재능이요?”

“높은 자리에 오르면 사람 보는 눈이 생기지. 나 같은 경우는 헌터의 재능을 알아보는 눈이 발달했네. 웬만한 헌터는 한 번 보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견적이 딱 나오지.”

“대단하신 능력이군요.”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하헌신이 낮게 웃었다.

“믿지 않는 모양이군.”

“아뇨. 믿습니다. 이 세상에는 온갖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죠. 다만,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습니다.”

“제주도에서 만났을 때를 기억하나? 그때 나는 자네에 대해 큰 흥미는 없었네. 당시에 본 재능으로는 박수호라는 아이가 더 대단했었지.”

“수호요? 대단한 녀석이긴 하죠.”

“그때는 자네에게 덕담을 해줬던 것 같은데… 솔직하게 말하겠네. 난 자네가 도태될 줄 알았네. 그때 본 자네의 재능은 기껏해야 A급도 힘들다고 생각했네. 그런데 설마 이렇게 빨리 성장해서 내 앞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지.”

“…….”

정말 그는 사람의 재능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는 건가? 제 손자와 손녀에게 헌터 일을 시키지 않는 걸 보면 진짜 재능을 보는 능력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지금도 자네에게서 재능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네.”

“…으음. 어떤 대답을 원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자네를 확인해보고 싶네. 나와 대련해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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