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0화 〉 1120. 극기
하승희가 돌연 약속 장소를 바꿨다. 나는 그녀에게 투덜거렸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결국 기존의 약속 장소를 대신하여 서울 외곽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CLOSED 안내판을 무시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문을 잠그는 걸 잊지 않았다. 하승희는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깊숙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긴 검은 머리와 차분한 얼굴은 몇 번을 봐도 사람이 아닌 인형처럼 느껴진다.
“갑자기 장소는 왜 바꾼 거야?”
“여기가 당구장보다 훨씬 운치 있잖아요.”
“당구장은 당구장만의 맛이 있지. 난 거기서 섹스하고 싶었다고.”
평범하게 호텔이나 모텔에서 만나 섹스하는 건 질렸다. 나는 색다름을 추구할 수 있는 장소들을 원했다.
“이 카페는 빌린 거지? 얼마 했어?”
“돈은 안 들었어요. 취미로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한테 빌린 거니까요.”
“이해를 못 하겠는데. 왜 여기서 만나자고 한 거야?”
“하준수. 큰오빠가 선배에게 접근했다면서요? 큰오빠가 본격적으로 나서기로 했다면 선배나 저에게 미행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아요. 이 카페 주위는 탁 트여 있어서 미행이 있나 없나 확인하기 딱 좋거든요. 무엇보다 여긴 도청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요.”
“평범한 카페로 보이는 데 안전하다고?”
“으음. 직접 보시는 편이 좋겠죠. 따라오세요.”
하승희가 일어나더니 카페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의 뒤쪽에 작은 문이 있었다. 문을 열자 널찍한 복도와 계단이 나왔다.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자 방 하나가 나왔다.
“여긴….”
커다란 TV. 푹신한 소파. 긴 테이블. 어두운 조명 등 클럽의 VIP 룸과 흡사했다.
“재벌 3세들의 은밀한 파티 장소?!”
“가끔씩 친구들끼리 이용하는 곳이에요. 재벌가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섹스나 마약 파티를 하기 딱 좋은데.”
“이곳에 남자가 오는 경우는 없어요. 섹스는 말이 안 되죠. 이곳의 가장 좋은 점은 A급의 최상위 사이코메트리 계열 능력자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볼 수 없다는 점이에요.”
“그렇게 따지면 이미 늦은 거 아닌가? 우린 다른 곳에서도 만났잖아.”
“사이코메트리에도 여러 조건이 있어요. 우리가 만났던 곳이 우리에게 특별한 곳이었던가요?”
“그건 아니지.”
“애착이 깃든 물건이나 장소가 아니면, 뛰어난 사이코메트리 능력자라도 열흘 이상의 과거를 알아내는 건 불가능해요.”
“그럼 지금 와서 이 장소를 택한 이유는?”
“큰오빠가 알아차렸으니까요.”
“하준수 말인가. 그냥 떠본 것일 수도 있잖아.”
“선배는 큰오빠에 대해서 몰라요. 그 인간은 확신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아요. 즉, 움직였다는 건 이미 확신을 가졌다는 뜻이죠.”
“너랑 나의 관계를 말이지?”
“언제까지 농담할 거예요? 큰오빠가 뭘 노리는지는 이미 알고 있잖아요.”
헤빌의 촉진제.
내가 하승희에게 주었고, 하승희가 연구하고 있는 물건이다.
하승희가 헤빌의 촉진제를 대량생산에 성공하면 높은 확률로 그룹 후계자 자리를 꿰찰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하승준으로선 탐탁지 않을 것이다.
“헤빌의 촉진제를 들켰나?”
“들키진 않았어요. 그랬다면 더 노골적으로 나왔겠죠.”
“우리 계약은 계속 이어가는 거지?”
“그것 때문에 할말이 있어요. 좀 더 계약을 확실하게 하고 싶어요.”
“…….”
나는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소파의 틈새에 묻어 있는 가루를.
“마약 파티 같은 거 안 하다며?”
손가락으로 가루를 찍어 하승희에게 들이밀었다. 하승희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게 마약이라는 법은 없잖아요.”
“여기에 밀가루나 소금 같은 게 있으면 더 이상하지 않나?”
“……하아. 이건 저도 모르는 일이에요.”
“좋은 친구들은 아닌 것 같네.”
“깊게 사귈 친구들은 아니죠.”
하승희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계약서? 설마 계약을 다시 하자고? 난 지금 계약이 마음에 드는데?”
“지금 우리 계약은 남들에게 보일 수 있는 계약이 아니잖아요. 나중에 일어날 수 있는 쓸데없는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선배와 제대로 된 계약을 해두고 싶어요.”
“…헤빌의 촉진제를 만들어낸 거야?”
“이제 곧 성과가 나올 거예요. 오리지널 헤빌의 촉진제에 비하면 효과가 떨어지는 게 흠이지만, 그마저도 엄청난 물건이라는 건 틀림없어요. 공식으로 발표하면 세상이 뒤집히겠죠.”
“HB-1는 헤빌의 촉진제의 이름이야?”
“헤빌의 촉진제의 복제품을 말하는 거죠. 자, 계약 내용을 봐요.”
“…항목이 좀 많은데. 요약 좀 해줘.”
“오리지널 헤빌의 촉진제를 저를 제외한 누군에게도 양도, 판매 등을 하지 않는다. 오리지널 헤빌의 촉진제와 HB-1의 권리를 제가 가지는 대신 3,000억을 지급한다. …그 외에는 비밀 유지 같은 거죠.”
“중요한 게 빠져 있는데.”
“…뭐가요?”
“너와 나의 관계 말이야. 이 계약서를 끝으로 우리 관계가 끝나는 건 아니지?”
내게는 돈보다는 하승희와의 관계가 더 중요했다.
“…선배의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 계약은 계속 이어갈 거예요. 선배라면 일이 틀어졌을 때 무슨 짓을 저지를지 잘 예측이 안 되니까요.”
“하하.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네. 그럼… 계약의 대가를 받아볼까.”
하승희에게 손을 뻗는다. 능숙하게 그녀의 상의를 잡고 벗기려고 할 때였다. 그녀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선배에게 부탁할 게 있어요.”
“부탁?”
“일주일 정도 저희 연구소의 경비를 서주세요. 아마 조만간 큰오빠가 HB-1의 자료를 빼앗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거예요.”
“…남매끼리 무력까지 동원해서 싸운다고?”
“저희 집안이 조금 특이해서요. 이런 특수한 경우는 처음 1번에 한해 무력 충돌이 허락돼요. 물론 형제들끼리 서로 죽이는 건 금지에요. 그 점은 사용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죠. 그러니 선배도 연구소에 침입한 적을 죽여선 안 돼요.”
“저희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생각해보세요.”
“너희 할아버지는 세진 그룹의 회장이고….”
하헌신.
세진 그룹의 회장이자, 괴신(怪神)이란 별명을 가진 S등급 헌터.
그가 세진 그룹을 세우기까지의 행보는 살벌하기로 유명했다. 범죄 조직과 손을 잡고 기업을 성장시켰다는 소문을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승희의 지금 반응을 보자면 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난 B급에 불과해. 확실한 A급 전력을 고용하는 편이 더 좋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큰오빠가 가진 돈이 어마어마하니 쉽게 매수될 거예요. 제 인맥도 큰오빠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고…. 제가 믿을 수 있는 헌터는 선배밖에 없어요.”
“상대는 A급이겠지?”
“…네.”
“죽이는 게 안 된다면… 팔다리는?”
“죽이지만 않으면 상관없어요. 솔직히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어요.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면… HB-1의 자료 일부를 없애주세요. 그래야 제게도 기회가 생기니까요.”
“네 부탁 들어줄게. 걱정하지 마.”
진세영과는 다른 A등급 헌터와 목숨 걱정 없이 싸울 수 있는 기회다. 내 입장에선 나쁘지 않다. 그리고 하승희가 잘되어야 나도 여러모로 혜택을 볼 수 있다.
내 대답은 들은 하승희는 스스로 옷을 벗었다. 그녀는 분홍색의 중심이 갈라진 속옷을 입고 있었다. 브래지어는 빨딱 선 분홍색 유두가 강조되고, 팬티는 일자로 다물린 보지가 훤히 드러났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승희는 가방에서 고양이 귀가 달린 헤어 밴드를 꺼내 썼다. 그녀는 얼굴을 잔뜩 붉히고는 입을 오물거리며 테이블 위에 올라가 고양이 자세를 취했다.
“냐, 냐아앙!”
“하하하하. 좋아, 최고로 귀여워, 승희야.”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내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
하승희와 약속한 대로 연구소의 경비를 서게 됐다.
연구소에는 내가 모르는 최신 설비들이 가득했다. 하승희의 말로는 연금술을 이용해 헤빌의 촉진제를 복제한 물품 HB-1을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이게… HB-1의 자료 일부가 들어 있는 USB.’
나는 손에 쥔 USB를 만지작거렸다. 만약, 습격자들을 이기지 못할 경우 이 USB를 없애서 자료를 파기하면 된다.
오늘로 경비를 선지 3일째다. 나는 지루한 눈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하승희가 퇴근하기 전에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나름 재밌었지만, 모두가 퇴근한 후에 혼자 연구소에 남아 있으니 무척 지루했다.
‘승희는 하준수가 사람을 보낼 거라고 100% 확신하고 있어. 승희가 내린 판단이니 맞겠지. 오려면 좀 빨리 왔으면 좋겠군.’
최근에 나온 신작 웹툰을 읽은 나는 혀를 찼다.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익숙한 그림체에 익숙한 스토리. 심지어 세계관까지 특색이 없었다. 어째 서브컬쳐 쪽은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하기는커녕 퇴보하는 느낌이 든다.
‘하다못해 여캐라도 꼴리게 뽑으면 모를까. 꼴리는 여캐는 하나도 없군.’
혀를 끌끌 차며 다른 웹툰을 찾는다.
치직.
형광등이 갑자기 맛이 갔다. 빛이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한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형광등을 노려봤다.
‘이건 또 갑자기 왜 이래?’
형광등에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점멸을 반복한다. 신경 거슬린다. 차라리 형광등을 빼버리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의자 위에 올라서서 형광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형광등을 만진 순간이었다. 점멸하던 형광등이 그대로 팍 꺼졌다.
“안녕?”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천장에서 뻗어 나온 두 개의 손이 내 목을 붙잡는다. 가느다란 여자의 손가락은 생각보다 힘이 셌다. 날카로운 손톱이 목에 파고든다. 피가 아래로 흐르는 게 느껴진다.
“성유진이지? 너에 대해선 많이 들었어. 새로운 S급 헌터가 될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이 많이 기대하고 있더라. 네가 부러워.”
“…….”
두 눈에 마나를 집중하고 천장을 바라봤다. 양팔은 천장에서 뻗어 나왔는데, 정작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내 기감에서 기척을 완벽히 속이고 있다.
‘이런 일의 전문가라는 거겠지.’
목을 조이는 양손의 팔목을 잡고 뇌전을 일으켰다. 파지지지지지직. 뇌전에 맞은 양팔이 유령처럼 사라진다. 나는 따끔거리는 목을 쓰다듬으며 의자 아래로 내려왔다.
“귀신 놀이는 관두고 모습을 드러내.”
“당당하네.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여자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기척은 느껴지지 않고, 목소리로 위치를 특정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확실한 건 이곳에 모습을 숨기고 있다는 것.
‘처음에 내 목을 잡았을 때… 목을 조여서 죽이려는 게 아니라 기절시키려고 했어. 날 죽이지 않으려는 건 그녀가 하준수가 보낸 사람이라는 뜻이지.’
그녀의 모습을 드러내게 할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숨을 쉬며 마나를 움직였다. 마나가 내 안에서 밖으로 움직이며 바람이 일었다.
파지직.
손끝에서 푸른 전류가 일어난다. 나는 팔을 휘둘러 전류를 사방에 흩뿌렸다.
영천류(影天流) 극기(極技) 산뢰(散雷).
파지직, 파직!
허공에 녹아든 전류가 마나를 짓누르고 흩트린다.
“뭐, 뭐야 이거?! 마나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잖아…!”
여자의 당황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몸을 돌렸다. 타이트한 옷을 입은 붉은 머리 외국인 여자가 눈알을 굴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얼굴 왼쪽에는 복잡한 문신이 새겨져 있다. 미녀… 라고 하기에는 너무 넓적한 얼굴이었다.
나는 바로 손을 뻗어 여자의 목을 잡으려고 했다. 여자는 내 손을 피해 벽을 박차고 허공을 달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착지했다. 그녀의 다리가 늪에 빠지듯 천천히 바닥 속으로 사라진다.
“몇 초 지나니 마나도 원래대로 돌아왔네. 너, 헌터 경력도 얼마 안 되면서 특이한 기술을 쓰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