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6화 〉 1116. 다크 문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방법은… 함정이군.’
루멜 숲에 들어온 첫날을 떠올린다.
그때 붙은 추적자들은 에어 트랩을 이용해 처리했다.
‘……함정은 포기한다. 내가 설치할 수 있는 함정은 한정되어 있어.’
부비트랩을 만드는 방법은 알고 있으나, 당장 내가 사용할 폭탄조차 없다.
마법인 에어 트랩은 마나 소모가 크다.
‘무엇보다 놈들이 에어 트랩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커.’
이 정도의 인원이 우리를 추적하는 것으로 보아 105 부대의 바그 소령과 레지스탕스가 손을 잡은 게 확실하다. 그럼 당연히 에어 트랩에 대한 정보도 공유했겠지.
날 쫓는 추적자는 15명. 그중 2명은 1급 마나 각성자.
그리고 나는 3급 배틀 메이지.
계산은 끝났다.
‘싸운다. 적들을 죽이고 사냥감에서 사냥꾼의 위치로 올라간다.’
나는 조용히 장비를 점검했다.
5분 정도가 지나자 놈들의 기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소총을 내게 겨누고 재빨리 흩어진다. 나무를 엄폐물 삼아 내게 전진해 온다.
첫날에 에어 트랩에 의해 전멸했던 105 부대와 다르게 신중했다.
“설마 여기에 가만히 있을 줄은 몰랐군. 온종일 뛰어다녀서 다리가 안 움직일 정도로 지쳤나?”
“지친 건 너희도 마찬가지 일 텐데?”
“우린 교대하면서 추적했거든. 그리고 우린 너희들과 달리 루멜 숲에 일찌감치 적응했지. 의미 없는 저항은 관두고 항복해라.”
“항복?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했군.”
“배틀 메이지라고 하더니 상당히 건방지군. 그 종잇장 같은 배리어를 믿고 계시나? 뭐해, 쏴! 마법사고 나발이고 숫자 앞에 아무 의미 없다는 걸 건방진 놈에게 알려주자고!”
사방에서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마나의 작은 폭발을 감지한 나는 바로 찰나를 사용했다. 세계가 느려진다.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이 보인다.
‘마탄이군. 수가 많아. 이 정도면 3급 배리어도 쉽게 박살 나겠군. 마나가 느껴지자마자 찰나를 사용하길 잘했군.’
그들은 실수를 저질렀다.
나를 확실히 죽이기 위해 10m 거리로 접근한 것이다.
‘내 염력의 사정거리는 15m. 내 거리 안에 들어선 거지.’
이대로 놈들의 목을 염력으로 비틀어버리는 건 힘들다.
사람을 비롯한 생물은 선천적으로 소량이나마 마법 저향력을 가진다. 염력은 대상의 정신력과 마법 저항력에 큰 영향을 받는 마법이다. 직접 대상의 몸을 염력으로 붙잡는 것보다 물체를 잡는 편이 효율이 좋다.
‘마탄도 좀 빡세긴 한데… 사람의 몸을 직접 잡는 것보단 낫지.’
염력을 사용해 날아오는 마탄들을 모조리 잡아내기로 마음 먹었다. 총 72발. 15명이 쏜 것 치곤 많았다.
‘배리어까지 생각해서 확실하게 날 죽일 생각이었군.’
마탄의 수가 너무 많다. 전부 조종하기엔 내 역량이 딸린다.
‘완전 제어는 포기하고 마탄의 방향만 바꾼다. 내 쪽으로만 안 오면 돼.’
마나 로드를 활성화하자 찰나가 해제됐다. 이 뜻은 하나다. 마나의 움직임도 찰나의 영향을 받는다. 즉, 마나 로드도 가속된다는 것이다. 술식은 이미 계산이 끝난 상황, 거칠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탄의 속도보다 염력의 발동이 빨랐다.
날아오던 마탄이 방향을 바꾸고 마구잡이로 날뛰기 시작했다. 붉은색, 파란색, 녹색, 노란색, 보라색 등의 형형색색의 궤적 수십 개가 허공에 그려진다. 일종의 예술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다만, 그 결과는 예술이라 하기엔 너무 참혹했다.
“끄아아아아아악!”
“내 팔!!!”
“도, 도와줘. 다리가 얼어붙었어!”
“아아아아아아아악!”
붉은색 마탄 하나가 내 옆을 지나갔다. 나무에 부딪히고 작은 폭발을 일으킨다. 작렬탄이다.
‘나무에 불이 붙었군. 바로 다른 추적자가 붙겠어.’
난무하는 마탄 속에서 살아남은 건 6명이다. 물론 살아남았다고 해서 멀쩡한 건 아니었다.
나는 마무리를 위해 라이플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마나를 아껴야 한다. 전투력을 잃은 놈들을 사살하는 일에 마법을 쓸 필요는 없다.
메마르게까지 느껴지는 총성이 여섯 번 울렸다.
다른 추적자가 붙기 전에 자리를 피했다.
‘마나 각성자가 껴있어서 긴장했는데… 일반인과 크게 다를 것 없군. 1급이라 그런가.’
•••
새벽 6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 나는 놈들의 임시 주둔지를 찾아내고, 그곳에 남아 있던 8명을 죽였다. 105부대가 맞았다. 주둔지를 구성한 텐트가 프리셀 왕국군의 것이었다.
나는 텐트를 불태우면서 보급품을 챙겼다. 가장 우선순위는 식량이고, 그다음은 총알이다. 안타깝게도 마탄은 별로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위엄이 서린 묵중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나는 흠칫 놀랐다. 아무리 내가 지쳐있다고 해도 내 감각을 뚫고 접근해올 줄 몰랐다. 목덜미에 식은땀이 흐른다. 배리어를 준비해두긴 했으나, 선제공격을 당하는 건 좋지 않았다.
손에 쥔 비상식량을 털어내고 몸을 뒤로 돌렸다.
장신의 중년 남자가 있었다. 검은색 군복 코트를 걸친 남자였다. 그의 기계 오른팔에선 기름 냄새가 났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로스 부대의 암표범도 아닌 애송이 하나에게 몰살당할 줄이야…. 애송이. 내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간단하지. 남길 유언을 생각해”
바그 소령을 향해 소총을 겨눴다.
“물론, 너 따위의 유언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
방아쇠를 꾸욱 당겼다.
총구가 불을 뿜는다. 탄피가 경쾌하게 아래로 떨어졌다. 작렬탄 12개, 전격탄 4개, 충격탄 5개. 마탄을 아끼지 않고 쏟아냈다.
바그 소령의 코트를 너덜너덜하게 만들기엔 충분한 화력이었다.
“애송이가 당돌하군.”
문제는 코트만 너덜너덜해졌을 뿐이란 거다. 마탄은 바그 소령의 인공 피부만 겨우 뜯어냈다. 찢어진 인공 피부 사이로 회색 강철이 엿보였다.
“…기계는 오른팔뿐만이 아니었나.”
“나이를 먹으니 육체가 예전 같지 않아서 말이야. 그동안 번 돈으로 개조했지. 마침 성능 테스트가 필요했는데…. 상부가 몰래 키우는 괴물이라면 상대로 나쁘지 않겠군.”
나는 품에서 마탄을 장전해둔 탄창을 꺼냈다. 바그 소령은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마탄이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닐 거다. 조금이라도 더 피해를 입혀야 한다.
바그 소령이 나를 향해 오른팔을 뻗었다. 그의 오른팔 일부가 푸른색으로 빛난다.
위이이잉.
“애송아, 그건 네가 가지고 놀기엔 위험한 물건이니 압수다.”
“……!!”
손에든 소총이 바그 소령의 손아귀로 날아간다. 총뿐만이 아니라. 보조 무기로 준비해둔 권총과 속성검까지 날아간다. 탄창과 나이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악인 점은 렉시에게 받은 아티팩트 팔찌까지 빼앗긴 점이다. 놈의 손아귀에는 내 물건을 포함해 금속 물품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바그 소령은 속성검과 팔찌가 아티팩트인 걸 알아보지 못했다.
“무기에 집착하지 않는 건 칭찬해주마. 보통 무기를 빼앗기지 않겠답시고 같이 딸려오기 마련이지. 근데 무기 없이 어떻게 싸울 거냐? 그 연약한 주먹으로?”
속성검에 마나를 연결했다. 마나 각성자가 아닌 바그 소령은 대놓고 마나를 움직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착각하고 있군. 내 무기는 마나다. 네가 인식도 못 하는 물질이지.”
마나를 각성하지 못한 자들은 마나 각성자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이 세계의 신비한 에너지인 마나를 조금만 다룰 줄 알아도 인생이 여러 가지로 편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군대 같은 특수한 직장은 마나 각성자란 이유 하나만으로 대우받으며 비각성자보다 빠르게 승진한다.
“그 여자에게서 도발하는 법도 배웠나?”
바그 소령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기계 주제에 표정이 생생하다.
철컥.
그의 왼팔 손목이 꺾이더니 총구가 튀어나왔다. 총구 끝에 하얀빛이 모이더니 나를 향해 쏘아졌다. 레이저다. 바로 옆으로 달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그 잘난 마나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 봐라!”
레이저가 또다시 쏘아진다. 이번에는 피하지 못했다. 3급 배리어에 부딪혀 상쇄되긴 했으나, 배리어에 구멍이 뚫렸다.
‘…한 번 더 맞으면 배리어 자체가 사라지겠군. 배리어를 다시 발동하면… 반격에 사용할 마나가 아슬아슬해진다.’
여기까지 오면서 적지 않은 마나를 사용했다.
‘방어에 몰두해선 살아남지 못해.’
레이저가 쏘아진다. 피하지 못했다. 배리어가 사라진다.
“하하! 드디어 껍질이 벗겨졌군!”
그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총구를 겨누었다. 총구 앞에 빛의 입자가 모여든다. 레이저가 발사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3초.
‘드디어 방심했군.’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놈의 정신이 레이저에 확 쏠렸다. 나를 정확히 맞히고 끝낼 생각이겠지.
‘워터.’
그의 오른손에 붙어 있던 속성검에서 물이 줄줄 흘렀다.
“?!”
바그 소령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기계라서 그런지 반응이 늦다.
‘스파크.’
속성이 전격으로 바뀐다. 방수는 기본으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전격은 다를 것이다.
“크으으으…! 애송이 놈이 잔재주를!”
그의 오른팔이 연신 파직 거리더니 작은 폭발음이 들리며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올라간다. 자력에 붙잡혔던 무기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오른팔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 확실하다.
“빌어먹을. 팔을 고칠 생각을 하니 정신이 까마득해지는군. 죽어라!”
‘찰나.’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1]
레이저를 보고 피했다. 몸을 움직이는 요령이 없어서 바닥에 넘어졌다. 힐끔 보니 바그 소령이 다시 레이저를 준비하고 있다.
남은 찰나의 사용 횟수는 딱 한 번.
‘한 번이면 충분하다.’
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느끼며 바그 소령을 향해 손을 뻗어 염력을 발동했다. 떨어진 무기 속에서 아티팩트 팔찌가 날아왔다. 바로 4급 배리어를 발동한다. 내 머리를 노리고 쏘아진 레이저가 배리어에 막혔다.
“쯧. 그 팔찌는 배리어 아티팩트였나.”
“4급 배리어다. 못해도 레이저 3발은 추가로 명중시켜야 할 거다. 뭐, 그럴 동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여유를 되찾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저는 날아오지 않았다.
이 세상에 레이저라는 뛰어난 광학병기가 있음에도 총탄을 주로 사용하는 건 레이저의 가성비가 최악이기 때문이다. 바그 소령의 경우 딱 봐도 배터리가 없어 보이니 레이저를 난사하지 못한다.
철컥.
그의 왼팔이 변한다. 총구가 넓어지고 카트리지가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직후, 총구가 불을 뿜었다. 마탄이 날아온다. 나는 나무 뒤로 질주했다. 완벽히 피하진 못했으나, 일부는 4급 배리어에 막혔다.
‘마탄의 질이 좋군. 4급 배리어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배리어가 사라지기 전에 결착을 내야 해.’
땅에 떨어진 속성검을 염력으로 움직였다. 속성검이 소리 없이 바그 소령의 목덜미를 노린다.
“두 번 당할 것 같으냐?”
그가 뒤돌려차기를 날렸다. 속성검이 저 멀리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평범한 인간의 각력이 아니다.
‘역시 하반신도 기계였군. 속성검은 염력 범위 밖으로 날아갔다.’
예상했던 일이다. 속성검은 그의 시선을 끌어준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
‘쇼크 웨이브.’
3급 마법 쇼크 웨이브를 사용한다. 손끝으로 쏘아낸 충격파가 바그 소령을 향해 날아갔다. 휘말린 나무가 부러지고, 흙더미가 위로 솟구친다.
콰아앙!
쇼크 웨이브에 정면으로 맞은 바그 소령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의 기계 육체는 쇼크 웨이브를 견뎠으나 표면에 금이 가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쇼크 웨이브를 한 방 더 먹여야 하나? 마나가 아슬아슬하다. 틈을 만들 수 있을까?’
쇼크 웨이브는 3급 마법 중에서 순수 물리 파괴력만큼은 손에 꼽을 정도지만, 마나 소모가 크다.
분노한 바그 소령이 마탄을 쏘아낸다. 나를 지켜주던 굵은 나무가 불에 타고, 얼어붙으며, 파편이 되어 쓰러진다. 마탄은 기어이 내 배리어에 닿았다. 배리어가 요동친다. 깜짝 놀란 내가 옆으로 달리려 할 때였다. 마탄이 날아오지 않았다.
철컥철컥철컥.
바그 소령의 왼팔에서 공허한 소리가 울렸다.
“젠장. 다 떨어졌나…. 뭐, 됐다. 네놈도 마법을 난사하지 못하는 걸 보니 마나에 여유가 없는 것 같군. 직접 베어 죽여주마.”
그의 왼팔에서 칼이 툭 튀어나왔다.
“나와 근접전을 하겠다고? 술래잡기에 자신 있나 보지?”
그에게 비아냥거렸다. 내가 미쳤다고 사이보그랑 근접전을 하나. 거리의 이점을 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놀이가 술래잡기다. 나는 술래를 좋아했다. 도망치는 녀석을 잡는 게 즐거웠거든.”
바그 소령의 등짝이 열리며 추진기가 나타난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바그 소령이 큰소리로 웃었다. 추진기가 불을 뿜으며, 막아서는 나무와 덩굴에 마구잡이로 부딪치면서 날아온다.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싸워야 해.’
추진기를 이용한 고속 전투. 접근전에 약한 내게는 영 좋은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염력.’
염력으로 내 몸을 조종한다. 절망적인 운동신경보다 마법이 100배는 더 믿음직하다. 날아오는 바그 소장을 옆으로 피한다. 의외로 피하기 쉽다.
‘놈도 추진기를 이용한 전투가 처음인 거군.’
정면에서 바그 소령이 쇄도한다. 그의 속도가 약간 느려졌다. 추진기의 연료가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대로 몇 번 버티면 도망칠 기회가 생기겠군. 하지만… 사이보그를 상대로 체력전을 할 자신은 없어. 여기서 승부를 본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0]
술식을 계산하며 추진기를 이용해 날아오는 바그 소령을 노려봤다.
그의 칼이 노리는 건 내 어깨였다. 급소를 바로 노리지 않는 것에서 좀 더 확실하게 전투를 끌고 가겠다는 그의 의도가 느껴진다. 내가 지금 뻗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란 걸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피하는 대신 앞으로 파고들었다. 칼날이 어깨를 스쳤다. 위험한 수준은 아니다.
‘반동은 염력으로 버틴다…!’
바그 소령의 명치에 손바닥을 뻗었다. 닿았다. 동시에 내 몸이 뒤로 밀려났다. 나무에 등이 부딪혔다.
“라이트닝 그랩!!”
등에 느껴지는 격통을 원동력 삼아 씹어뱉듯이 영창을 외쳤다.
아스트랄에서 뻗어 나온 마나가 마나 로드를 질주하며 준비한 술식으로 변해 마법이 되었다.
파지지지지지지직!
수백 개의 뇌전이 손바닥을 통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바그 소령의 기계 육체를 내달린다. 뇌전의 빛으로 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이 애송이가아아아!!”
바그 소령이 왼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 칼날이 내게 내려오는 일은 없었다. 뇌전이 그의 기계 몸을 망가뜨린 것이다. 그의 표정도 굳어졌다.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왼쪽 눈알뿐이다.
“바그 소령. 내가 이겼다.”
마나는 이미 바닥이었으나, 깡통을 마무리하는데 마나는 필요 없다.
옆에 있는 적당한 나뭇가지를 꺾었다.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그의 왼쪽 눈에 나뭇가지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소름 끼치는 감각이 손을 통해 느껴졌다.
‘뇌를 기계로 바꾸지 못하는 게 사이보그의 한계지.’
뇌를 기계로 바꾸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다.
승리한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바그 소령을 뒤로했다. 힐끗 뒤로 돌아봤다. 바그 소령의 기계 몸은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육체다.
‘부럽다는 생각은 안 드는군.’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나가 회복되는 대로 저 대단한 육체를 잘게 부술 생각이다. 저 몸에 카메라 같은 게 달려 있고, 그 데이터가 멀쩡하다면 일이 귀찮아지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
정오.
피로한 몸을 끌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렉시가 먼저 와있었다. 그녀의 몰골도 정상은 아니었다. 오른팔은 부러져있고, 분홍색 단발머리는 살짝 그을린 상태다.
“레지스탕스의 본거지를 발견해서 털어버렸어. 목표였던 올코르 중위는 팔다리가 잘린 채로 살아있더라.”
“죽였습니까?”
“여유는 있었는데 귀찮아서.”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였어도 같은 선택을 내렸을 것이다. 그런 귀찮은 짐 덩어리를 데리고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렉시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에 기대어졌다.
“아. 섹스하고 싶다.”
“…그게 지금 할 말입니까.”
“본심을 말했을 뿐이야. 냇가로 가서 씻고 한숨 자자. 그리고 일어나면… 알지?”
나는 바그 소령을 죽였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부대로 복귀하는 시간은 길어지겠지만, 렉시와 함께하는 타잔 생활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