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113화 (1,113/1,497)

〈 1113화 〉 1113. 다크 문

오밤중에 눈을 떴다.

조용히 손목시계를 힐끔거렸다. 오전 1시 22분.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옆자리에 잠든 렉시 교관을 살폈다. 잠버릇이 좋지 않은 그녀는 이미 반쯤 옷을 헐벗고 있었다. 양손은 머리 위로 올린 상태고 셔츠는 말아 올라갔으며, 바지는 허벅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면적 작은 검은색 팬티에 눈길을 빼앗겼다. 몇 시간 전에 보았던 렉시 교관의 여성기가 떠오른다.

‘분홍색의…. 아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부터 중요한 시간이다. 나는 사일런스 마법으로 발소리를 없애고 폭포 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알람 마법은 폭포 바깥쪽에 설치되어 있어 걸릴 일은 없다.

폭포를 본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많이 어두웠다. 두 눈에 마나를 집중해도 보기 힘들 정도다. 특히 냇가의 안쪽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라이트.’

마법을 사용했다. 내 앞에 나타난 빛의 구체가 주위를 밝힌다. 의념으로 빛의 구체를 제어한다. 빛의 구체가 위쪽으로 천천히 올라간다. 날벌레가 기다렸다는 듯이 빛의 구체로 달려들었다.

날벌레의 그림자가 종횡무진 날뛰는 것을 본 나는 파이어 마법으로 날벌레를 태워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시간만 충분했으면 그랬을 거야.’

냇가 중심이 아닌 근처를 돌아다녔다. 시선을 아래로 처박고 ‘다크 문’ 게임 속 기억을 떠올리며 특별한 바위를 찾는다. 마나 감지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니 육안으로 찾아야 했다.

‘찾았다.’

물에 반쯤 잠겨 있는 바위다. 표면을 잘 보면 옅은 문양이 새겨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룬 문자.

고대에 자주 사용했던 마법 체계 중 하나다. 현대는 술식의 체계가 잘 정립되어 있기에 효율이 떨어지는 룬 문자는 마법계에서 사라지는 추세다. 단, 트레저 헌터나, 고고학 쪽에서는 여전히 핫하다.

‘게임에선 캐릭터가 가까이 다가가면 자동으로 활성화 버튼이 떠올랐는데.’

여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활성화도 내가 직접 해야 한다. 나는 바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조심히 마나를 흘려보내자 룬 문자가 은은하게 빛났다.

‘이게 있다는 건 게임 내의 기믹도 그대로라는 거겠지.’

이 세상에 잠들어 있는 비밀들. 나는 그것들을 알고 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우월감을 느끼면서 작업을 이어나갔다.

‘두 번째 돌은 반대편 쪽에 있었지.’

어렵지 않게 찾아 활성화했다. 3번째는 나무 아래에 있는 작은 바위다.

‘마지막 4번째는 폭포 뒤에 있지.’

폭포로 다가갔다. 옷이 젖었다. 그러려니 했다. 나중에 마법으로 말리면 된다.

나는 폭포 뒤의 바위를 손으로 더듬거렸다. 바위 한쪽에 움푹 파인 룬 문자의 형태가 손바닥을 통해 느껴진다.

다른 세 개의 룬 문자에 그랬던 것처럼 마나를 흘려 보냈다. 룬 문자가 은은하게 빛난다.

쿠구구구구궁.

폭포 뒤의 바위가 자동문처럼 양옆으로 갈라졌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나는 라이트 마법을 해제하고 내 손바닥 위에 다시 빛의 구체를 만들었다. 빛의 구체가 안쪽을 비춘다. 아래쪽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살짝 긴장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바닥에 내려왔다. 사방이 막혀 있고 움푹 파인 바닥이 보인다. 나는 바닥을 빤히 쳐다봤다. 세모, 네모, 동그라미, 마름모. 총 4가지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것도 게임대로군.’

보자마자 정답이 떠올랐다. 지구의 기억은 흐릿한 것에 비해 ‘다크 문’ 게임과 관련된 정보는 아주 선명하다.

‘지구의 나는 머리를 쓰는 걸 귀찮아했지. 나는 퍼즐을 깨려고 ‘다크 문’을 한 게 아니니까. 게임을 진행하다 퍼즐이 나오면 바로 인터넷에 검색했지.’

그게 내 플레이 방식이었다.

‘여기 답은 세모 두 개, 네모 두 개.’

오른발을 들어 세모를 두 번 밟은 뒤 네모를 두 번 밟았다.

쿠구구구궁.

조금 떨어진 곳에 아래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나는 두 번 더 퍼즐을 풀고 마지막 공동에 발을 내디뎠다.

‘마지막 기믹은 홰 6개에 불을 붙이면 끝이지.’

나는 주위를 돌아다니며 고정된 홰 5개에 불을 붙였다. 마지막 여섯 번째 홰는 숨겨져 있다. 당연히 그 위치를 알고 있다.

목을 위로 꺾어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의 중심에 동그란 문양이 그려져 있다. 저게 여섯 번째 홰다.

‘파이어.’

불꽃이 천장 중심에 닿았다.

우우우우우우웅.

공간 내의 마나가 요동친다. 나는 마나의 움직임을 보며 숨을 삼켰다. 회오리치는 마나의 흐름 하나, 하나가 정교하게 설정되어 있었다.

벽과 천장이 마나를 동력으로 움직인다. 마나는 이윽고 천장의 중심에 모여들었다. 천장 중심에 구멍이 생기고 물건 두 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한 손에 쥐기 편해 보이는 숏 소드와 붉은색 두건이다.

‘주어지는 보상도 똑같군.’

만족스럽게 웃었다.

숏 소드는 4급 아티팩트인 속성검이다. 검에 원하는 속성을 부여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전투적으로 큰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다만, 속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로 사용할 데가 많았다.

‘기믹을 풀 때 속성력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서 크게 도움이 되지.’

물론 게임 속 이야기였다. 1급에 불과하지만, 모든 속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내게는 크게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내가 노린 건 숏 소드가 아니라 빨간 두건 쪽이다.

6급 아티팩트인 늑대의 빨간 두건.

이 아티팩트의 효과는 심플하다. 트랜스패런시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트랜스패런시 마법의 효과는 캐릭터의 정보를 속인다.’

예를 들면 레벨 50의 마법사 캐릭터가 있다고 하자. 트랜스패런시 마법을 사용하면 레벨과 직업, 그리고 능력치까지 속일 수 있다.

‘조건이 있는 던전에 들어갈 때 트랜스패런시 마법으로 캐릭터 정보를 속여서 들어가는 게 가능하지.’

직업 제한, 레벨 제한, 능력치 제한이 있는 공간을 트랜스패런시 마법으로 전부 통과 가능한 것이다. 물론 트랜스패런시 마법이 통하지 않는 특수 제한 구역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캐릭터 정보와는 다른 제한 조건이 있을 뿐이다.

다만, 착각해선 안 되는 건 트랜스패런시 마법은 단지 정보를 속일 뿐이다. 실제로 직업과 능력치가 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트랜스패런시 마법으로 내 경지를 숨길 수 있다.’

나는 빨간 두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기부터가 중요했다. 이런 물건을 가지고 다닐 수는 없었다. 나는 군인이며 노예다. 허락받지 않은 재산은 가지고 다닐 수 없고, 부대로 가지고 돌아가면 바로 소지품 검사를 받는다.

‘소지품 검사 때 이걸 가지고 있으면 아티팩트란 걸 100% 들킨다.’

거기다 억만금을 줘도 쉽게 구할 수 없는 6급 아티팩트다.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빨간 두건에 마나를 흘리며 분석을 시작한다.

‘아티팩트에 담긴 트랜스패런시 마법을 익힌다. 내 재능이라면 가능할 거다.’

아니, 가능해야 했다.

빨간 두건 내부에 새겨진 술식을 살펴본다. 복잡한 술식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입가를 비틀었다.

‘기존에 알고 있는 마법 술식과는 다르군. 인식과 감각을 비트는 환술 계열인가?’

더 자세히 분석하기 위해선 빨간 두건의 술식을 분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깊숙한 곳에 있는 술식까지 샅샅이 살펴볼 수 있다.

‘…그런 짓을 하면 아티팩트를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기회는 한 번. 실패는 끝장이다.’

한 번 실패하면 끝장이다. 나는 흔들리는 각오를 느끼며, 재차 각오를 되새겼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내 목표를 위해선 트랜스패런시 마법이 필요하다. 나는 나를, 내 재능을 믿는다.’

정신을 집중했다.

내 마나가 빨간 두건의 깊숙한 곳까지 침입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보안 술식이 없어서 방해받지 않고 날 것 그대로 술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기기기기긱, 기기긱.

물론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겹쳐져 있는 술식 구조를 분해하며 의미 하나, 하나를 이해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아티팩트가 망가지기 시작한다.

‘술식의 전개 방식은… 빙글빙글 돌고 있군. 서클 모양을 한 번 비튼… 뫼비우스의 띠 모양에 가깝군.’

이런 전개 방식이면 술식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맴돌게 된다.

‘…빠져나갈 필요는 없지. 속여야 하는 건 자신의 정보니까. 그렇군. 뫼비우스의 띠 모양으로 전개해야 마법을 유지하기 편해지는군.’

나는 이마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트랜스패런시 마법 술식을 탐했다.

마무리했을 때는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발치에는 조각난 빨간 두건이 떨어져 있었다. 어떤 마법적인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티팩트는 쓰레기가 되었다.

‘트랜스패런시. 정확히 몇 급인지 정하기엔 애매하군.’

나는 트랜스패런시 마법 술식 일부를 내게 맞게 개조했다. 속이는 게 아니라 숨기는 것에 집중했다. 그 덕분에 마법의 난이도가 확 내려갔다.

‘그럼에도 원활하게 사용하기 위해선 3급 수준은 되어야 한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멈춰두었던 아스트랄의 성장을 촉구한다.

아스트랄의 퀄리티가 올라가며 확장된다. 거기서 끝마치지 않고 아스트랄이 세계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드넓은 세상이 나라는 존재를 인정했다. 아니, 내가 이 세상을 인정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몸속에 뿌린 내린 25개의 마나 로드의 존재가 느껴진다. 마나의 흐름이 시원시원했다.

‘트랜스패런시.’

내 실력과 경지를 숨기기 위한 마법을 사용한다. 아스트랄의 영향력이 사라지고, 7개의 마나 로드가 모습을 감춘다. 겉으로 봤을 때는 2급으로 보일 것이다.

‘완벽하다. 마법을 펼친 나조차도 속을 정도야.’

단점은 있었다.

내가 트랜스패런시로 숨긴 힘을 사용하는 순간, 트랜스패런시의 효과가 풀린다는 것이다.

‘어차피 남들 앞에서 3급 마법을 쓸 생각은 없으니 큰 단점은 아니야.’

목적을 달성했다.

나는 속성검을 챙기고 계단 쪽으로 걸었다.

‘속성검은 가지고 가봤자 부대에 뺏길 테니 이곳에 숨겨둬야겠군.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가지러 오면 돼.’

위로 올라온 나는 라이트 마법으로 주위를 살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워터 슬라임이 철퍽철퍽 몸을 튕기며 나를 향해 다가온다.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속성검을 가져온 것도 이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다.

속성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원하는 속성은 얼음.

검신에 하얀 냉기가 흐른다.

나는 워터 슬라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획.

검은 허공을 갈랐다. 워터 슬라임이 폴짝 뛰어서 내 공격을 피한 것이다. 내 표정이 짜증으로 일그러진다.

워터 슬라임이 내 머리에 달려들었다. 준비해둔 배리어가 워터 슬라임를 튕겨 냈다. 다른 워터 슬라임들이 폴짝폴짝 뛰며 거리를 좁혀온다.

‘시발. 슬라임 따위가 내 공격을 피해? 내 검술이 그렇게나 형편없나?’

몸을 쓰는 행위에 재능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슬라임까지 내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피하니 의욕이 확 떨어진다. 검술을 배우겠다는 생각이 저 멀리 사라졌다.

나는 속성검에 내 마나가 이어져 있다는 걸 확인하고 검자루에서 손을 놓았다. 검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떴다.

3급 무속성 마법, 염력.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까딱였다. 속성검이 워터 슬라임을 향해 날아가 꽂혔다. 속성검의 냉기가 워터 슬라임에 스며들었다. 쩌정. 순식간에 얼어붙은 워터 슬라임이 부서져 바닥에 떨어졌다.

‘손으로 검을 휘두를 자신이 없으면, 이렇게 마법으로 검을 휘두르면 돼. 훨씬 편하군. 다만, 염력은 다른 마법에 비해 정신력 효율이 최악이라 오래 유지… 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은 보통 정신력 2, 마나 8의 비율로 발동된다. 그러나 3급 마법인 염력은 정신력 9, 마나 1의 비율이다. 덕분에 마나 소모는 적지만, 정신력이 금방 바닥나서 마법사들이 기피 하는 마법이다.

‘마법의 숙련도가 오르면 소모되는 정신력이 적어지긴 하지만, 염력은 다르지.’

염력은 술식이 간단하다. 애초에 술식 보다는 의지가 중요한 마법이니까. 말 그대로 염력(念力)이다.

‘근데 난 왜 염력을 사용했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거지? 염력이 내 적성에 맞는 건가. 그러고 보니 다른 마법을 사용할 때도 정신력이 부족했던 것 같진 않군.’

워터 슬라임이 다가온다. 생각은 뒤로 하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염력이 담긴 속성검이 허공을 날아다니며 워터 슬라임을 베어낸다.

‘확실히 검자루를 잡고 직접 휘두를 때보다 배는 편하군.’

속성검의 속성을 화(火)로 바꿨다. 검신에 불꽃이 일어난다. 검을 허공에 바퀴처럼 회전시켰다. 불붙은 바퀴가 회전하며 불똥이 튀었다.

‘검을 쥐고 있을 때는 불가능한 움직임도 염력으로는 가능하지.’

회전하는 속성검이 워터 슬라임을 자비 없이 갈아버린다. 수중기가 자욱했다.

‘이번엔 바람이다.’

뿌연 수중기가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유린당한다. 바람의 칼날이 워터 슬라임을 썰었다. 워터 슬라임의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물은 별로고 전기로 해볼까.’

파지지직.

검신을 타고 시퍼런 전류가 흐른다. 속성검은 허공에 전기 궤적을 남기며 남은 워터 슬라임을 모조리 처리했다. 죽은 워터 슬라임은 물웅덩이가 되어 바닥을 적셨다.

속성검을 바닥에 꽂았다. 전류가 물웅덩이를 타고 바닥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지막은 일종의 쇼였다.

“염력이랑 속성검…. 쓸만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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