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2화 〉 1102. 다크 문
이번 첫 임무를 통해 50명 정도가 죽었다. 제법 많은 인원이 죽었지만, 군대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간단한 장례식조차 치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해야 할 일을 했다.
아이들도 그러려니 했다. 몇몇은 친한 친구가 죽어 슬퍼했지만, 대부분은 아무 말 없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내무실이 변경되었다. 본래 11호 내무실에서 지냈는데, 사람이 줄어들면서 다시 새롭게 편성된 것이다.
11호의 내무실장이었던 205호는 첫 임무에서 죽었다. 마른 몸에 성격 좋은 녀석. 몇 번 대화를 나눠봐서 그런지 가끔 머릿속에 떠올랐다. 뭐, 내 인간관계가 좁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1호 내무실에 도착한 나는 익숙한 얼굴을 몇몇 발견했다.
내 옆자리였던 212호와 썩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던 건장한 체격의 202호, 그리고 유명한 31호.
‘나를 포함해 총 12명. 무작위로 배정한 건 아니고…. 31호와 자주 붙어 다니는 여자들이 있는 걸로 보아 성적과 인간관계 등을 고려했나.’
남자 넷. 여자 여덟. 여자 비율이 높았다. 31호를 배려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 자리는 정해져 있었다. 오른쪽에는 212호, 왼쪽에는 202호. 맞은편 침상에는 31호 자리였다.
“병신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꼴을 보니 무사했군.”
202호가 비아냥거렸다.
오랜만에 듣는 그의 비아냥거림은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202호는 얼굴을 확 구기더니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2급으로 올랐다며?”
212호는 웃으며 나를 반겼다. 그녀의 속내가 표정과 일치하는지는 판단 내릴 수 없다. 물론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내 기준으로 겉과 속이 일치하는 쪽이 더 이상하다.
“운이 좋았어. 근데 내무실장은 누구냐? 벌써 정했어?”
주위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31호에게 향했다. 너무 당연한 걸 질문한 감이 있었다. 내무실장. 지구에서는 반장과 비슷한 위치다. 보잘것없지만 약간의 권력과 특혜가 주어지는 위치다.
“211호.”
31호가 나를 불렀다. 나를 포함해 모두가 31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목소리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네가 내무실장을 맡아줬으면 좋겠어.”
솔직히 말하면 거절하고 싶었다. 내가 내무실장을 맡는 걸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거의 없었다. 사소한 특혜는 말 그대로 사소하다. 이리저리 따지면 시간적 손해밖에 없다. 그러나 31호의 말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알겠어. 내가 할게.”
거절해서 얻을 혹시 모를 불이익보다는 그냥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31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표지를 보니 3급 마법서였다.
이후, 비누스 교관이 나를 불렀다.
“211호. 내무실장이 된 걸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나는 쓴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부대에서 내무실마저 감시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확인하게 되니 새삼 노예 신세를 깨닫는다.
“네가 1 분대장이다.”
“분대장이요?”
“이번에 내무실을 편성하며 분대 단위로 운용하기로 했다. 내무실장인 네가 분대장이지.”
31호의 말을 거절했어야 했다. 뒤늦게 후회했다.
비누스 교관은 내게 분대장을 뜻하는 견장을 주었다.
“한가지 당부하지. 31호를 성의껏 모셔라. 너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넌 똑똑하니 잘 할 거라 믿는다. 아 참, 음료나 하나 마시고 가라. 분대장이 된 기념으로 내가 쏘지.”
비누스는 캔 콜라를 탁자 위에 올렸다.
게임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도 콜라나 사이다 같은 음료가 있다는 걸. 허나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나는 지구에 대한 향수를 느끼며 콜라 캔을 손에 쥐었다. 미지근했다. 실망하려는 찰나 비누스가 말했다.
“콜라는 차갑게 먹는 게 진리다. 그리고 마법사는 그 진리를 실천할 수 있지. 2급인 너라면 조절할 수 있을 거다.”
“…시도해보겠습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콜라의 유혹은 굉장했다. 나는 어느 정도 타협하기로 했다.
“아이스.”
내 손에서 냉기가 휘몰아쳤다. 콜라의 절반이 얼어붙었다. 일부러 냉기 조절을 실패한 것처럼 꾸몄다.
“처음 치고는 준수하군.”
“…….”
역시 이것도 시험의 일종이었나?
나는 콜라를 들어 입안에 넣었다. 짜릿했다. 온몸의 세포가 하나, 하나 전부 일어나는 기분이다. 어쩌면 이 세계의 콜라는 지구의 것보다 훨씬 맛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순간의 쾌락을 즐긴 나는 콜라 캔을 내렸다. 얼어붙은 절반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사소한 보상. 의외로 마음에 들지도 모르겠군.’
비누스 교관은 내게 고개를 까딱였다.
“나가 봐라. 내가 한 말은 잊지 말고.”
“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분대장으로서 저녁 점호를 끝내고 얇은 매트리스 위에 몸을 눕혔다.
빌어먹게도 편안함을 느꼈다.
‘……아까 먹은 콜라의 카페인 때문인지 잠이 안 오는군.’
그리고 지구 생각이 났다.
기분이 불쾌해졌다. 지구의 기억이 모호했기 때문이다. 친구나 가족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약간 잠을 설치며 잠들었다.
“……!!”
눈을 부릅뜨며 각성했다. 천장의 형광등은 점등되어 있었다. 벽에 걸린 전자시계가 현재 시간이 새벽 4시 7분임을 알려주었다.
꿈을 꿨다.
미녀 메이드들이 나오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메이드들과 몸을 섞었다. 눈을 뜨자마자 꿈에 대한 기억은 사라졌지만, 성직자가 보면 기겁할 정도로 음탕한 꿈이란 건 알겠다. 많은 메이드 중에서 한 명의 메이드를 특별하게 여겼던 것 같기도 하다.
‘…시발.’
사타구니가 축축했다.
어떤 상태일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뻔하다.
‘설마 몽정을 하게 될 줄이야.’
나는 주위의 눈치를 보며 화장실로 향했다.
•••
“살아 돌아왔네. 축하해.”
렉시 교관이 내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여전히 그녀는 제복 상의를 풀어 헤치고 풍만한 가슴 일부를 드러낸 상태였다.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며 괜히 그녀가 의식되었다.
“…감사합니다. 렉시 교관님이 주신 아티팩트 덕분에 살았습니다.”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녀가 준 아티팩트의 4급 배리어가 아니었다면, 나는 십중팔구 네로스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네가 살아남은 건 네가 잘해서야. 그보다 감상을 듣고 싶은데. 어땠어.”
“…어떤 감상 말입니까?”
“저격수로서 첫 임무를 경험한 감상.”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솔직하게 말해.”
“저격수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네로스는 내 저격을 쉽게 알아차리고, 총알을 반사했다. 그때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골로 갔을 것이다.
렉시는 내 말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나도 그랬거든. 자, 오늘은 네게 한 단계 위를 보여줄게.”
렉시는 내게 라이플을 쥐여주고는 총알을 꺼냈다. 평범한 총알이 아니었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녹색 등등 형형색색의 총알들이다. 표면에 술식이 적혀 있고, 재질도 구리가 아닌 다른 금속이다.
“…마탄.”
“맞아. 마법이 부여된 총알이지. 평범한 총알이 먹히지 않는다면, 특별한 총알을 쓰면 돼.”
“마탄은 비싼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목숨값보다는 싸잖아. 그리고 여긴 군대야. 어느 정도는 지원해줘. 뭐, 난 싸제를 더 선호하지만.”
그녀가 킬킬 웃었다.
“자세히 봐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엄지와 검지로 마탄을 집고 유심히 살펴봤다. 총알의 표면에 새겨진 술식의 깊이는 일정했다. 사람이 새긴게 아니라 기계를 이용해 새긴 듯하다.
‘술식 자체는 간단하군. 화염계에 폭발을 섞었나. 착탄하는 순간 폭발하는 메커니즘인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릿속으로 술식을 시뮬레이션해 본 결과 이 술식만으로는 위력이 부족했다.
‘작은 총알에 새길 수 있는 술식은 한계가 있는 게 당연하지만…. 이 상태면 도저히 활용하기 힘들 정도야. 탄피 안쪽에도 새긴 건가?’
몇 번 마탄을 살피던 나는 이게 마법 술식만 들어간 게 아님을 알았다.
‘마탄의 핵심은 연금술이다. 마법 술식은 보조하는 수준이야.’
직접 마탄을 만든다는 생각을 바로 버렸다. 연금술을 익힐 기회도, 시간도 없었다.
‘나 같은 경우는 차라리 총알에 마법을 거는 쪽이 더 빠르겠지.’
물론 그러러면 특수한 재질의 총알이 필수였다.
“한 번 사용해봐. 쏴보면 마음에 들 거야.”
렉시의 말에 한 번 쏴보기로 했다. 마탄을 장전하고 500M 떨어진 표적을 조준하고 발사했다. 마탄은 허공에 붉은 궤적을 남기며 날아가 표적에 명중했다.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크기가 작을 뿐이지 위력은 사람의 머리통을 터트리고도 남을 정도다. 이윽고 시뻘건 불길이 표적에 달라붙었다.
“작렬탄. 꽤 값이 나가긴 하는데 성능은 보는 대로야. 배리어를 부술 때 효과적이야.”
그녀는 이어서 다른 총알들을 건넸다. 적을 얼려 둔화시키는 냉기탄, 적을 감전시키거나 기계를 무력화시킬 때 쓰는 전격탄, 명중한 대상을 중독시키는 독탄, 관통력을 극대화한 철갑마탄 등등. 생각했던 것보다 마탄의 종류가 다양했다.
‘상황과 대상에 따라 골라 쓸 수 있는 장점이 있군.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고.’
그러나 세 가지의 단점이 보였다. 하나는 역시 만만치 않은 가격. 그리고 마탄은 소모품이라는 것과 위력이 내 생각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것.
‘내 입장에서는 공격 마법을 익히는 편이 더 낫다.’
저격에 대해 흥미가 팍 식는 느낌을 받았다. 렉시 교관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 사실을 숨기고 사격 훈련을 받았다. 렉시 교관에겐 받은 것도 있으니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할 생각이다.
렉시는 내게 마탄을 쏘게 해서 저격수의 이점을 알려줄 생각이겠지만, 현실은 그녀의 계획과는 반대로 마법에 대한 열망이 더욱 타올랐다.
“잘하고 있어. 넌 최고의 저격수가 될 거야. 나중에는 총알에 마법을 인챈트하는 방법을 알려줄게.”
“…네. 감사합니다.”
•••
“두 번째 임무다. 오늘 밤, 주제도 모르고 부대 근처에 자리 잡은 고블린 무리를 소탕한다.”
아침 점호 시간. 비누스 교관이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는 얼굴을 굳혔다.
고블린은 몬스터 중에서도 약해빠진 놈들이다. 총만 있으면 일반인도 쉽게 죽일 수 있다. 기억 속의 211호도 훈련을 명목으로 고블린과 싸워 이겼다. 고블린은 명백하게 쉬운 상대다.
그게 오늘 밤만 아니면 말이다.
“오늘 밤은 다크 문이 뜨는 날이다.”
‘다크 문’은 게임의 메인 타이틀이며, 게임의 중요한 설정 중 하나다.
다크 문은 검은색 달이다. 100일을 주기로 하늘에 뜨는 검은색 달.
다크 문이 뜰 때마다 몬스터는 난폭해지고 강해진다. 평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유령이 도시를 돌아다니고, 괴물 계열 인자를 가진 자들은 낮은 확률로 변이를 일으킨다. 대기 중의 마나가 사나워지기도 한다. 또한 검은 달을 통해 어비스의 괴물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이 세계 사람들은 다크 문이 뜨는 날이면 집에 틀어박히고 바깥 행동을 최대한 자제한다. 죽고 싶지 않으니 당연했고, 그게 이 세계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다크 문에도 밖으로 나간다.
리스크가 높아지는 만큼 얻을 수 있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도 다크 문은 특수한 행동을 할 때의 기본 조건이 된다. 가령 특수한 던전이 열리거나, 특수한 아이템을 얻을 기회가 생기거나.
“훈련하기 좋은 날이지.”
비누스 교관은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나를 포함해 이곳에 있는 누구도 공감하지 못 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