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0화 〉 1100. 다크 문
“빌어먹을. 벌써 3급이라고? 적합률이 못해도 70%는 되는 놈이었군. 211호, 14호. 살아 있는 아군을 데리고 후퇴해라. 내가 놈을 처리하겠다.”
벨하가 교관의 명령이 떨어졌다. 뒤로 빠져 상황을 관망하려는 계획은 바로 먼지가 되었다.
‘명령 불복종은 심각하니… 어쩔 수 없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폐허 도시의 격전지에 도착했다.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72호, 105호는 죽었고, 54호는 오른팔과 왼쪽 다리가 찢겼다. 앞으로 몇 분이면 죽을 것 같았다. 그나마 14호가 멀쩡했다. 몸은 피투성이였으나 팔다리가 멀쩡했다.
나는 14호에게 달려가 함께 54호를 부축했다.
네로스는 벨하가 교관이 상대하고 있었다.
“211호…! 이대로면 54호가 죽을 거야!”
“…응급 처치는 이미 끝냈잖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54호를 후방으로 데리고 가는 것뿐이야. 나머지는 54호가 버티느냐에 달렸지.”
14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보니 54호와 친분이 깊었나 보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뭐라 지껄이면 괜히 14호의 원망만 살 수 있었다.
후방으로 이동하면서 네로스와 벨하가 교관의 전투를 힐끔거렸다. 네로스는 3급으로 추정되고 벨하가는 4급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벨하가 교관이 압도적으로 승리할 것이지만, 현실은 상식적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놀랍게도 네로스와 벨하가 교관은 동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벨하가 교관이 주먹을 휘두른다. 네로스 또한 피하지 않고 전격을 품은 주먹을 휘둘렀다. 밀려나는 건 네로스가 아닌 벨하가였다.
“하필이면 뇌룡 계열인가. 오늘따라 운이 억세게 안 좋군.”
“하하하. 이게 용의 힘이다!”
네로스는 웃고 있었다.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는 게 꼭 마약 중독자 같다.
“힘에 취했나? 뭐, 그럴 만도 하지. 한순간에 강력한 힘을 손에 넣었으니 말이야.”
속성 차이였다.
네로스는 전격계의 뇌룡이고, 벨하가는 물속성의 배틀 메이지였다. 네로스가 유리한 상성이다.
“워터월.”
벨하가의 발아래에서 물기둥이 치솟았다. 벨하가는 물기둥을 타고 위로 솟구쳤다. 그의 오른 주먹에 냉기가 맺힌다. 벨하가는 체중을 온전히 담아 네로스를 향해 주먹을 후려쳤다.
“아이스 쇼크.”
쩌저저정!
머리를 제외한 네로스의 몸이 얼어붙는다. 네로스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얼어붙은 자신의 몸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나는 용이다. 겨우 이딴 걸로 날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이제 시작이다. 버블룸.”
물방울이 네로스의 몸을 감쌌다. 벨하가는 그의 바로 앞에서 주먹을 뒤로 당겼다.
“내 물주먹은 좀 많이 아플 거다.”
벨하가가 주먹을 내지르기 일보 직전, 네로스의 몸을 붙잡던 얼음과 물방울이 부서진다. 그 파편이 벨하가의 몸에 박혔다. 벨하가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네로스의 오른쪽 어깨가 부풀어 오르더니 터졌다. 어깨째로 오른팔을 잃은 것이다.
“끄아아아아악!”
네로스가 비명을 터트렸다. 벨하가가 웃는다. 그는 승리를 확신하며 마무리 지을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 주먹이 앞으로 향하는 일은 없었다. 네로스의 날카롭고 길쭉한 꼬리가 벨하가의 몸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방금까지 없었던 꼬리가 생겼다고? 아무리 그래도 변이가 너무 빠르잖아. 적합률이 높은 게 아니라… 폭주였나….”
벨하가의 몸이 쓰러진다. 네로스는 벨하가가 곱게 죽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오른팔의 복수를 하듯이 남은 팔과 꼬리로 벨하가의 몸을 찢어발겼다.
‘망했군.’
벨하가가 너무 빨리 죽었다. 못해도 5분 이상의 시간을 끌어줘야 하는데 아직 1분도 안 지났다. 나와 14호, 54호는 네로스로부터 100m도 벗어나지 못했다.
“지원 요청을… 지원을 요청해야 해!”
14호가 무전기를 두들긴다. 그러나 무전기는 먹통이다. 보이진 않지만, 주변에 마나와 자기력이 자욱하게 깔려 있는 게 느껴진다. 그 원인은 네로스겠지.
‘무전을 하려면 적어도 이 공간을 벗어나야 한다. 문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거지.’
네로스의 시선은 이미 우리에게 향했다. 놈의 다리가 땅을 박찼다. 쿵.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놈이 순식간에 우리 뒤에 따라붙었다.
“…211호. 54호를 부탁해.”
14호는 허벅지에 걸어둔 단검을 손에 들고 네로스를 향해 돌격했다. 말릴 새도 없었다. 네로스가 14호의 움직임을 보며 피식 비웃었다. 이미 인간의 형태를 벗어난 파충류의 왼손이 전류와 함께 움직인다. 14호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허공을 데구르르 구르며 바닥에 퍽 떨어졌다.
1초도 버티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개죽음.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너 혼자 남았구나. 네놈이 내 부하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놈이지? 다른 놈들처럼 쉽게 죽이지는 않겠다.”
‘혼자라고?’
나는 뒤늦게 54호가 이미 죽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체를 부축할 이유는 없었다. 그대로 손에 힘을 풀었다. 54호의 시체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내 미래도 저렇게 되겠지.’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러나 나는 쉽게 죽어주는 것보다 끝까지 발버둥 치기로 했다.
권총을 꽉 쥐었다. 놈의 몸은 아직 아이스 쇼크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머리 아래의 몸이 새파랗게 굳어있는 상태다.
‘아이스 쇼크에도 죽지 않는 몸이니… 노려야 할 곳은 눈이다. 눈은 단련할 수 없으니 총알을 박아 넣을 수 있겠지.’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다. 상대는 1km 저격도 알아차리고 반사하는 괴물이니까.
저벅.
네로스가 날 유린하기 위해 걸어온다.
“홀.”
땅이 훅 꺼지고 네로스의 오른발이 구덩이로 들어간다. 네로스의 몸이 휘청인다. 나는 놈의 눈을 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탕탕!
권총의 슬라이드가 움직이며 탄환을 뱉어냈다. 네로스가 팔뚝으로 눈을 보호했다. 그의 팔뚝에 맞은 총알이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크흐흐. 네놈이 내 눈을 주시할 때부터 알아봤다. 나쁘지 않았지만, 어설프군.”
나는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급소인 목, 심장, 고간을 노렸다. 소용없었다.
철컥철컥.
총알이 다 떨어졌다. 네로스가 다가와 주먹을 휘두른다. 렉시에게 받은 팔찌가 빛을 발하며 4급 배리어를 발동한다. 카앙! 배리어가 놈의 주먹을 막아냈다.
“배리어인가? 재밌군. 어디까지 버티나 한 번 시험해볼까.”
“…….”
나는 배리어가 버티는 동안 방법을 떠올렸다.
‘…방법은 있다. 조건을 만족해. 딱 한 가지만 빼고.’
부족한 건 시간이었다.
술식을 짜낼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시간을 벌 방법이 없다. 마지막 수단인 4급 배리어는 앞으로 30초 이내에 깨질 것이다.
‘시간이. 시간이 필요해…!’
간절하게 바라는 순간이었다.
신이 내게 축복이라도 내린 것일까. 시간이 느려졌다. 배리어를 두들기는 네로스의 주먹이 느릿해지고, 충격을 받아 흔들리며 요동치는 배리어가 육안으로 보인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눈앞에 알림창이 떴다. 게임 시스템창과 비슷했다.
‘찰나?’
무심코 손을 움직이자 다시 원래의 시간 속으로 돌아왔다. 손이 무척 빠른 속도로 움직인 것도 파악했다.
‘일시적인 사고 가속과 육체 가속 능력인가. 이 시점에서 또 다른 이능을 각성하게 될 줄이야.’
입가에 웃음이 나왔다.
네로스의 행동이 잠시 멈췄다. 그는 도마뱀과 같은 세로 동공의 눈으로 날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포로 미쳐버렸나?”
“…큭. 조건은 갖춰졌다. 아무래도 신은 날 편애하는 모양이군.”
“확실히 미쳐버렸군.”
찰나를 발동했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5]
네로스의 주먹이 다시 느려졌다.
나는 느려진 세계 속에서 아스트랄을 개방했다. 억지로 잡아두었던 각성을 받아들인다. 아스트랄이 확장되고 선명해진다. 추가로 7개의 마나 로드가 내 몸 속을 뻗어나갔다.
이것으로 난 2급에 올랐고, 총 12개의 마나 로드를 가졌다. 마나 로드에 마나를 일으키자 찰나가 끝나고 본래의 시간을 되찾았다.
‘마나 로드를 사용하니 찰나가 끝나는군. 아스트랄은 정신에 속해 있어서 영향을 받지 않는 건가.’
대충 이해했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4]
찰나를 발동한다. 늘어진 시간 속에서 술식을 계산한다.
복잡하다. 그리고 계산할 수 있는 술식도 한계가 있다. 마법적 지식 자체가 얕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만 있으면 충분하다. 핵심이 되는 술식은 이능으로 대처한다.
‘주위에 깔린 자기력, 놈이 사방에 흩뿌린 마나. 조건은 충분하다.’
벨하가가 말한대로 네로스는 폭주 상태였다. 자기가 사방에 뿌린 마나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스트랄을 한껏 개방해 방치된 번개의 마나를 제어했다. 내 재능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해냈다. 네로스는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술식을 완성했다. 12개의 마나 로드가 가동하며 술식을 자아낸다. 동시에 뇌전을 일으키는 이능을 발휘했다. 이능과 술식이 한데 아우러지며 하나의 마법을 자아낸다.
우우우웅.
대기가 진동한다. 머리카락이 삐죽 솟으며 심상치 않은 미래를 예측하게 한다.
여유롭던 네로스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 마법진이 있었다. 주위의 번개가 마법진의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다.
‘마법진은 화려해 보이지만, 그를 이루는 술식 자체는 2급에 불과해. 진짜 핵심은 뇌전을 일으키는 이능이지.’
저 멍청한 용인 놈이 사방에 번개의 마나를 흩뿌려 준 덕분에 출력 문제는 해결되었다.
‘남은 건 시간. 그것도 4급 배리어가 해결해주고 있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네로스는 여유를 버리고 하나 남은 손에 마나를 집중했다. 그의 손에서 전류가 살벌하게 번뜩였다.
4급 배리어가 부서지고, 내 몸은 충격파에 휘말려 뒤로 날아갔다. 입에서 피를 토했지만, 네로스에게서 떨어졌다는 점에서 오히려 좋았다.
“완성이다.”
“웃기지 마라. 너 같은 놈에게 당할 것 같으냐!!”
네로스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 그의 판단은 옳다. 마법사가 죽으면 발동 중인 마법은 그대로 사라지는 게 상식이니까.
그리고 상식을 하나 더 말하자면, 번개의 속도는 소리를 초월한다.
“썬더 볼트.”
압축된 번개가 지상에 내려꽂혔다.
썬더 볼트에 직격당한 네로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가 있던 장소에는 직격 3M에 달하는 크레이터와 타다 남은 놈의 꼬리 일부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5급 전격계 마법 썬더 볼트.
지금 내 수준으로는 절대 사용 불가능한 마법을 특수한 상황과 이능(異能)을 이용해 사용했다. 물론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마나가 바닥난 건 두말할 것도 없고 마나 로드 12개 중 절반이 사용 불능 상태에 빠졌다.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살아남았다.’
무엇보다 나는 내 마법적 재능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능을 이용했다고 해도 5급 마법을 2급 마법사가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리고 그 기적을 일으켜낸 것은 다름 아닌 내 재능이다.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마법밖에 없어.’
피로가 확 몰려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몰려드는 수마에 의식이 점점 희미해진다.
‘잠들더라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그놈들이 알아서 날 수거해갈 테니까.’
깨어나면 지긋지긋한 막사가 날 반길 것이다. 그 점이 무척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