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5화 〉 1095. 다크 문
“뭐하나. 집중해라. 마나 역류는 뒤처리가 중요하다. 깔끔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마나 로드에 후유증이 남을 거다.”
의사로 추정되는 남자가 짜증스레 말했다.
나는 혼란스러운 정신을 뒤로했다. 그의 말에서 틀린 부분은 없다. 게임 속에서도 나온 설정이다.
‘마나 역류는 제때 치료해야 나중에 고생을 안 한다. 급한 건 내 기억이 아니라 지금 내 몸뚱이다.’
몇 년 전에 배웠던 마나 호흡법이 떠오른다.
‘그 호흡법으로는 안 돼. 몸속의 마나 칠할 이상을 잃게 될 거야.’
이건 작은 기연이기도 했다. 칠할을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이런 기연은 훗날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머릿속이 번뜩인다. 흩어져있던 조각이 저절로 맞춰지듯이 마나 호흡법에 관한 지식이 떠오른다.
‘호흡법을 살짝 개조하면 손실율을 3할까지 낮출 수 있을 것 같은데….’
마나 호흡법인 레이탈식(Raytal式)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다. 비록 2급에 불과한 마나 호흡법이라고 하더라도 섣불리 건드렸다간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우습게도 게임 속에 들어오자마자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것들을 외면하기 힘들어. 답을 알려주고 있는데 무시하라고?’
고민을 거듭할수록 지식에 대한 확신이 생겨나고 있었다. 나는 이 지식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법사의 정신이라 불리는 아스트랄을 개방했다. 내 몸속의 마나 로드가 선명해진다. 열차가 레일을 질주하듯 마나 로드를 통해 마나가 흐른다. 아스트랄과 이어진 마나 로드는 총 3개. 1급 마법사의 평균이다.
‘부족해. 마나 로드 3개로 감당하기엔 마나가 너무 많아.’
나는 고민하다가 아스트랄의 확장을 시도했다. 잘못되면 바로 그만둘 생각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내 아스트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2급으로 올라갈 정도로 아스트랄을 확장하는 건 지금으로선 불가능하군.’
내 아스트랄은 현재 비어있었다. 게임으로 말하자면 경험치가 없다는 뜻이다. 마법 술식이든, 전투 경험이든 아스트랄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다. 물론 육체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다.
아스트랄로부터 마나 로드 2개가 뻗어나갔다. 총 5개의 마나 로드는 모두 내 뜻에 따랐다. 배안에 가득차 있던 마나가 정리되며 순환하기 시작한다. 순환로를 지켜봤다. 본래의 순환로에서 약간 바꿨기에 문제가 일어나면 바로 조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없었다. 5개의 마나 로드는 안정적이었다.
감았던 눈을 떴다.
의사가 무감정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마나가 안정됐군. 문제없어 보이니 돌아가라.”
“예. 감사합니다.”
진심이 조금도 담기지 않은 인사를 했다. 의사의 심기를 건드려봤자 좋을 것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의사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가 신발을 신고 의무실 밖으로 나갔다.
문밖은 복도였다.
회색의 콘크리트 벽과 바닥이 길게 이어졌다.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오른쪽으로 향했다. 걸으면서 기억을 정리했다.
‘나는 성유진이다. 대한민국의 F급 헌터. 나이는 21살. 여자친구는 없음. 헌터로서의 내 능력은 없어. 능력 없이 신체 능력만 각성한 특이 케이스지.’
기억을 더듬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학교와 고등학교의 이름은 기억나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부모의 얼굴도 모르겠다. 기억은 마치 구멍이 숭숭 난 그물 같은 상태다.
반대로 211호의 기억과 다크 문 게임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다.
‘나는 노예 출신의 부모에게서 태어났지. 자연스레 노예가 되었고. 부모가 죽고 주인은 날 프리셀 왕국에 팔았지. 10살까지는 부족함 없이 자랐지. 음식, 옷, 잠자리 모두 왕국에서 제공했으니까. 문제는 그 목적이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 때문이라는 거지.’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
1급 마나 친화력을 가진 아이들을 은밀히 모아 배틀 메이지로 육성하는 프리셀 왕국의 계획이다.
말이 육성이지 실제로는 실험에 가깝다. 배틀 메이지가 되려면 마나 친화력 3급 이상의 재능이 필요하니까.
프로젝트의 실체는 1급 마나 친화력을 강제로 3급 마나 친화력으로 올리는 실험이다.
‘그리고 이 실험은 이미 성공했지. 문제는 성공률이 5% 정도라는 거지.’
프리셀 왕국은 프로젝트 결과에 만족하며 계속 이어나간다. 1급 마나 친화력 재능을 가진 아이 100명 중 5명이 배틀 메이지가 되면 그것만으로도 이득이니까.
‘211호. 내게 주어진 이름이지만… 이딴 이름을 인정할 것 같나. 내 이름은 유진이다.’
기억의 정리는 거의 끝나갔다. 211호의 인생 중 대단한 기억은 없었다.
‘내 자아는 성유진이야. 211호의 기억은 뭔가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단 말이지.’
복도에 걸린 유리 창문이 보였다. 쇠창살 너머에 있는 유리에는 성유진의 얼굴이 비치고 있다. 검은색 머리, 검은색 눈. 조금 어리다는 것을 제외하면 나, 성유진이 확실했다.
나는 창문을 뒤로하고 기억 속의 내무실로 향했다.
11호 내무실.
무거워 보이는 문을 열자 대한민국의 옛날 군대 내무실과 흡사한 곳이 나왔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곳은 프리셀 왕국군이었으니까.
내무실 내에는 내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17명이 있었다. 나까지 합쳐 총 18명. 남녀 혼성이었다. 8명이 여자, 10명이 남자다. 이 세계는 인권은 개판인 주제에 의외로 성별은 평등한 편이다.
‘모두 있군.’
2명은 2달 전에 1대1 전투에서 고블린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일을 하고 있다. 친한 아이들끼리 시시덕거리거나,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211호. 마나 호흡법 수련 중에 마나 역류로 기절했다며? 몸 상태는 괜찮아?”
마른 몸의 소년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205호. 11호 내무실장이자 분대장이다. 분대장으로서 책임감이 높았다. 기억 속에서는 오지랖이 넓은 게 좀 흠이지만 좋은 놈이었다.
“어,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면 처분됐겠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관물대에 기대어 앉아 있는 건장한 체격의 소년이 말했다. 202호. 왼쪽 눈이 사시다. 205호와는 반대로 성격이 영 좋지 않았다.
“뭐, 너였다면 마나 역류로 처분됐겠지. 넌 마나를 잘 못 다루잖냐.”
“…지금 해보자는 거냐?”
“해보든가.”
202호를 비웃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여기서 사고를 일으키면 짜증 나는 고문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걸 알고 있기에 205호도 우릴 말리지 않았다.
“쯧. 나중에 두고 보자.”
202호는 혀를 차며 말하고는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여 주고는 내 자리로 갔다. 옆에 벽이 있는 쪽이라 제법 마음에 든다.
“어떻게 된 거야?”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말을 걸었다. 갈색 단발 머리의 여자였다. 212호. 평범한 여자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몸을 훑었다가 그녀의 눈에 시선을 고정했다.
“뭐가?”
“마나 역류. 177호는 마나 역류로 내장이 터져 죽었잖아.”
기억이 난다. 3주 전쯤에 몸에 투입된 마나 진액을 버티지 못하고 마나 역류로 죽은 놈이었다.
“177호와 나는 경우가 달라. 나는 마나 호흡법을 수련하는 도중에 마나 역류가 발생했을 뿐이야.”
“마나가 역류했다는 사실은 똑같잖아.”
“상황이 다르지. 난 너도 알다시피 부진하잖아. 1급 마법사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역류한 마나가 많지 않았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어.”
진짜 운이 좋았다.
마나 역류를 통해 내 몸 안에 가득찬 마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의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돌팔이 의사가 함부로 날 건드렸다간 상황이 안 좋아질 수 있었다.
“정말 운이 전부야? 뭔가… 특별한 비술같은 건 없고?”
212호의 눈이 반짝인다. 진짜 목적은 이것이었나보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노예 주제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31호는 비전 마법을 가지고 있다던데?”
“…그건 걔가 특이한 거지. 걘 귀족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잖아.”
31호.
귀족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다. 배틀 프로젝트의 관리자들도 31호를 대할 때 어려운 기색을 내비쳤다. 여러모로 특별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정말 운이 좋았던 거야? 무사해서 다행이네. 축하해.”
212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입가는 웃고 있는데 눈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목소리도 꽤 가식적이다.
‘나라면 저렇게 연기하지 않았을 건데.’
그녀에 대해선 신경끄기로 하고 복잡한 머릿속에 집중했다. 게임 다크 문(Dark Moon)에 관한 정보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10분이 지났을 때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5분 뒤에 저녁 점호를 시작한다.”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노예이고, 군인이며, 실험체였다. 비슷한 단어 3개가 나를 치장하니 괜히 서글퍼졌다.
익숙하게 느껴진 저녁 점호가 끝나고 침상에 몸을 눕혔다. 눈을 감았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주위가 조용해지니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을 깨닫는다.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눈을 뜨면 현실로 돌아가나?’
그럴 리는 없겠지.
나는 몇 번이나 지금 이곳이 꿈이 아니란 걸 확인했다.
왜 게임 속으로 들어온 건지는 몰라도,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 세상이 좆같긴 해도 못 살아갈 정도는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다크 문에 대한 정보는 선명하게 떠오른다. 내 기억 속에 플레이어가 없다는 것을 알겠어.’
다크 문은 플레이어가 시작 지점을 선택할 수 있다. 이곳에 없다는 건 플레이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거나,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전자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플레이어일 가능성이 있으니까.
‘다크 문의 플레이어는 스탯과 스킬 트리를 찍으며 자유롭게 육성할 수 있었지. 그렇다면 혹시….’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상태창.’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태창.”
입 밖으로 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킨 나는 쓸데없는 사고는 없애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군대에 말뚝 박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탈출한다. 나는 자유를 원해. 평생 노예로 살고 싶지 않아.’
나는 오른쪽 팔뚝을 만졌다.
삼각형 7개가 합쳐져 있는 기이한 문장이 그려져 있다.
프리셀 왕국의 상급 노예 인장이다.
이 인장을 통해 노예를 손쉽게 죽일 수 있고, 도망친 노예를 추적할 수도 있다.
‘내 목숨이 타인의 손에 들려 있다니…. 끔찍하군.’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이 인장부터 없애야 한다.
머릿속에서 여러 방법이 떠오른다. 3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5개의 방법이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었나?’
지금, 이 순간에도 6번째 방법이 떠오른다. 성공 가능성을 따지는 건 나중이다. 일단 방법을 떠올리고 성공 가능성이 낮은 것들을 소거해가며 계획을 세운다.
나는 자정이 넘어서야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