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5화 〉 1085. 신의 아틀란티스
“페데리카! 그 새끼들은 죽여버려!!”
거대 로봇과 정면에서 싸우고 있는 남자가 외쳤다.
“미안. 내 남자친구가 좀 다혈질이라서. 오해하지 마. 난 대화로 해결하고 싶어.”
바람이 불자 그녀의 풍성한 붉은 머리카락이 파도치듯 흔들렸다.
“…….”
강명진이 신중하게 행동했다. 조용히 주위를 살피며 전력을 가늠한다. 보아하니 그는 페데리카와 가시 장미 레기온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눈동자를 굴려 상황을 살폈다. 5M 크기에 달하는 거대 로봇은 살벌한 무기가 달린 기계 촉수와 미사일을 날리며 가시 장미 레기온의 일원을 상대한다. 여자들이 많은 건 둘째치고 공략은 안정적이었다.
‘저 남자가 잘 버텨주고 있기 때문이군.’
2M에 달하는 거구의 남자다. 근육질 몸에 구릿빛 피부다. 경갑을 입은 그는 맨손으로 거대 로봇에 대적하고 있다. 몸놀림을 보니 격투가가 확실했다.
‘고유 특성이 뭔지 몰라도 중갑 없이도 탱커의 역할을 확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평범한 놈은 아니군.’
다른 이들이 별 볼 일 없다는 건 아니다. 모두 제 역할을 하고 있다. 거대 몬스터와 싸우는 일이 능숙해 보였다.
“저희가 한발 늦었군요. 인정하겠습니다.”
강명진이 말했다. 여기서 가시 장미 레기온과 싸우는 건 손해가 크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나는 강명진에게 동의한다. 여섯 명에 불과한 우리에 비해 상대의 수는 3배 이상 많았다. 최악의 경우 사람을 일부 매복 시켜뒀을 가능성도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물러나네? 고마워.”
페데리카가 눈웃음을 지었다.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시선이 팔렸다. 엘레나나 주서현 정도는 아니어도 좀처럼 볼 수 없는 미녀이긴 했다.
페데리카를 따먹을 방법을 생각해봤다. 가장 간단한 건 강간이다. 레기온끼리 전쟁을 벌이게 되면… 강간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대신, 주위에 있는 기계 몬스터들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흐음. 이 구역은 우리 가시 장미 레기온의 구역이야. 이 구역의 것들은 모두 우리 레기온의 재산이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구역을 나가줘. 그럼 이후에도 우리와 너희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야.”
“이 구역의 지배자는 아직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지배자가 되는 건 조만간이야. 보렴, 우리 레기온이 저 크기만 한 깡통을 잘 요리하고 있잖니. 길어도 2시간이면 끝날 거야.”
“흐음. 제가 볼때는 다섯 시간 이상은 걸릴 것 같군요. 가시 장미 레기온이 정식으로 지배권을 얻기 전까지 이 구역은 무주공산입니다. 가시 장미 레기온이 먼저 도착해 보스 몬스터를 공략한다는 건 인정하죠. 그러나 인정하는 건 그뿐입니다. 가시 장미 레기온이 실패할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이 구역에서 이득을 얻어야겠습니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럴 자격이 있습니까? 페데리카 씨는 아직 구역의 지배자가 아닙니다.”
“…흐음. 마음대로 해. 단, 우리가 저 깡통을 쓰러뜨리고 지배권을 얻었을 때는 나가줘야겠어.”
“물론입니다. 그때는 이 구역의 지배자가 가시 장미 레기온이란 걸 인정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레기온보다 빠르게 성장해온 에이플랜 레기온이니….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
페데리카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아한 동작이지만, 그 뜻은 명백했다. 여기서 꺼지라는 뜻이었다.
우리는 강명진을 필두로 그곳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페데리카!! 저놈들을 죽이라고!!”
“미안. 전투 중인 산타누는 굉장히 예민해. 진심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니 이해해줘.”
“이해합니다.”
우리는 그대로 물러났다. 페데리카의 시선이 마지막까지 달라붙었다.
“강명진. 넌 가시 장미 레기온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위험한 레기온이야? 이 구역을 포기할 정도로?”
내가 강명진에게 물었다. 가시 장미 레기온은 원작과 설정집에도 나오지 않았던 레기온이다. 그들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다.
“우리 레기온 근처에 위치한 중형 규모의 레기온 중 하나다. 당장 세력의 힘만 따지면 가시 장미 레기온이 우리보다 더 위에 있다. 특히 가시 장미 레기온의 마스터인 페데리카는 보통의 인물이 아니다. 불의 여왕이라 불리며 악명이 자자한 여자다.”
“……진짜 이대로 이 구역을 포기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미심쩍잖아. 놈들이 너를 미행하고 기회를 낚아챈 거야. 정황상 그럴 수밖에 없어.”
“그렇겠지. 허나 감정적으로 대해선 안 될 일이다. 전면전에서 불리한 건 우리다. 저들은 이미 레기온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구역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취하고 빠르게 벗어나야 한다.”
강명진이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틀린 판단을 내린적이 거의 없는 강명진이었기에 나를 비롯한 레기온 일원들은 모두 그를 신뢰했다.
“잡몹을 죽여 이득을 취하기엔 시간이 부족할 텐데? 아까 볼 때 가시 장미 레기온이 거대 로봇을 압도하고 있었잖아. 공략도 곧 끝날 거야.”
“지금 봤을 때는 그렇겠지. 그들을 살펴보니 전격 계열 능력자가 없더군. 공략은 못해도 3시간은 걸릴 거다. 우리는 3시간 동안 최대한의 이득을 얻고 이 구역을 빠져나간다. 가시 장미 레기온과의 일은 그다음이다.”
우리는 기계 공원을 뛰어다니며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얻었다.
정신없이 움직이니 3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제 2,910 구역, 기계 공원에 새로운 지배자가 탄생했습니다.」
“돌아가자.”
알림창을 확인한 강명진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 우리는 품에서 공간 이동 주문서를 꺼내 찢었다. 순식간에 제 2,910 구역을 벗어났다.
•••
가시 장미 레기온과 갈등을 빚은 날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에이플랜 레기온은 제 2,910 구역을 포기했다. 항의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레기온 전쟁이 벌어지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았다.
최근 내 머릿속에는 페데리카의 얼굴이 가끔씩 떠올랐다. 장미처럼 붉은 머리카락에 요염하게 미소 짓는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자지가 답답해진다. 어떻게 자빠뜨릴 방법이 없을까 고민한다.
‘광대 가면 쓰고 쳐들어가서 시비 걸까?’
강간도 마구잡이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상대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다. 중형 규모의 레기온 마스터다. 함부로 쳐들어갔다가 역으로 내가 당할 수도 있었다.
오후에 레기온 마스터인 강명진이 나를 비롯한 레기온 간부들을 회의실로 호출했다.
“오늘 오전에 마을에서 다툼이 일어났다.”
강명진이 말하는 마을이란 지금 에이플랜 레기온이 위치한 제 601 구역, 붉은 안개 성을 말한다. 성밖에는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꾸준히 발전을 계속하여 지금에 와서는 도시에 가까운 크기다.
“주민들 간의 다툼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 않습니까.”
지영빈이 말했다. 마을이 커지고 사람이 많아지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난다. 주민들 간의 다툼은 흔한 일이었다. 강명진은 따로 경찰 세력을 만들어 뒀다. 우리가 회의할 정도의 안건은 아니었다.
“외부인이 엮여 있다.”
“…평범한 외부인은 아닌 모양이군요.”
“970구역, 장미의 도시에서 온 상인과 용병들이다. 가격을 제대로 쳐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행인과 어깨가 부딪혔다는 이유로 다툼이 일어났지. 지금은 구치소에 일시적으로 구금 중이다.”
회의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970구역, 장미의 도시는 가시 장미 레기온의 본거지가 있는 곳이다. 즉, 이번 일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가시 장미 레기온이 접근해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명분 쌓기군요.”
유서희의 남동생이자, 에이플랜 레기온의 마법사인 유인하가 이어 말했다.
“흔한 수법이죠. 사소한 곳에서부터 마찰을 일으켜 작은 명분을 쌓고, 쌓아 전쟁까지 이어지게 하는 방식이죠. 꽤 유명한 수법입니다.”
명분을 쌓는 이유는 평판 때문이었다. 평판이 최악이 되면 주위 레기온에게 명분을 주는 꼴이 된다. 최악의 경우 레기온 연합이 탄생하여 집중 공격당할 수도 있다.
“가시 장미 레기온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거야?”
주서현이 확인하듯 물었다.
“아직 확신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전에 있었던 가시 장미 레기온과의 마찰을 생각하면… 거의 확신에 가깝다.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전쟁.
무거운 단어가 나왔다. 모두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허나 누구도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의견을 꺼내지 않았다.
레기온의 힘이 강해질수록 레기온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전쟁을 피하고자 한다면 지금까지 피땀 흘리며 쌓아온 것들을 내줘야 한다.
“이대로 손 놓고 적들이 움직이는 대로 끌려다닐 거야?”
내가 물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내버려 두면 우리를 완전히 무시하겠지. 하지만 겨우 이런 일로 나서기에도 뭐하지. 가시 장미 레기온이 본인의 이름을 걸고 나선 것도 아니니.”
강명진의 말대로였다. 표면적으로는 970 구역 출신의 상인과 용병이 문제를 일으켰을 뿐이다. 에이플랜 레기온이 직접 나서서 가시 장미 레기온을 규탄하기엔 명분이 약했다.
“일단은 전쟁을 준비하며 가시 장미 레기온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본다.”
행정보급관인 김만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 준비… 피할 수 없는 일이란 건 잘 압니다만. 예산이 많이 깨지겠군요. 그리고 이런 규모의 전쟁은 처음인지라 뭘 준비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마스터, 뭐를 준비해야 합니까?”
“전쟁물자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니까. 레기온 간의 전쟁을 오래 끌 생각도 없다. 중요한 건 병력이다. 용병 시장에 대해 알아봐라.”
회의는 전쟁에 관한 것으로 이어졌다.
•••
나는 따로 가시 장미 레기온에 관해 조사했다. 마침 내게는 흑주맹이라는 쓸만한 손발이 있었다.
리 메이를 만난 나는 그녀와 함께 침대 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가시 장미 레기온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가시 장미 레기온. 꽤 유명한 곳이에요.”
“유명해? 난 처음 들어보는데?”
“저희처럼 뒷 세계에서 유명하다는 뜻이에요. 레기온 마스터인 페데리카는 바체스 패밀리 출신이에요.”
“바체스 패밀리?”
“2년 전에 있었던 마피아 세력이었죠. 당시에는 저희 흑주맹과 비슷한 힘을 가졌는데… 내부 분열로 인해 망해버렸죠. 페데리카는 바체스 패밀리의 간부였어요.”
“대단한 출신의 여자였군. 근데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야. 지금이지. 가시 장미 레기온에 약점 같은 건 없어?”
“음지에서 가게를 몇 개 운영하고 있지만… 그게 문제가 될 수준은 아니에요.”
이곳은 현대와 달랐다.
심각한 범죄가 아니라면 대충 넘어간다.
그리고 구역의 지배자가 대놓고 자신의 구역에서 범죄를 일으키는 거라면 마땅히 제재할 방법이 없다.
“페데리카의 남자친구는?”
“산타누 말이군요? 그도 바체스 패밀리 출신의 간부예요. 간부 중에서도 말단이었지만요.”
“그들의 직업이나, 계약 신좌, 고유 특성은?”
“전부는 아니지만 몇 가지는 알아냈어요.”
리 메이가 알아낸 정보를 모두 내게 알려줬다. 나는 가시 장미 레기온의 정보를 모두 머릿속에 쑤셔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