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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079화 (1,079/1,497)

〈 1079화 〉 1079. 신의 아틀란티스

바위에 기대어 앉아 있던 엘레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검은 기둥에서 외눈박이 거인이 걸어 나왔다. 발로르다. 발로르가 아틀란티스에 강림한 것이다.

위신(僞神)은 아니다. 고작 위신 따위로 강림할 것이었다면 이런 성가신 방법을 쓰지도 않았고, 헬텐의 보스인 사무엘은 이번 일에 관심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발로르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걸로 보였다. 시스템의 제재가 그에게 가해지는 것이다.

“발로르가 본신으로서 강림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대체 왜?”

신의 입장에서 시스템의 제재와 신멸의 위기를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아틀란티스는 신들의 놀이판에 불과하다. 절대적인 자리를 구태여 벗어 던질 필요가 없다.

“엘레나. 신과 인간의 차이가 뭔지 알아?”

사무엘이 물었다. 발로르에게 시선을 집중시킨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들떠 있었다.

“차이점이야 지나칠 정도로 많지.”

“힘이야.”

“권능을 말하는 건가?”

“그것도 포함해서 신이 가진 절대적인 힘이라 할 수 있겠지. 그 외의 다른 것은 인간이랑 별반 다를 것 없어. 힘과 개성이 지나치게 강할 뿐이지.”

“……그 힘이 절대적이기에 신이지.”

엘레나는 사무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증거는 이 세계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아틀란티스라는 거대한 놀이판을 만든 거지.”

“그리고 우리는 그 놀이판에서 움직이는 신들의 장난감이지. …구역질이 나는군.”

“동감이야. 엘레나. 수많은 신들이 전부 똑같이 놀이판을 즐길 거라 생각해?”

“그 신들이? 그럴 리가.”

“맞아. 어떤 신은 관심을 전혀 가지지 않고, 어떤 신은 일부러 게임을 망치고 싶어 하고, 어떤 신은 자기 재산까지 올인해버리지.”

“…발로르는 세 번째 유형인가?”

“아니. 네 번째 유형. 올인 했다가 전부 잃고 자기 목숨까지 게임판에 걸어버린 거야. 도박 중독은 신에게도 해당되는 단어야.”

이번 아틀란티스는 8회째다. 앞서 7번의 아틀란티스가 있었고, 이미 끝났다. 발로르는 지난 아틀란티스에서 큰 손해를 본 모양이다.

“발로르의 목적이 아틀란티스에 걸린 판돈을 쓸어 담는 것에 있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보스는 나서지 않는 건가? 신을 죽일 기회다.”

“모처럼의 기회이니 이대로 끝내긴 아쉽지. 위험해지기 전까지 관찰할 거야. 중요한 건 발로르가 아니라,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신들이니까. 그리고 아직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

“…신경 쓰이는 것?”

“다른 신이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커. 발로르 혼자서 진행하기엔 일이 크니까. 문제는 그 신이 누구일지 모르겠다는 거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건 뻔하니… 단서라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흠. 나는 직접 나설 거다.”

“마음대로 해. 이미 확인해야 할 건 대부분 확인했으니 말리지 않아.”

엘레나는 조용히 앉아 상황을 주시하는 사무엘과 화이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꼴을 보아하니 정말로 나서지 않을 모양이다.

위험해지기 전까지 관찰한다? 그 기준이 어디까지인지 엘레나는 알 수 없었다.

•••

나는 거인을 올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외눈박이 신. 사안의 발로르. 신이 이 세계에 강림했다.

상황은 최악이다. 라고 판단을 내리려는 찰나, 발로르의 거대한 몸이 휘청인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시스템의 제재가 제대로 먹혀들었군. 그리고 이제 막 강림해서 그런지 아직 아틀란티스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했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양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30M 이상 떨어져 있는 발로르를 향해 휘둘렀다. 적뢰를 품은 푸른색 참격이 발로르의 몸에 닿았다.

핏. 하고 거인의 피부가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내 입장에선 사람 2~3명 분의 피지만, 거인의 입장에선 약간의 피를 흘린 수준에 불과했다.

휘청이던 발로르가 두 다리에 힘을 주며 똑바로 섰다. 그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붉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흠칫.

몸이 멋대로 떨렸다.

“죽지 않는군. 죽어 있기 때문인가….”

발로르의 목소리가 공간에 울린다. 검은 기둥이 내뿜던 죽음의 파동과 닮은 목소리였다.

“…칭 궈리는 죽었나?”

“칭 궈리?”

발로르는 자신의 손으로 상처를 쓰다듬었다. 상처가 순식간에 회복된다. 자연적인 회복은 아니었다.

“아, 날 불러낸 그 인간 말인가? 그 인간이라면 네 눈앞에 있지 않나. 내 몸의 일부로서 영원을 살아갈 것이다.”

“칭 궈리의 영혼은 어떻게 됐지?”

“머리가 안 좋은 모양이군. 나는 분명 말했을 텐데. 내 몸의 일부로서 살아 영원을 살아갈 것이라고.”

“……”

칭 궈리는 잡아 먹혔다. 그렇게 봐도 되겠지. 칭 궈리는 아마도 발로르에게서 뒤통수를 맞았을 확률이 높다. 칭 궈리가 발로르와 어떤 거래를 했는지 몰라도… 칭 궈리는 발로르를 너무 믿었다. 신이라고 해서 계약을 중히 여기는 신만 있는 건 아닌데 말이다.

“시선이 느껴지는군.”

발로르가 하늘을 향해 턱을 치켜올렸다.

“신들이여, 보고 있는가? 나 발로르는 이곳에 있다. 이곳에서 새로이 내 기반을 다질 것이다. 근원력을 긁어모을 것이고, 이 세계를 내 영지로 삼아 새로이 발돋움할 것이다.”

「천공의 주인이 비웃습니다.」

「떨어진 별이 깔깔 웃습니다.」

「빛나는 창이 침묵합니다」

“잊지 마라! 나는 지난 수모를 기억한다! 수모는 반드시 갚을 것이다!”

발로르가 포효를 내질렀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시끄러움을 넘어서서 듣는 이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움츠리게 만드는 힘이 서려 있었다.

발로르의 시선이 내게 꽂힌다. 내게 공격당했음에도 나를 향한 어떠한 감정도 없다.

“그 시작은 인간, 네가 되겠군.”

스톰 브레이커를 소환했다. 거창의 형태를 한 그것을 한 손에 쥐고 투창 자세를 잡는다. 창에 아스트라페까지 부여했다. 창이 뇌전으로 번쩍번쩍거렸다.

나는 발로르의 눈을 노리고 투창했다. 창은 번개처럼 날아가다가 거인의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멈췄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와 싸우던 놈들은 항상 눈을 노리더군. 처음에는 짜증이 났으나, 이해하기로 했다. 그들에게 있어 내 시선은 공포 그 자체일 테니.”

발로르가 허공에 멈춘 창에 검지를 튕겼다. 창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바닥에 꽂혔다. 나는 신음을 흘렸다.

‘…제법 힘을 쓴 공격인데 이토록 허무하게 막힌다고?’

발로르에게서 마나가 요동친다.

마법이다.

마법사가 쓰는 마법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마법.

“내 시선이 죽은 자에게 통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내 눈은 위험하지만, 그 한계가 명확했다. 그래서 고심했지. 어떻게 해야 한계를 벗어나 죽은 자를 죽일 수 있을까. 멍청한 고심이었지. 시선만으로 죽일 수 없다면… 물리력으로 죽이면 그만이니.”

발로르의 동공이 활활 타오른다. 그의 눈에서 붉은 광선이 쏘아져 나를 노렸다.

깜짝 놀란 나는 찰나를 이용해 다급히 피했다. 발로르의 광선은 모래 가득한 땅을 녹였다. 모래가 시뻘겋게 변해서 펄펄 끓는다.

‘규격외의 파괴력이군. 저 광선이 한 번이라도 몸에 닿으면 끝장이다.’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의 힘을 사용했다. 칭 궈리가 사라지면서 근처 언데드는 야생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 언데드들을 지배해 발로르에게 돌격시켰다.

“시체냄새 나는 것들. 예전에는 너희를 지배할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지. 허나 고작 시체 따위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내 영지를 더럽히지 말고 사라져라.”

죽음을 모르는 언데드들은 신이 상대라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붉은 광선이 언데드를 휩쓴다. 언데드의 몸이 불타오른다.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증발한다. 허나 언데드의 군세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발로르는 귀찮은 벌레라도 쫓듯이 팔을 휘둘렀다. 데스 나이트는 그대로 100M 넘게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갑옷 채로 박살 난 데스 나이트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데스 나이트가 한 방 컷이냐.’

나는 혀를 차며 일루시터를 이용해 몸을 투명하게 만들고 발로르에게 몰래 접근했다. 발로르의 오만함이 큰 도움이 되었다.

거인의 아래에 도착했다. 가까이서 보니 멀리서 볼 때보다 훨씬 더 큰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놈은 눈치채지 못했다.’

기습의 조건을 만족했다.

발로르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듯 언데드의 군세를 박살 내고 있었다. 발로르의 움직임이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저 육체에 적응해가고 있다.

‘기습의 최대 효과를 보기 위해선 타이밍이 중요하다.’

조용히 최적의 타이밍이 찾아올 때를 기다렸다. 그 순간은 곧 찾아왔다. 언데드 군세의 절반을 압도적인 힘을 내보이며 박살 냈을 때, 발로르의 긴장이 조금이지만 풀리고, 광선을 쏘아내느라 뜨거워진 눈에 휴식을 주듯 눈꺼풀을 닫았다.

영천류(影天流) 뇌광(雷光).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극한의 쾌검이 발동된다. 붉은 검광이 허공에 궤적을 남기며 발로르의 오른쪽 발목을 베어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발로르가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잘린 오른 발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온다.

“인간놈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발로르의 마나가 요동친다.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땅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이 사방으로 뻗어 간다. 불길에 직접 몸이 닿은 것도 아닌데도 피부가 빨갛게 변했다.

불에 닿은 땅이 검은 땅으로 침식되어간다.

‘…아니지. 엄밀히 따지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주위를 둘러보며 전력을 확인한다. 언데드 군세는 절반도 남지 않았다. 지금도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여 점점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야생 언데드는 발로르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발로르의 거대한 생명력이 언데드들을 자극한 것이겠지.

‘언데드가 있을 때 발로르를 처리해야 한다. 안 그래도 승산이 높지 않은데 언데드까지 없으면 끝이야.’

오른 발목을 잃은 발로르가 몸을 일으킨다. 오른발은 여전히 잘린 채다. 그는 왼발 하나로 몸을 지탱하고 있다. 그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눈은 당장에라도 피눈물을 흘릴 것처럼 충혈되어 있었다.

“설마 인간 따위에게 이런 치욕을 받을 줄 몰랐다…. 인정하마. 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영웅이다. 네게 영웅의 운명이 느껴지는구나. 허나, 그 운명은 여기서 바스러질 것이다.”

나는 창을 소환해 놈의 눈을 노려 투창했다. 통하지 않았다. 창은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튕겨 나갔다.

‘…마법이 아니야. 어마어마한 마나가 놈의 몸을 타고 요동치며 창을 튕겨냈어.’

일종의 호신강기라 할 수 있었다. 다만, 발로르가 의도한 호신강기가 아니다. 마나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에 불과하다.

어마어마한 마나는 허공에 뭉쳐 눈의 형태를 취한다. 발로르의 것과 똑같은 붉은 눈이 허공에 12개 나타났다. 발로르의 것과 합쳐서 총 13개의 사안(死眼)이 검은 대지를 향해 붉은 광선을 쏘아낸다.

대지가 불탄다. 언데드가 녹아내린다. 13개의 광선이 주변 일대를 초토화한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무차별적인 폭격 속에서 천마군림보를 밟으며 광선을 피한다. 그러나 그것도 곧 한계가 찾아왔다. 광선이 한 번 지나간 땅은 빨갛게 달아오른, 용암과 비슷한 상태가 된 것이 문제였다. 발 디딜 곳이 없어지고 있다.

‘젠장 할…!’

가까이 다가가서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발로르의 주위 일대는 이미 펄펄 끓고 있다. 열기에 대한 내성이 없는 이상 가는 순간 내 몸이 녹아내릴 것이다.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수단밖에 없는데 전력을 다한 투창이 통하지 않는다.

‘방법이 없나? 현대 무기는 좆밥들이나 상대할 때 의미가 있지. 발로르를 상대할 땐 의미가 없어. 다른 방법이….’

13개의 광선이 나를 노리고 사방에서 날아온다. 천마군림보로 대처하기엔 이미 늦었다. 천마군림보의 온전한 위력은 주위 공간을 장악해야 발휘된다. 헌데 저 광선에 닿는 공간은 내 장악력을 손쉽게 없애 버린다. 사방에 광선이 있으니 천마군림보가 막힌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쯤은 각오했지만… 못 해도 팔 한 짝은 가져가리라 생각했는데.’

그때였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파란 나비가 내 앞으로 팔랑팔랑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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