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7화 〉 1077. 신의 아틀란티스
엘레나는 제 5,485 구역 근처에 나타났다. 원래는 5,485 구역으로 바로 이동하려고 했다. 그러나 구역이 침식되어 그녀가 알고 있던 구역이 아니게 되었다.
‘침식은… 진행 중이군. 벌서 2개 이상의 구역을 침식하고 3번째 구역을 침식하려 드나.’
그녀는 혀를 찼다.
저 안은 다른 구역이다. 정체 모를 신좌의 힘과 존재가 짙게 깔린 영역이다. 한 번 들어가면 쉽게 나오지 못하리라.
무턱대고 안으로 들어가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녀는 마법을 이용해 구역 안쪽을 살펴봤다.
외곽 쪽에는 의미 없이 떠돌아다니는 언데드가 보인다. 구역의 중심에 우뚝 솟은 검은 기둥이 보인다. 기둥 위에는 붉은 눈동자가 있었다. 눈동자가 엘레나 쪽을 쳐다봤다.
「죽음의 시선에 닿았습니다.」
「구역 밖에 있습니다.」
「효과를 받지 않습니다.」
“……과연.”
떠오르는 알림창을 보며 엘레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한 신이 떠올랐다. 그녀는 추방자들을 통해 이미 예전에 신좌들에 대해 공부했다. 신화 속 신과 괴물. 그리고 그보다 급이 낮은 영웅과 위인에 관한 것까지.
‘눈과 관련된 신이라면 공략법은 몇 개 있지. 거울로 시선을 반사하거나, 눈에 띄지 않고 처리하거나.’
확실하지는 않다.
전자는 너무 단순해서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후자는 들키지 않는 것부터가 힘들다. 특히 저 검은 기둥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검은색 땅으로 평평하기에 더욱더.
‘나는 가능하다. 환술로 내 존재를 속이면 그만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성유진이었다. 검은 기둥 근처에는 성유진이 보이지 않았다. 저 넓은 구역 어딘가 몸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엘레나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왼쪽 어깨에 푸른 나비가 나타났다.
“그만둬, 거울. 너무 성급하게 움직이지 마.”
익숙하다면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헬텐의 보스인 사무엘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눈, 코, 입이 없는 하얀 팔각형 가면을 썼다.
“보스군. 그 뒤에 있는 건… 누구지?”
사무엘의 뒤에 한 인형이 있었다. 전신을 가리는 로브에 하얀색의 무면 가면. 로브 때문에 성별도 알 수 없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참인 화이트야. 화이트는 내가 가르치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
화이트는 엘레나를 빤히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입도 무거워. 네 정체에 대해선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거야.”
“뭐, 그래 보이긴 하는군.”
엘레나는 팔짱을 꼈다.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사무엘에게 물었다.
“침식이 발생하고 있다. 그 원인은 흑주맹의 칭 궈리다. 그는 고트월의 인원이다.”
“알고 있어.”
“…흑주맹에 관한 건 내가 맡기로 했다.”
“그것도 알아. 하지만 상황이 변했어.”
그녀는 미간을 있는 힘껏 찌푸렸다.
“어디까지 개입한 거지?”
“처음부터 끝까지는 아니야. 칭 궈리를 살짝 부추긴 것뿐이야. 너와 천마가 지옥에 있을 때, 쓸만하다는 판단을 내렸어.”
“천마가 안에 있다. 죽었나?”
“아니, 잘 살아 있어. 오히려 이득을 취하고 있는걸. 놀라울 정도야. 아, 살기는 풀어주지 않겠어? 나는 상관없는데… 화이트가 노골적인 살기는 싫어하는 편이거든.”
엘레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화이트를 바라봤다. 화이트에게서 살기와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화이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피부가 따끔따끔해졌다. 본능이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보스와 함께 있다는 것부터가 평범한 이는 아니란 뜻이지.’
무력으로 그들과 대립하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엘레나는 살기를 거뒀다.
“나는 천마를 구하려고 한다.”
“의외네. 네가 천마에게 이토록 관심 있는 줄 몰랐어.”
“그에겐 빚이 있다.”
“아. 그 지옥 말이지? 유명하더라. 근데 정말 그것뿐이야?”
“그것까지 말해야 하나?”
“아니. 그럴 필요는 없지. 천마를 구하는 건 좋아. 천마도 유능하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참아줘.”
“무슨 꿍꿍이지? 보스의 계획을 알아야 협력하든, 하지 않든 결정하지 않겠나.”
“확인이야.”
“확인?”
“하나는 침식 구역. 정확하게는 칭 궈리의 계획이 어디까지 성공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어. 이건 우리의 목적과도 중요한 일이야.”
“…….”
우리의 목적.
신을 죽이는 것.
엘레나는 입안이 썼다. 사무엘이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나오면 엘레나도 억지 부릴 수 없었다.
“두 번째는 뭐지?”
“천마의 역량. 천마가 회귀자라고 해도 활용할 수 있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어. 이번 기회에 그의 역량을 확인할 거야.”
“기대에 못 미치면 처리할 건가?”
“그럴 리가. 천마가 가진 지식은 쓸만해. 능력도 충분한 편이고. 단지. 내가 그에게 실망하게 되겠지.”
“이 상황은 보스의 손바닥 위에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지?”
“날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아줘. 여차 할 땐 도망쳐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때, 화이트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동쪽이었다. 엘레나는 반사적으로 화이트의 시선을 따라갔다. 약 10km 떨어진 거리에 일련의 무리가 침식 구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60명. 무장 상태를 보니 중소 규묘의 레기온이다.
“……이 주위를 통제하고 있는 게 아니었나?”
“아. 이것도 계획대로야. 붐바스틱 레기온이었나? 약간 정보를 흘렸지.”
“일부러 유인했다는 거군. 이유가 뭐지?”
“AP야. 저 검은 기둥은 AP가 필요해. 일종의 먹이라고 할 수 있지.”
“일종의 제물인가? 잔인한 짓을 하는군.”
“에이. 저건 저들의 선택이야. 나는 저들에게 살짝 정보를 흘렸을 뿐이지. 봐봐, 저들의 얼굴엔 탐욕이 그득하잖아? 저들이 공략에 성공한다면 얻는 게 많을 거야. 어쩌면 이 일이 거대 레기온으로 도약할 발판이 될지도 모르지.”
“거대 레기온으로 도약할 발판인가…. 그런 기회가 쉽게 오는 건 아니지. 달리 말하면 그 정도로 위험하다는 거군.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사무엘은 어깨만 으쓱였다.
엘레나는 사무엘이 보는 검은 기둥을 쳐다봤다. 기분 나쁜 건축물이다. 아니. 건축물이 아니라 생물일지도 모른다.
“저 눈에 대해선 대충 알겠다. 근데 저 기둥은 모르겠군. 기둥의 정체는 뭐지?”
“얼마 안 남았으니 지켜봐.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거야.”
“…….”
엘레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여차할 땐 나설 생각이었다.
“아. 천마다.”
“…어디지?”
“저기.”
그녀는 사무엘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성유진은 이상한 황금 가면을 쓰며 언데드 군세를 부리고 있었다.
•••
검은 기둥의 위에 있는 붉은 눈동자의 시선을 받아 죽은 나는 칭 궈리의 계약 신좌를 알아냈다. ‘무거운 눈’의 진명은 바로 발로르다.
발로르는 켈트 신화에 나오는 사안(死眼)을 가진 거인이다. 신화에 따르면 그의 시선에 닿는 모든 생물은 죽는다고 한다.
‘시선만으로 죽인다니… 말도 안 되는 씹사기 능력이잖아.’
그러나 허점이 있었다.
그 시선에 닿으면 바로 죽는다. 그리고 죽기 위해선 살아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미 죽었다면?
‘힌트는 이 구역에 있는 언데드지. 이미 죽어 있으니 시선을 받고도 죽을 일이 없다.’
나는 검은 기둥의 시선을 받고 죽었다. 저항할 틈도 없었다. 상태 이상 면역 상태가 되는 천심(天心)을 사용했다면 1분 동안 견뎠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당시에는 천심을 쓸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차할 때는 이미 시선을 받고 죽었다.
‘놈은 내가 죽자마자 흥미 없다는 듯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지.’
그게 도움이 되었다. 완전 회복을 사용해 부활하고 바로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을 소환해 머리에 썼다. 그 뒤로는 일단 도망쳤다. 도망치는 와중에 시선을 받았으나 예상했던 대로 죽지 않았다.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
황금 가면을 쓰고 있을 땐 어떤 저주도 통하지 않는다.
죽은 자가 된다.
마나가 50 상승한다.
마나 수치에 따라 언데드를 조종할 수 있다. 단, 미라는 관계없이 조종할 수 있다.
착용자의 정신을 파괴한다. 정신이 멀쩡하면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있다. 허나 정신이 파괴되면 미라로 전락한다.
랭크: SSS」
‘저 시선이 저주의 일종인지는 모르겠고. 일단 이 가면을 쓰고 있는 이상 난 죽은 자 취급이다. 난 살아있지만, 언데드 상태라는 거지.’
바로 검은 기둥을 공격하지 않은 건 놈의 전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검은 기둥 주위에는 수많은 언데드가 숨어 있다는 걸 안다.
‘칭 궈리는 흑마법사. 그것도 네크로맨서다. 그놈이 수백 마리의 언데드 군세를 이용한다면… 나도 수백 마리의 언데드 군세를 이용하면 돼.’
그래서 검은 기둥에서 떨어져 주위를 돌아다니며 언데드를 포획하고 있었다.
“천마!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나? 그 가면을 내게 바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못할 것도 없다.”
검은 기둥에서 칭 궈리의 목소리가 울렸다. 놈이 날 도발한다.
해골마에 타고 있던 나는 검은 기둥을 향해 중지를 세웠다.
“곧 죽이러 갈 테니 유언이나 남겨둬라!!”
“부질없는 짓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네게 자비를 내리고 있음을 모르는 건가?”
“자비는 개뿔.”
쿵, 쿵! 쿵쿵쿵쿵!
뒤에서 왕 쉬안이 육중한 몸으로 달려온다. 아귀인 왕 쉬안은 하루에 몇 번을 봐도 역겨웠다.
“또 이 새끼 보내네. 이 새낀 이미 공략 끝났어. 얘들아!!”
외쳤다. 내가 포획하고 지배하는 200 마리의 언데드 군세가 능숙하게 진형을 갖춘다.
쿵, 쿠우웅!
왕 쉬안은 미리 준비해둔 함정에 빠졌다. 땅 밑으로 쑤욱 꺼진 것이다.
“조져버려!”
가장 먼저 쇠사슬을 든 스켈레톤 20마리가 왕 쉬안이 빠진 구덩이에 뛰어들었다. 스켈레톤들은 몸이 박살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충실하게 왕 쉬안의 몸에 사슬을 걸었다. 사슬에 걸린 왕 쉬안이 버둥거린다.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사슬은 주위의 커다란 바위와 연결되어 있다. 드워프제라 쉽게 끊기지도 않는다.
‘저 괴물의 장점은 크게 세 가지지. 힘이 세다. 몸이 크다. 죽지 않는다. 그리고 단점은… 지성이 없다. 짐승보다 못해. 적어도 짐승은 함정에 몇 번 당하면 학습이라도 하지. 저건 학습이고 뭐고 없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칭 궈리가 왕 쉬안을 직접 조종할 때다.
‘거리가 멀어져도 한 참 멀어졌어. 놈이 왕 쉬안을 직접 조종하고 싶어도 못 하는 거리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알아낸 귀중한 정보였다.
“죽여! 죽여버려!”
언데드가 원거리에서 공격한다. 화살을 쏘고 창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내 명령에 따라 준비한 기름을 구덩이에 콸콸 붓는다.
콰르르르릉!
번개가 떨어졌다. 기름에 불이 붙는다. 구덩이 속에 불꽃이 치솟았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악!”
왕 쉬안의 몸에 들어 있는 영혼이 증발한다. 이 와중에도 언데드 군세는 왕 쉬안을 쉬지 않고 공격하고 있었다. 1초에 4~5개의 영혼이 영멸한다.
“크크. 나한테 걸리면 이 꼴 나는 거야.”
왕 쉬안은 혼자서 상대하기 힘든 상대다. 나 혼자였다면 도망치는 게 최선일 것이다. 언제 혼자서 놈을 7,000 번을 죽이겠는가. 체력이 버티지 못한다.
하지만 나 혼자가 아니라면? 왕 쉬안을 함정에 빠뜨려 묶어 둘 수만 있다면? 일이 엄청나게 쉬워진다.
“시체 새끼들아. 놀지 말고 빨리 저놈 죽여. 크크.”
죽어가는 왕 쉬안을 보면서 승리의 만족감을 느낀다.
“…음?”
검은 기둥이 있는 방향에서 언데드 무리가 이쪽을 향해 뛰어온다. 그 숫자만 해도 300이 넘는다. 데스 나이트나, 듀라한 같은 고위 언데드도 제법 섞여 있다.
“왕 쉬안을 구하러 왔냐? 주군이라고 챙기는 거냐?”
“그놈은 실패작이지만… 나름 특별한 특성을 가졌지. 지금 잃기엔 아깝다. 왕 쉬안을 데려가겠다.”
칭 궈리의 목소리가 울린다.
“언데드 300 마리로? 왕 쉬안을 데려가고 싶었으면 다섯 배는 더 보내야지.”
나는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