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6화 〉 1076. 신의 아틀란티스
벽 밖에서 리 메이가 벽을 두들기며 입을 벌리고 닫기를 반복했다. 뭐라 소리치는 것 같은데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향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30초가 지나자 공간이 완전히 변했다. 리 메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구역 침식이 완료됩니다.」
「제 5,845 구역, 무거운 시선이 닿는 곳.」
「모든 능력치가 20% 하락합니다.」
「무거운 눈이 기분 좋게 웃습니다.」
「천공의 주인이 혀를 찹니다.」
「마천의 왕이 불만을 터트립니다.」
구역 침식.
여러 가지 이유가 될 수 있지만, 가장 큰 구역 침식의 원인은 신좌의 영역이 아틀란티스의 구역을 침식할 때다.
칭 궈리는 아마 무거운 눈이라는 신좌의 힘을 이용해 구역 침식을 시도한 거겠지.
‘칭 궈리는 무거운 눈이라는 신좌와 거래를 했나 보군. 이 정도 일을 대놓고 벌일 정도면… 무거운 눈이란 신좌는 보통의 신좌가 아니다. 못해도 최소 신급이겠지.’
영웅급의 신좌는 부담을 감당하기 힘들다. 시스템은 아마 무거운 눈이란 신좌를 견제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겠지.
‘무거운 눈. 무거운 눈…. 설정집에는 없는 이름인데… 진명이 뭐지?’
머리를 굴려보지만, 신좌의 이름만으로 진명을 유추하기란 쉽지 않았다.
“처, 천마님!”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우리를 따라 도망치던 흑주맹 남자들이었다.
“뭐냐.”
“저희도, 저희도 밖으로 보내주십시오!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늦었다. 이제 여기서 못 나가.”
나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손에 닿는 건 없었다. 가로막던 벽은 이미 사라졌다. 이미 이곳은 다른 공간이 되었다. 땅은 메말랐고, 하늘은 어둡다. 이곳을 나서려면 공략할 필요가 있었다.
「특수 상황이 발생합니다.」
「제 5,845 구역, 무거운 시선이 닿는 곳을 벗어나기 위해선 침식의 매개체를 없애야 합니다.」
「페널티가 사라집니다. 능력치가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20% 하락했던 원래 능력치가 돌아왔다.
쿠쿵, 쿠쿠쿠쿵. 휑하던 검은 대지에 폐허나 다를 바 없는 건물들이 치솟는다.
시스템과 무거운 눈이란 신좌가 적당히 협상한 모양이다. 천공의 주인이나, 마천의 왕이 반응이 없는 걸로 보아 납득할 만한 수준인 모양이고.
‘시스템도 힘들겠군.’
신이라 해서 모두 시스템에 협조적인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기회가 되면 트롤 짓을 하려는 신이 넘쳐난다. 그런 놈들을 다 컨트롤 해야 하는 시스템이 불쌍할 정도다.
“비, 빌어먹을. 좀 도와주십시오!”
남자가 엎어져서 내 한쪽 다리를 잡았다. 나는 짜증이 치솟았으나, 한 번 참았다.
“이거 놔라.”
“염치없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저희에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남자는 눈치가 빨랐다. 내가 이들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려는 것을 알아차렸다. 허나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이놈들을 데리고 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데리고 가면 도움이 된다? 웃기는 소리. 방해만 안 되면 그만이다.
나는 검을 들어, 내 다리를 잡은 남자의 팔과 머리를 잘랐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으아아아아악!”
“미, 미친놈!!”
“배신이냐…!”
다른 이들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난다.
“이게 배신으로 보이나? 처음부터 너희와 난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살고 싶으면 너희끼리 뭉쳐서 알아서 해라.”
아연실색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그들을 무시하고 적당한 곳으로 움직였다. 일단은 조용히 돌아다니며 상황부터 살펴볼 생각이다.
‘엘레나에게 리 메이를 보냈으니, 버티다 보면 엘레나가 와주겠지.’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검은 기둥을 쳐다봤다. 검은 기둥은 지금까지도 계속 불길한 파동을 뿜어내고 있었다.
•••
“배고프다…. 배고파…!!”
왕 쉬안이 나를 쫓아온다. 거대한 육체와 달리 그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나는 혀를 차면서 빠르게 뛰었다. 왕 쉬안은 가로막는 모든 것을 박살 내며 내 뒤를 쫓았다. 30M가 넘는 커다란 바위도 놈을 막지 못했다.
나는 도망가다가, 적당히 거리가 벌어지면 놈을 향해 창을 던졌다. 창은 정확히 놈의 몸을 꿰뚫었지만, 놈은 죽지 않았다.
‘이 짓거리만 벌써 50번은 반복한 것같은데…. 놈은 지치지도 않는군.’
놈을 죽일 수 없다는 점이 가장 짜증 났다.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 하나?”
검은 기둥에서 칭 궈리의 목소리가 울렸다. 저놈은 내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일주일은 더 도망칠 수 있을 것같은데?”
이제 이틀째. 솔직히 말해서 슬슬 힘들었다. 나를 뒤쫓는 건 왕 쉬안 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쿠르르르르.
땅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감각을 집중했다. 땅에서 검은 손이 튀어나와 내 다리를 잡으려고 했다. 전부 피했으나, 어쩌다 잡히면 바로 검을 휘둘러 손을 잘라냈다.
“배고파아아아아아아!!”
왕 쉬안이 검은 손들을 먹어 치우며 속도를 높인다.
눈앞에 낭떠러지가 보인다. 그 너머에는 다른 땅이 있다. 나는 절벽을 향해 뛰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전력을 다해 천마군림보를 펼쳤다. 허공을 걸으며 낭떠러지를 걷는다. 무지성으로 나를 뒤쫓던 왕 쉬안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콰앙! 육중한 소리가 울렸다. 아래를 내려보니 왕 쉬안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걸로 약간의 시간은 벌었군.’
왕 쉬안은 다시 일어나 나를 쫓을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도망치거나, 이 구역을 공략해야 했다.
‘침식의 매개체는 뻔하지. 저 검은 기둥이야.’
검은 파동을 내뿜는 검은 기둥에 쉽게 다가갈 수 없다. 검은 파동이 치명적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생명력을 빼앗긴다.
“하하. 시간을 벌었군.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어서 좋겠어? 뭐하지? 안 도망가나?”
검은 기둥에서 칭 궈리의 목소리가 다시 울린다.
“…칭 궈리. 어제부터 말이 많군. 왜 직접 움직이지 않는 거지?”
“넌 왕 쉬안도 감당 못 하고 있는데 내가 직접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하나? 네가 지치는 순간, 왕 쉬안이 널 씹어 먹을 것이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검은 기둥을 노려봤다.
“넌 검은 기둥에서 못 움직이고 있군. 뭘 하고 있는 거지?”
“그걸 내가 네게 말해야 하나?”
“언제까지 내가 도망만 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가서 쳐죽여 주마.”
“그 전에 왕 쉬안부터 죽여야겠지. 네 의기를 높이 사서 힌트를 알려주마. 왕 쉬안은 먹은 인간의 영혼만큼 자신을 대신해 죽게 할 수 있다. 알겠나, 너는 족히 1,000 명 이상의 영혼을 죽인 거다.”
“도움이 안 되는 말인데.”
“하하.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건가. 좋다. 더 쓸만한 힌트를 주마. 7,141 번을 더 죽이면 왕쉬안은 죽는다.”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왕 쉬안이 절벽에 달라붙어 올라오려 애쓰고 있었다. 허나 육중한 육체 탓에 절벽을 기어 오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저걸 7,141번을 죽여야 한다고? 지랄.’
수백 번이면 몰라도 수천 번이면 보통 일이 아니게 된다. 피곤해지는 건 둘째치더라도 그럴 시간이 없다.
나는 뒤로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지는 나도 모른다.
5시간 뒤, 새로운 알림창이 떴다.
「제 5,845 구역이 제 5,846 구역을 침식했습니다.」
「침식도가 올라갑니다.」
‘침식이 끝나지 않고 근처 구역까지 침식하는 건가.’
좋지 않은 징조였다.
「죽은 자들이 일어납니다.」
검은 땅 위로 언데드가 나타났다. 언데드는 사방을 돌아다녔다. 나를 발견한 언데드는 살아 있는 자에 대한 증오를 내비치며 달려들었다.
파지지지직.
손끝에서 푸른 뇌전이 번뜩였다. 뇌전이 언데드들을 훑고 지나갔다. 언데드의 몸이 불탄다.
「5 AP를 획득합니다.」
「2 AP를 획득합니다.」
「6 AP를 획득합니다.」
……
언데드를 죽이고 AP를 얻었다. 다 합쳐서 50AP 정도다. 내 입장에선 푼돈밖에 되지 않는 수준이다.
‘검은 기둥. 저건 시간이 지날수록 기괴하게 변하고 있군.’
처음에는 반듯한 원기둥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표면이 울긋불긋하다. 검은 핏줄이 원기둥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왕 쉬안이 어느 순간부터 날 쫓아오지도 않고 있어. 날 쫓는 걸 완전히 포기했나?’
혹시나 해서 공간 이동 주문서를 꺼내 찢어봤다.
「공간 이동 주문서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역시나였다.
일련의 시간이 더 지났다.
모종의 무리가 나타났다. 30명 정도였는데 모두 무장했다. 중소 레기온 공략대로 보였다. 나는 멀리서 조용히 그들을 지켜봤다. 그들은 언데드를 해치우며 당당하게 검은 기둥을 향해 진격했다.
기둥이 꿈틀거렸다. 파동에 의한 착시가 아니다. 정말로 기둥의 몸체가 꿈틀거렸다.
기둥의 검은 파동이 기둥의 끝으로 모여 하나의 형상을 취한다.
붉은 눈동자였다.
‘사우론의 탑도 아니고… 저게 뭐야.’
공략자들이 검은 기둥을 향해 공격을 퍼붓는다.
“하하하. 드디어 초석이 만들어졌다.”
칭 궈리의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검은 기둥의 시선이 공략자들에게 향한다. 시선에 닿은 공략자들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죽은 것이다. 단지 시선에 닿았다는 것만으로.
‘검은 파동을 뿜어내지도 않았어. 진짜 시선만으로 30명을 한 번에 죽였다고?’
믿기 힘든 일이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획, 획획.
검은 기둥 위의 붉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리고 놈의 시선은 정확히 내게 향했다.
“커억!”
털썩.
바닥에 무릎이 떨어진다. 숨이 막혔다. 심장이 뛰지 않는다. 차가운 죽음의 손길이 내 몸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았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죽음이 찾아오고 있었다.
죽어가는 몸과 다르게 내 의식은 차분하게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시선만으로 대상을 죽이는 힘.
들어본 적 있는 신화였다.
무거운 눈의 진명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칭 궈리…. 성가신 놈과 계약했군.’
[죽음 저항이 발동했습니다. 앞으로 15초간 죽지 않습니다.]
•••
엘레나는 불청객을 맞이했다.
그녀는 불청객을 좋아하지 않는다. 초대하지 않는 손님 중 9할 이상은 나쁜 소식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불청객은 그대로 쫓아내겠지만, 이번 불청객은 성유진과 관련된 인물이라 그럴 수 없었다.
분홍색 머리카락과 분홍색 치파오를 입은 여성이다. 남자를 홀리기 딱 좋은 외모를 가진 미녀였다. 옷차림도 색정적이다. 다만 리 메이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잔 얼굴이다.
“리 메이. 라고 했나?”
“네. 공작 각하. 유진 씨가 보내서 왔어요. 공작 각하의 도움이 필요해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기분만으로 일을 처리하기엔 리 메이의 얼굴이 심각했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는 듯한 직감이 들었다.
“…일단 들어보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하게 말해라.”
리 메이가 설명했다.
흑주맹주를 죽이기 위해 본 거지로 향했던 일. 아귀로 변한 왕 쉬안과 검은 기둥. 구역 침식. 그녀가 알고 있는 것들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무언가를 숨기기에는 엘레나의 눈빛이 무서웠고, 성유진이 걱정되었다.
“…흑주맹에는 무언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고트월이었나. 내가 직접 나서는 편이 더 좋았겠군.”
엘레나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진 씨는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요. 벌써 사흘이 지났는걸요.”
리 메이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리 없다.”
엘레나가 확신에 찬 어조로 리 메이의 말을 부정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할 수 있죠?”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가 죽었다면… 이 세계는 이미 멈췄을 것이다.”
“네?”
“그리 쉽게 죽을 남자가 아니다.”
“…저도 함께 갈게요.”
“여기 있어라. 방해만 된다.”
리 메이가 반발하기도 전에 엘레나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