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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049화 (1,049/1,497)

〈 1049화 〉 1049. 신위

강지우의 뒤를 따라 지하 통로를 걸었다.

어두컴컴한 통로를 밝히는 것은 강지우의 손에 들린 작은 랜턴이 전부였다. 랜턴의 빛은 희미해서 주변을 밝게 비추지는 못했다.

나는 통로의 벽을 살펴봤다. 돌로 된 벽면은 매끈했고 부산에 있던 수련회 건물처럼 의미 모를 기괴한 무늬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 통로에 들어오고 나서 기분이 나빠.’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근처에 온천이 있어서 그런지 공기가 뜨뜻미지근하면서도 축축하다. 꼭 누군가의 입속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통로 앞에 있는 게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진 씨. 긴장하고 계시군요.”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가고 있는데 긴장하지 않겠습니까. 아까부터 제법 걸었던 것 같은데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요. 얼마나 더 걸어야 합니까?”

“글쎄요. 저도 이 통로를 걷는 건 처음인지라… 아마 곧 도착할 거예요.”

“처음이시라고요?”

“네. 이 통로는 일본 지부가 만들었고, 전 한국 담당이니까요. 일본에 몇 번 와본 적 있지만, 지금처럼 일 때문에 온 적은 처음이에요.”

“이 통로 끝에 뭐가 있는지 가르쳐주십시오.”

답답함에 못 이겨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강지우는 싱긋 웃었다.

“유진 씨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세요. 광신님께서도 그걸 바라고 계실 거예요.”

얻은 게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뚜벅뚜벅 걸었다.

그러다 이상함을 눈치챘다.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는 것이다. 이곳에 있는 인원은 20명. 강지우는 딱히 수다를 떠는 것을 금지한 적 없었다. 당장 내가 질문을 던져도 강지우는 친절히 대답해준다.

‘…뭐야? 죄다 넋이 나가 있잖아.’

박수호를 포함한 신도들은 해롱해롱한 상태였다. 눈동자는 풀려 있고 벌어진 입에서는 침까지 줄줄 흐른다. 이성이 사라진 것 같았다.

“박수호.”

박수호의 어깨를 잡았다.

“어, 어… 네. 형. 무슨 일이세요?”

박수호는 멍청한 표정에서 벗어났다. 그래도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이 맞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뭐라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군요.”

박수호는 정면을 보고 걷다가 다시 멍청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세뇌랑 똑같겠지. 통로 벽에 있는 무늬가 박수호랑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거야. 나는 절대 정신이 있으니 괜찮고… 강지우는 인도자이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건가.’

목덜미가 따끔따끔하다. 직감과 본능이 위험하다 말하고 있었다.

‘준비는 미리 해두자.’

나는 주변 눈치를 봤다. 맨 앞에 선 강지우는 앞으로 나아가기 바빴고, 주위에 있는 신도들은 죄다 멍청한 얼굴로 강지우를 뒤따르고 있었다. 내가 가운뎃손가락을 코앞에서 세워도 신도들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직접 몸을 건들지 않는 이상 이쪽을 보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다 와이파이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뭐, 이 정도는 괜찮다. 문제는 와이파이가 아닌 수신 표시도 0이라는 점이다. 즉, 이 지하 통로에서는 전화 연결이 되지 않는다.

‘통로에 무슨 짓을 해놨나?’

외부에 도움을 바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유희 세계를 이용해 인벤토리의 물품을 전투에 알맞게 바꿨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공간 이동 주문서 한 장을 팔목에 돌돌 휘감았다. 이것으로 위험하다 싶으면 공간 이동 주문서를 사용해 도망치면 된다.

‘좋았어. 준비 끝. 가자.’

나는 만전이다.

상대가 A급 헌터라고 해도 템빨을 이용해 이길 자신이 있었다. A급 상위놈들에겐 통하진 않겠지만…. 도망 정도는 칠 수 있겠지.

‘여긴 현실이야. 죽으면 끝이니 무조건 사리자.’

유희 세계에서 죽으면 유희 세계가 끝날 뿐이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아직 유희 생활 어플을 전부 즐기지도 못했는데 죽을 순 없었다.

후우우우우우웅.

“……!!”

나는 입을 벌리며 숨을 들이 삼켰다. 공간이 급격하게 변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 감각을 잘 알고 있다.

‘던전! 지금 던전에 들어온 건가?!’

강지우에게 시선을 둔다. 강지우는 아무렇지 않게 걷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군요.”

통로의 끝에는 문이 있었다. 거대한 문. 마치 지옥문처럼 온갖 화려한 조각이 되어 있는 검은색 문이었다.

강지우는 문을 잡고 밀었다. 끼이이익. 문이 천천히 밀린다. 무거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문은 가벼운 모양이다.

“여러분. 광원교의 신전에 오신 건 처음이시죠? 사실 저도 처음이에요. 신전은 허락받지 못한 자는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죠. 광신님은 이곳에서 신위를 얻고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강림하실 거랍니다.”

또다시 던전에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문이 열린 세계는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에 지어져 있는 새하얗고 웅장한 건물. 주위에 흐르는 맑은 물. 신전 주위를 채운 깨끗한 대리석 바닥.

‘저게 광원교의 신전인가….’

판타지 세계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든다. 아니지. 판타지 세계라고 해서 저런 건물이 흔하게 있는 건 아니다. 판타지 세계에 가본 경험이 있기에 잘 안다.

신전 주위에는 광원교의 신도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동양인뿐만이 아니라 서양인까지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우리가 들어온 검은색 문이 3개 더 있는 것을 확인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던전에 들어오는 느낌을 두 번이나 받았지. 설마… 던전 속의 던전인가?’

이래 보여도 대학교 헌터과인 나는 헌터계의 지식만큼은 많다고 자부한다. 그 지식 중에는 던전 속에 열리는 던전에 관한 것도 있었다.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아주 희귀한 확률로 발생한다.

나는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전파는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의 밤하늘과 달리 새파란 하늘을 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여긴 던전이다. 던전 속의 던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던전은 확실하다.

그때였다.

신전 정문에서 일련의 무리가 나타났다.

짧은 금발 머리에 하얀 로브를 걸친 중년 남자였다. 금색 실로 수놓아진 화려한 복장을 보며 그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오오! 귀인이시여! 신전에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외국인이 갑자기 유창한 한국어로 말한 것은 둘째치고 지나칠 정도로 나를 환대했기 때문이다.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려 강지우를 바라봤다. 강지우가 미소 짓는다.

“저분이 광원교의 조르지오 미켈리 교주님이십니다. 유진 씨를 환대하기 위해 직접 마중나오신 것 같아요.”

광원교 교주인 조르지오는 내 앞으로 달려와 내 몸을 포옹했다. 남자 놈이 내 몸을 끌어안자 기분이 확 나빠졌다. 성질 같아서는 그대로 칼빵을 놓고 싶지만…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 특히 교주 주위에 있는 놈들은 A급 헌터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부담스럽습니다. 교주님.”

힘을 빼고 그를 밀쳐냈다. 조르지오는 쉽게 물러났다.

“이런…. 제가 실수했군요. 너무 기뻐서 그만…. 용서해주십시오. 귀인.”

“어디 다친 것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교주님이 절 이렇게 환대해주실 줄 몰랐군요.”

“귀인이시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귀인의 눈에는 혼란이 가득하시군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원교의 모두가 내게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이 신전에 대한 정체가 궁금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범상치 않은 것만은 확실하니.

“솔직히 묻겠습니다. 여긴 대체 어딥니까? 지구 어디에 있는 곳입니까?”

“하하. 귀인께서 신전이 신기하신가 보군요. 이 신전은 지구 어디에도 없습니다.”

“……던전입니까?”

“비슷하지만 약간 다릅니다. 자세히 설명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니… 나중으로 미뤄두겠습니다. 단지, 이 공간에 대해 말하자면 광신님의 권능이 스며들었다고 말할 수 있지요.”

교주는 내 질문에 쉽게 대답했다. 기분 나빠 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또 있습니다. 제가 왜 귀인입니까?”

“광신님이 귀인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광신님이 왜 절 선택했는지 몰라 묻는 겁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원교와 전혀 연관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박수호가 아니었다면 관련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탁으로 인해 귀인이 되었다고 말해봤자 이해하기 힘들었다. 광신은 대체 왜 그런 신탁을 내린 거지? 광신은 왜 나를 선택한 거지?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강지우는 신의 뜻은 너무 깊어 헤아릴 수 없다고 지랄할 테지만, 눈앞의 교주는 다를 것이다. 광원교의 간부 중에서도 가장 낮은 서열의 강지우와 달리 가장 높은 서열의 교주일 테니까.

“하하. 귀인께서 여기까지 오셨으니 마땅히 설명해야겠지요.”

이렇게 쉽게 말해준다고 하니 의심이 뭉게뭉게 들었다.

“우선 귀인께서는 광신님과 마주한 적이 있을 겁니다.”

“제가 광신님과 만났다고요? 언제 말입니까?”

“그거야 귀인께서 아시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기억을 잘 더듬어 보시지요.”

기억에 집중하다가 곧 떠올렸다.

신이라 불릴만한 존재를.

다만, 그건 이 세계의 신이 아니라 박수호의 문신 세계의 신이었다.

브라마센.

확실히 그런 이름이었다.

악신.

광기를 퍼뜨리는 광기의 신.

‘광신이 빛의 신이 아니라 진짜 미친 신을 말하는 거였나.’

광신의 정체를 알았다.

브라마센. 그놈은 어떻게 한 건지 몰라도 지구에서 숭배받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브라마센은 나를 적대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귀인 취급을 한다고? 놈에게는 난 당장 죽여버리고 싶을 적일 텐데.

“광신께서는 귀인을 원하고 있습니다.”

“나를 원한다고요?”

“예. 어떠한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광신께서는 귀인을 원하고 있습니다.”

“…….”

저번에 브라마센과 만났을 때도 나를 회유하려고 했다. 분명 나는 그때 단칼에 거절했을 텐데.

“귀인이시여. 혹시 셀브레티나의 용사를 아십니까? 최악의 적이며, 이단 중의 이단인 존재입니다. 저희는 그 이단을. 최고의 제물을 손에 넣었습니다.”

교주의 시선이 박수호에게 향했다. 박수호는 여전히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평범한 신도들이 그러하듯이 교주를 향해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교주는 박수호를 보며 입에 호선을 그렸다. 조소였다.

“설마 진짜 셀브레티나의 용사가 아무 대비도 없이 우리에게 접근할 줄이야. 저도 예상하지 못했고, 광신께서도 예상하지 못하신 일입니다. 광신께서는 찾아온 행운에 매우 좋아하셨지요.”

박수호가 용사라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문신 세계와 깊이 관련된 존재는 내가 아니라 박수호니까.

“……박수호가 제물? 무슨 뜻입니까?”

“셀브레티나의 용사는 특별합니다. 셀브레티나의 힘을 받은… 일종의 사도라 할 수 있지요. 광신께서는 제물로 바쳐진 용사를 통해 셀브레티나의 힘을 강탈하여 신위를 얻으실 겁니다. 그분께서 지구에 강림하시는 거지요. 하하하. 본래라면 반년 이상의 시간이 더 필요했겠지만, 용사를 손에 넣은 이상보다 성공률이 올라갔고, 시기가 앞당겨졌습니다!”

“박수호가 제물이라면, 제가 할 역할은 뭡니까? 저도 제물입니까?”

“귀인을 제물로 삼다니… 그런 불경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귀인께서 하실 일은 강림하신 광신님과 마주하시는 일입니다. 제 생각에는 광신님은 아마 귀인을 사도로 삼으려 하시는 것 같습니다.”

교주는 부러움과 존경심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광신께서는 언제 강림하십니까.”

“내일. 저희는 내일 신위 의식을 치를 겁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의식을 치르고 싶으나… 의식에는 준비가 필요한 법이지요.”

좆된 것 같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가.

나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까지 없던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내일이 무척 기대되는군요. 저는 광신님을 만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이미 좆된 것 같으니 최선책을 선택하기로 했다. 브라마센의 줄을 타는 것이다. 그럼 세상이 좆되도 나만큼은 안전하겠지. 내게 중요한 건 살아남아 유희 생활을 즐기는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광신교의 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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