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8화 〉 1038. 신위
[유희를 종료합니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스마트폰을 들었다.
‘보자… 이번에 얻은 포인트는….’
[성유진
레벨: 79
근력: 95 체력: 90 민첩: 95 지능: 80 정력: 100 마나: 100]
[사용 가능 포인트: 5,710]
‘보통 때와 같군.’
의외인 건 레벨이다. 나는 이번에 레벨 80을 달성할 줄 알았는데 경험치가 약간 모자랐던 모양이다. 좀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번 포인트는 능력치에 투자한다.’
[성유진
레벨: 79
근력: 100 체력: 100 민첩: 100 지능: 92 정력: 100 마나: 100]
[사용 가능 포인트: 110]
포인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능력치가 100이 될 때까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 정확히 시험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지금 이 능력치면 아마 A등급 헌터의 신체 능력과 맞먹을 거야.’
A급에서도 낮은 편에 속할 것이다. A급부터는 신체 능력도 개인마다 천차만별이니까. 신체 능력이 뛰어나지만, 마나가 부족한 헌터가 있다. 당연히 그 반대도 있으며, 신체 능력과 마나 두 가지 모두를 갖춘 헌터도 존재한다.
‘신체 능력은 차근차근 올리면 돼. 어차피 시간은 내 편이고, 남들 입장에서는 내가 괴물처럼 성장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
이제 A급 헌터가 되어도 무시 받지 않을 신체 스펙을 갖췄다. 문제가 있다면 아직 실적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해서 A급 헌터로 올라갈 수 없다는 점이다.
‘실적을 올리려면….’
던전을 공략해야 하고, 협회의 의뢰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역시 막상 하려니 귀찮았다. 던전을 공략하고 의뢰를 수행하면 돈을 비롯한 특수한 힘을 가진 물건을 얻을 수 있지만…. 이 세계에 있는 물건보다 훨씬 좋은 물건들을 다른 세계에서 가질 수 있어서 그런지 영 의욕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A급 헌터가 되어 떵떵거리려면 꾸준히 실적 점수를 올려야겠지. 우선 한하린이랑 만나자.’
한하린이랑 같이 적당한 던전이나 공략할 생각이었다. A급 헌터가 되기 위해 실적 점수가 필요한 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이니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바로 한하린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이 가까우면 이게 좋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전화 걸 필요 없이 바로 찾아가도 된다는 점이. 물론 섹스하고 싶을 때도 빠르게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었다.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하린은 안에 있었다. 그녀는 방에서 캐리어에 짐을 싸고 있었다.
“캐리어? 누나 어디가요?”
“…갑자기 불쑥 찾아오는 것 좀 그만둬.”
캐리어에 검은색 속옷을 넣고 있던 한하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날 노려봤다. 평소에 하는 말이었기에 대충 어깨만 으쓱였다.
“해외여행?”
“이번에 길드에서 의뢰를 받아 일본으로 파견 가. 내일 갈 거야.”
내일.
그 말에 무심코 벽에 붙어 있는 달력에 시선이 향했다. 오늘이 2021년 6월 10일 목요일이니, 내일은 금요일이었다.
“내일은 불금인데 떠난다고요? 저랑 호캉스 즐기기로 했잖아요.”
“그런 적 없어. 사기 치지 마.”
한하린이 코웃음 쳤다.
“사기라뇨. 농담이죠. 농담. 근데 누나 길드는 일본에서도 의뢰받아요?”
“수월 길드잖아. 길드가 유명하면 해외에서도 의뢰가 들어와. 특히 한국의 길드는 해외에서도 자주 일하니 세계적으로 제법 유명해.”
한국은 인구수나, 국가 면적에 비해 헌터가 많아서 헌터들이 해외로 원정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서 한국의 수월 길드에 의뢰 하는 건 또 의외네요.”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야. 예전부터 가끔 있었으니까.”
“가서 뭐하는데요? 가면 언제 와요?”
“침식 던전 공략. 북해도에 나타난 A급 침식 던전을 공략하는 일이 전부야. 빠르면 이틀. 못해도 일주일 안으로 돌아올 거야.”
나는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한하린을 따라 가고 싶은데 명분이 없었다. 나는 세븐티어 길드 소속이고, 그녀는 수월 길드 소속이었다.
“내일이면 시간 있죠? 지금 저녁이니 밖에서 먹을래요? 제가 TV에 나온 맛집 알아뒀는데요. 거기 국수가 그렇게 맛있대요.”
“새벽에 공항으로 가야 하니 됐어.”
나는 한하린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럼 아직 시간 있네.”
“…이거 놔.”
“에이. 빼지 말고 하자. 당분간 못 보잖아. 내가 마사지해줄게.”
마사지란 말에 움찔 대던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의 한숨이었다.
나는 한하린을 마사지 침대에 눕히고 그 풍만한 몸을 양손으로 주물렀다. 몇 번을 만져도 꼴리고도 대단한 몸이었다.
이윽고 우리는 새벽까지 몸을 겹쳤다.
한하린은 떠나기 전에 샤워하고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나는 그녀를 인천 공항에 직접 데려다주었다.
일본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보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유희 세계에서 나랑 가장 많이 관계를 가진 여자는 유리아다. 허나 현실 세계를 한정하면 나랑 제일 많이 섹스한 여자는 한하린이었다.
이미 정이 쌓일 대로 쌓인 것이다.
•••
다음날.
나는 박수호와 함께 그의 여동생인 박가인의 병문안을 갔다. 정기적으로 하는 병문안이었다. 잠들기 전의 박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박수호와는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무슨 일이야? 오늘따라 안색이 많이 안 좋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박수호에게 물었다. 박가인과 만날 때는 표정 관리를 하더니, 박가인과 헤어지고 나서는 영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있었다. 그만큼 내가 편하기도 했지만, 같이 밥 먹는 대상이 죽상을 쓰고 있으니 계속 신경 쓰였다.
“심각한 일은 아닌데요…. 그게 다른 사람한테 좀 황당한 이야기이기도 해서….”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하잖아. 대체 무슨 일인데?”
박수호는 부대찌개를 한 숟가락 떠서 먹었다. 얼굴은 죽상이면서 식욕은 그대로다.
“요근래 이상한 꿈을 꿔요. 웬 여자가 나타나서 세계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꿈이에요.”
“여자 꿈이네. 어떻게 생겼는데?”
“어…. 빛에 둘러싸여 있어서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요. 그냥 왠지 모르게 여자 같아서 여자라 생각하고 있어요.”
“요근래 이상한 꿈이라고 했지? 같은 꿈을 계속 꾸는 거야?”
“네. 일주일 정도 됐어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똑같은 꿈을 일주일 동안 계속 꾸는 건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이 세계는 마법도 있고, 저주도 있으니까.
“저주?”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가인의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바로 병원에 돌아갔는데… 어떤 저주도 아니래요.”
“유령일 수도 있잖아.”
“저 이래 보여도 마나 다룰 줄 아는 헌터예요.”
마나를 다룰 줄 알면 유령 계열의 몬스터라도 사냥할 수 있었다.
그냥 개꿈이다. 라고 넘어가기에는 박수호는 좀 특별했다. 다른 세계에 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어쩌면 다른 세계의 어떤 존재가 박수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여자가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말해봐.”
“세계가 위험하다고 하면서… 또… 아. 죄송해요. 기억이 너무 가물가물해요.”
“뭐, 그럴 수 있지. 오늘도 똑같은 꿈을 꾸면 일어나자마자 그 여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메모해.”
“네. 그럴게요. 이거 심각한 일은 아니겠죠?”
“심각한 일이었으면 꿈이 꿈으로 안 끝났겠지.”
나는 그와 소주잔을 부딪쳤다. 소주와 함께하는 부대찌개는 끝내줬다.
이후에 2차로 클럽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클럽은 불금에도 불구하고 물이 안 좋아 보였다.
‘…아니지. 내가 눈이 높아진 거야.’
한하린보다 못한 여자들 투성이었다. 하다못해 한하린의 미모 80%만 따라가도 좋으려만…. 어째 오늘따라 미녀가 안 보인다.
나는 박수호와 적당히 놀다가 헤어졌다.
난 절대 정신과 정력 능력치 덕분인지 마나를 이용해 취기를 내보내지 않고도 전혀 취하지 않았다. 반면에 박수호는 고주망태가 되어 웬 오크 여자에게 붙잡혀 이리저리 질질 끌려다녔다.
헤어지기 전에 박수호와 여자의 사진을 찍었다. 여자는 화장으로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오크가 확실하다. 당장 보이는 스커트 아래의 종아리 굵기만 해도 내 주먹 이상의 굵기다.
“흐흐… 마틸다….”
“어머, 이 오빠 왜 이래. 내가 그렇게 좋아?”
박수호와 오크 여자는 서로 몸을 껴안고 있었다. 참고로 마틸다는 문신 세계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여자다. 내 좆집 중 하나였으나, 박수호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찰칵찰칵.
‘나중에 이 사진으로 박수호를 놀려야지.’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박수호의 전화가 왔다.
“혀, 형! 웬 모르는 여자가 우리집에 있어요! 어떡하죠?”
“어제 같이 놀던 그 여자야? 어떡하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애도 아니고 왜 그래.”
“그, 그게 이 여자가 저보고 사귀자고 하는데요? 같이 잤으니 사귀재요! 시발! 이 여자, 사진까지 찍었어요!”
박수호의 욕설이 들려왔다. 화장 지운 여자의 모습을 본 모양이다. 이놈은 아닌 척하면서 여자의 외모를 지나칠 정도로 따진다.
“그냥 사귈 생각 없으니 꺼지라고 해.”
나는 통화를 끊었다.
5분 뒤에 메시지가 왔다.
박수호: 형! 이 여자 미쳤나 봐요! 사귀기 싫다고 하니까 강간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한대요!
나: 야, 그 여자랑 진짜 잤냐?
박수호: 그, 그게 술에 취해서 저도 모르게….
나: 동정 졸업 축하. 콘돔은 썼지?
박수호: …모르겠어요. 기억이 애매해요.
나: 한 기억은 있고?
박수호: …네.
나: 그럼 했네.
박수호가 전혀 부럽지 않았다. 저런 오크와 섹스를 하다니…. 오히려 박수호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한 5초 정도.
박수호: 형! 어떡해요! 신고한다고 난리에요! 좀 도와주세요!
나: 더러운 년한테 물렸네. 대충 몇십만 원 쥐여주면 만족할 거야.
10분 지나서 다시 메시지가 왔따.
박수호: …이 미친년이 300만 원 달래요. 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
나: 그래서 줬냐?
박수호: 내가 헌터란 걸 알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게다가 너무 시끄러워서… 소문까지 퍼지면 안 되잖아요.
나: 이미 퍼졌을걸. 아, 맞다. 어제 이거 사진 찍어뒀는데 깜빡했다.
나: (사진)
고주망태 상태의 박수호와 화장 진한 여자가 사이좋게 팔짱을 까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 사진이면 강간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박수호: 형! 왜 이걸 지금 보내주는 거예요!
나: 깜빡했어. 그리고 겨우 300만 원이잖아.
박수호: 형한테는 겨우 300만 원이겠지만, 저한텐 아니에요.
박수호: 그 여자한테 300만 원 다시 돌려받고 올게요.
나: 야, 근데 요즘 이상한 꿈 꾼다며? 그거 오늘도 꿨냐? 그 꿈속의 여자가 뭐라 말하는지 기억했고?
박수호: 미안해요, 형, 술에 너무 취해서 하나도 기억 안 나요. 지금 숙취도 머리도 아프고…. 일단 그 여자한테서 돈 돌려받고 연락할게요.
박수호는 3시간 뒤에 다시 연락했다. 300만 원 중 150만 원밖에 못 돌려받았다고 한탄했다.
•••
오후에 백지은으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젊은 나이에 A급 헌터에서 S급 헌터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절대 최면 스티커에 당해 나를 소꿉친구이자 섹스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다. 최근에 한국 헌터 협회의 간부가 되었는데 말석인지라 매우 바쁘고 권한도 별로 없다고 한다.
“실적 필요하지? 당분간 협회 일 좀 도와줘. 실적 점수 제대로 챙겨줄게.”
“오. 지은아. 날 잊지 않고 있었구나! 요새 연락이 없어서 날 잊은 줄 알았어.”
“바빠서 그래. 바빠서. 이렇게 실적도 챙기게 도와주잖아.”
“힘든 일은 아니지?”
“음. 약간? 내 부하 직원이 병원 신세를 지는 중이라 인력이 부족해. 일주일 정도만 도와주면 돼.”
“알았어. 실적 점수만 확실히 챙겨줘.”
“그건 확실히 챙겨줄게! 이 누나만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