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7화 〉 1037.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계승식과 약혼식은 그 자리에서 진행되었다.
몇몇 가신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겨우 그 정도로 엔티온이 내뱉은 말을 번복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프루커스 백작 가문은 가주에게 권력이 집중된 구조였다. 그렇기에 프루커스 영지내에서는 가주가 곧 왕이다.
나는 엔티온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고, 내 옆에는 유리아가 앉았다. 아직 정식으로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유리아를 이미 내 아내로 취급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감회가 새롭군.’
가주의 의자는 그레이트 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모두를 내려다보게 되고, 모두가 나를 올려다보게 된다.
‘원작의 카일은 꽤 쉽게 이 자리에 올랐지.’
원작에선 내가 없었다. 젠트 정도는 카일도 쉽게 상대했다. 아마 나도 카일이 없었다면 몇 년은 빠르게 가주 자리에 올랐으리라.
나는 몇몇 가신들을 노려봤다. 내가 가주 자리에 오르는 걸 반대한 자들. 그리고 나와 몇 번 부딪친 적 있는 자들. 그들 중 대다수가 재빨리 눈을 바닥으로 깔았다. 허나 소수는 어떤 신념이라도 있는지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반항했다.
‘일단 저 새끼들은 사형 확정이다. 트집을 잡아 죽여야지. 잡을 트집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죽인다. 정 안 되면 암살을 해서라도 죽일 거다.’
있어 봤자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다.
그리고 본보기가 필요하다. 내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줄 본보기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젠트가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린다. 나와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젠트가 엔티온을 향해 소란 피우고 있었다.
“아버지!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유진보다 더 많은 공적을 쌓을 수 있습니다!!”
젠트는 모여드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철면피만큼은 인정한다.
“젠트. 억지 부리지 마라. 이미 너와 유진의 역량 차이는 드러났다. 유진을 대적할 수 있었던 건 카일뿐이었다.”
“제게도 시간과 돈이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겁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 …아니군. 장남인 네게 흐른 시간이 더 많다. 돈의 경우 그 누구에게도 지원하지 않았다. 유진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돈을 벌고, 자신의 돈으로 전쟁을 치른 것이다.”
“…크윽. 아버지! 많은 걸 바라지 않겠습니다! 처음 했던 말을 지켜주십시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승식을 미뤄주십시오!”
“네가 무슨 말을 한들, 계승식은 이미 끝난 일이다. 나는 유진에게 가문의 인장을 넘겼다. 젠트, 새로운 프루커스 가주를 섬겨라. 유진은 너의 형제이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젠트의 똥고집이 발휘되었다. 엔티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젠트. 나는 네가 전쟁을 겪으며 성장한 줄 알았다. 허나 지금 보니 제자리걸음이구나. 젠트. 현실을 외면하지 말거라. 너와 유진의 역량 차이는 드러났으며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네가 성 하나를 함락시킬 때, 유진은 세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네가 남쪽에서 고군분투할 때, 유진은 북쪽을 평정했다. 거기에 유진은 카일의 지지까지 얻었다. 너는 동생들의 지지조차 얻지 못했지.”
“……!!”
젠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쥔다. 얼마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어 피가 뚝뚝 떨어진다.
“아버지. 저는 프루커스 가문의 장남입니다. 가주 자리는 본래 제 것이었습니다…!”
“프루커스 가문의 주인은 오직 능력이 되는 자만이 오를 수 있다.”
“…그 능력. 제가 증명해 보이도록 하지요…!”
젠트는 엔티온을 무시하고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손에 낀 장갑을 벗어 나를 향해 던졌다.
나는 장갑이 내 얼굴에 닿기 전에 낚아챘다. 장갑을 상대방에게 던지는 행위는 결투를 신청하는 행위였다.
“유진 프루커스! 네게 결투를 신청한다! 내가 승리한다면, 프루커스의 가주 자리를 내게 넘겨라! 네겐 어울리지 않는 자리다!”
“좋아. 결투 신청을 받아주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 해도 내가 오러 마스터라는 사실을 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럴 경우는 두 가지다. 감정에 따라 나오는 대로 말을 지껄였거나, 다른 무언가가 있거나. 내가 결투를 받아들였음에도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없는 것을 보면 아마 후자 쪽인 모양이다.
“기어코 일을 저지르는구나.”
한탄 섞인 엔티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주 자리에서 물러나서 그런지 몰라도 부쩍 늙은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못 들은 척 젠트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은 흔치 않은 구경거리에 바로 자리를 만들었다. 그레이트 홀 중심에 공터가 생겨났다. 나와 젠트는 하인을 시켜 검을 가져오라 했다.
결투를 주관하는 건 엔티온이다.
“지금은 전시다. 그리고 너희는 피를 나눈 형제다.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은 없도록 하라.”
엔티온이 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 상대를 죽이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지가 풀풀 느껴졌다.
“저도 동생을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젠트가 말했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거짓말이었다. 죽일 생각이 없었다면 암살자를 보내지도 않았겠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이는 건 너무 쉽지. 나는 젠트의 모든 걸 빼앗을 것이다.
‘죽이지는 않아. 그래도 나한테 대들었으니 벌은 받아야지. 팔 한 짝은 잘라야지.’
젠트와 카일. 두 형제가 나란히 팔 병신이 되었으니 그 꼴이 볼만할 것이다. 사람들은 형제답게 서로 팔이 하나밖에 없으니 과연 우애 깊은 형제라고 감탄할 것이다.
검을 든 나는 우선 젠트의 기를 죽여둘 생각으로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켰다. 선명한 푸른색의 오러 블레이드에 주위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특히 기사들의 시선이 뜨거웠다.
“형. 아직 늦지 않았어. 포기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건넸다. 명예가 걸린 일이다. 젠트는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건네는 말이었다.
“포기 따윈 없다. 이 결투에서 승리하고… 나의 자리를 찾겠노라.”
젠트가 오러를 일으켰다. 활활 타오르던 오러는 검신에 뭉치기 시작한다.
오러 블레이드.
“이럴 수가! 젠트 님도 오러 마스터였단 말인가? 프루커스가의 삼형제가 전부 오러 마스터라니!”
“댁은 눈이 삐었소? 잘 보시오. 젠트 공의 오러 블레이드는 불안정하오. 일시적으로 오러를 뭉쳐 오러 블레이드를 만든 것에 불과하오. 진짜 오러 블레이드와 맞부딪친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오.”
“일방적인 결투가 될 줄 알았는데… 꽤 재밌게 돌아가는군.”
젠트는 오러 익스퍼트 최상급이었다.
원래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 전쟁을 통해서 아예 성장하지 않은 건 아닌 모양이군.’
그러나 젠트는 벽을 넘지 못했다. 나같은 경우 기연이 있었지만, 젠트에겐 없었다.
파지직.
푸른 오러 블레이드에 푸른 뇌전이 번뜩인다. 구경꾼들이 놀라는 것을 무시하고 젠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아앙!
검과 검이 부딪치며 커다란 소음이 사방에 울렸다.
나는 여유로웠으나, 젠트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단 한 번의 검격으로 격의 차이를 느낀 것이리라.
검을 위로 들고 있는 힘을 다해 아래로 휘둘렀다. 검의 궤적을 번개가 뒤따른다.
콰르르르릉!
“크으으으윽!”
젠트는 어떻게든 내 검격을 막아냈으나, 뒤따르는 번개에 감전되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젠트의 어깨가 내려가고 양다리가 부들부들 떨린다.
‘뇌전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잖아.’
오러 블레이드를 억지로 만들어서 그렇다. 본래는 마나를 여유롭게 운용해 몸에 흐르는 전류를 막아 감전에 대비해야 한다.
‘나 같은 놈을 상대한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실망스럽긴 하군. 비장의 수도 없었나?’
젠트가 반격해온다. 몸을 최대한 낮추며 달린다. 내 오른쪽으로 접근한 젠트가 왼쪽 다리를 노렸다. 기동력을 빼앗을 목적이다. 허나, 내 눈은 이미 그를 완벽히 포착하고 있었다. 놓친 적이 없었다.
뒤로 한 발짝, 옆으로 한 발짝.
젠트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간다. 반격의 시간이다. 앞에 있는 왼발을 축으로 삼아 오른발을 돌려찼다. 퍼억! 젠트의 얼굴에 돌려차기가 작렬했다.
뒤로 나가떨어진 젠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코가 무너지고 입안이 터져 피가 줄줄 흐른다. 두 눈은 여전히 이글거린다. 젠트의 투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 후로 젠트와 10번 정도의 합을 나누었다.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너무 쉽게 끝나버리면 아쉬워서 적당히 놀아줬다. 주위 사람에게 볼거리도 제공해줄 겸, 젠트를 농락하며 내 실력을 알렸다.
까아앙! 깡! 쾅!
젠트의 억지로 만든 오러 블레이드는 이미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다.
‘끝내기로 할까. 카일은 쓸만해서 왼팔을 잘랐지만…. 넌 아니지. 넌 오른팔을 자른다!’
젠트의 검을 쳐냈다. 젠트의 팔이 밖으로 벌어졌다. 오른팔을 자르기에 딱 좋은 기회였다.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가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젠트의 입가가 비틀어 올라가는 게 보였다.
‘찰나.’
젠트의 신발에 은은한 빛이 서리고, 그의 가슴팍에 달린 브로치가 빛난다.
‘아티펙트를 두 개나 가져왔나. 이걸 믿고 있었군. 신발의 효과는 자동 이동인가? 저절로 뒤로 빠지고 있군. 브로치의 효과는….’
젠트의 근육이 부풀고, 그의 불안정하던 오러 블레이드가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는 게 보였다. 신체 강화의 효과로 강제로 검의 궤도를 비틀어 내 어깨를 노린다.
‘꽤 준비해왔군.’
하지만 무의미했다.
젠트의 검이 내 어깨에 닿는 것보다, 내 검이 먼저 그의 오른팔을 잘랐으니까.
서거억!
젠트는 찰나에 의해 가속된 일격에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했다. 그의 검을 쥔 오른팔이 잘려 바닥을 굴렀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붉은 피가 바닥을 더럽힌다.
“결투는 끝났다! 유진의 승리다! 준비한 포션을 사용해라! 마법사! 치료사! 어서 젠트의 상처를 치료해라!”
엔티온이 주위에 소리 지른다. 치료사가 재빠르게 젠트의 팔을 주워들고 어깨에 가져가려 한다. 나는 치료사의 어깨를 잡아 막아섰다.
“아버지. 결투의 승자는 접니다.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젠트의 팔을 붙이지 마십시오.”
“…젠트는 네 형제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젠트는 도전자였습니다. 가주의 권위에 도전했지요. 그 죄를 오른팔 하나로 용서하겠습니다.”
엔티온은 멈칫하다가 말했다.
“…가주의 뜻에 따르겠다.”
나는 밖으로 실려 나가는 젠트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그 후로, 나는 연회를 열었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연회는 전시라는 이유로 단 하루만으로 끝났다.
숙청을 준비했으나 바로 실행하지 않았다. 전시 상황이라 눈치가 좀 보이기도 했고, 아직 긴가민가한 놈들이 꽤 있었다.
다만, 젠트의 팔다리는 잘라야 했다. 진짜 팔다리가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이다. 나는 젠트가 내게 보낸 암살단을 명분으로 젠트를 지지하는 신하 11명을 처형했다.
그 자비 없는 처형에 젠트의 신하들은 벌벌 떨었다. 아예 다른 왕국으로 망명하거나, 재산을 내게 바쳐 젠트를 배신하는 놈들도 있었다.
도망가는 놈들은 암살자를 시켜 전부 죽였다. 내게 뇌물을 바친 놈들은 일단 살려뒀다. 자비를 베푸는 척해야지 다른 놈들도 관리하기 쉽다는 유리아의 조언에 따라서다. 뭐, 나중에는 대충 처리할 것이다.
가주 자리에서 물러난 엔티온은 은퇴하지 않고 군대로 돌아갔다. 끝까지 전장에서 살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카일과 더불어 사용할 수 있는 패가 늘어난 것이니까.
‘자꾸 꼰대짓을 하려고 하면 죽여버려야지.’
내가 바로 프루커스의 주인이다.
가주 자리에 앉은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현실로 돌아갔다.
[유희를 종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