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5화 〉 1035.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마차가 굴러간다.
마차안에 탄 나는 창밖의 풍경을 쳐다봤다. 나무 가득한 풍경이 흔들린다. 정확하게는 마차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에는 제대로 닦인 도로는 도시 안쪽에나 있지, 도시 바깥까지 도로를 닦는 경우는 없었다. 마차는 흔들리지만, 내가 느끼는 진동은 없이 편안했다. 마법의 힘이었다.
이 마차는 본가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나 혼자만 본가로 향하는 건 아니었다.
마차 안에는 나와 유리아가 타고 있다. 내 옆에 앉은 유리아는 두 눈을 감고 그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방금까지 나와 몸을 섞었기 때문인지 지쳐 있었다.
‘유리아가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다고 해도 잠자리는 여전히 내가 이기는군.’
육체적으로는 멀쩡했다. 다만 지속적인 쾌락에 의해 정신적으로 지친 것이다. 아니지. 풀어졌다고 해야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유리아의 허리춤을 만지면서 바깥을 계속 바라봤다.
이 마차는 혼자가 아니었다. 마차 주위에는 호위하는 여기사들이 말을 탄 상태로 달리고 있다. 오러 마스터이자, 기사단장인 플로이다. 몬스터든 산적이든 상대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 뒤쪽에 있는 마차에는 카일이 들어가 있었다. 유리아를 제외하고서도 오러 마스터만 3명이다. 웬만한 도시 하나쯤은 하루만에 몰락시키고 점령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쌩쌩 달리던 마차는 저녁 무렵이 되어 멈춰 섰다. 기사들과 따라온 메이드들이 능숙하게 야영을 준비했다.
“주인님. 적입니다. 암살자인 것 같군요. 숫자는 35명. 약 2km 떨어진 곳에서 천천히 접근하고 있습니다. 조심하는 걸 보니 모두 일류 암살자입니다. 명령하신다면 처리하겠습니다.”
2km 밖에서 암살자가 다가오는 걸 눈치채다니. 이게 그랜드 마스터인가. 나는 감탄하면서 주위를 살펴봤다. 나는 물론이고 플로이나 카일도 암살자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암살자를 누가 보냈을까.
‘뻔하지. 젠트다. 원작에서도 궁지에 몰리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
내가 엔티온에겐 보낸 편지를 읽은 것이 틀림없었다. 도중에 낚아챘든, 몰래 내용을 살펴봤든 간에.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급하게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젠트는 내가 본가에 도착하면 끝이라고 생각했겠지.’
본가까지의 거리는 이제 조금이다. 2시간 정도면 본가에 도착할 수 있으나 내일 아침에 도착하기로 했다. 내일 아침에 도착하는 건 유리아의 의견이었다. 아침부터 몰아치듯 시작하여 단숨에 후계 문제를 끝내는 게 계획이다.
‘하루아침에 일류 암살자 35명을 고용하는 건 불가능해.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거겠지. 아마 내가 아니라 카일을 상대로 준비하고 있던 수였겠지.’
인간을 초월한 경지라 불리는 오러 마스터지만, 오러 마스터도 결국은 인간이다. 역사서를 뒤져보면 암살당해 죽는 경우는 번번이 있었다. 특히 오러 마스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가 가장 많이 죽는다.
‘젠트는 나와 카일을 동시에 죽일 생각인가? 오러 마스터 둘을?’
유리아에 대해선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플로이는 공식적으로 귀환하지 않은 상태였다. 플로이가 내 호위를 선다는 걸 알았다면 아무리 젠트라도 암살자를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플로이는 이미 경험이 풍부하기로 유명하니까.
‘아주 급했나 보군, 젠트. 발악이 이 정도라니 실망인걸.’
나는 화련비도를 소환해 손에 쥐었다.
“직접 나서실 생각이십니까?”
“오러 마스터가 되고 나서 제대로 된 실전을 겪어 본 적도 없잖아. 이번에 한 번 오러 마스터의 힘을 느껴봐야지.”
“알겠습니다.”
나는 유리아에게 물어 암살자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플로이를 비롯한 기사들에겐 편히 쉬라고 말했다.
‘일류 암살자 35명. 내가 먼저 알고 있는 이상 암살자의 최대 장점인 기습은 안 통해.’
아마 대부분이 오러 익스퍼트 중급 이상일 것이다.
‘할만한데? 오러 마스터가 왜 오러 마스터인지 보여주지.’
어느 순간부터 유리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림자 마법을 이용해 모습을 감춘 것이다. 일단 근처에 있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집중해서 기감을 퍼뜨렸다. 유리아의 기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천안(天眼)을 사용하자 유리아의 윤곽이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그녀는 내게서 약 5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암살자가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약 15분이 지나자 암살자들이 나타났다.
보이는 건 12명. 나머지 23명은 내게 보이지 않게 숨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암살자답게 복면을 쓰고 무기를 들었다. 암살자 아니랄까 봐. 움직이는데 발소리가 없어서 유령 같았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나?”
암살자 중 한 명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굵었다. 나이로 따지면 못해도 40대 이상이다. 아마도 암살자들의 리더이리라.
“긴말 않고 묻지. 젠트가 보냈나?”
“의뢰주에 관해선 말하지 않는다.”
젠트가 확실했다.
궁지에 몰려 멍청한 짓을 저지르는 놈은 젠트 말고 없었다. 아일린 공주라는 정적이 있긴 한데, 그 여자는 궁지에 몰릴수록 더 침착해진다.
“너희는 누구지?”
“암살자에게 정체를 묻는 건가?”
“제대로 된 답변은 원하지도 않아. 나는 너희가 어느 단체인지 묻고 있는 거라고.”
이 세계에는 암살길드라고도 불리는 암살단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는 밝히지 않을지언정 암살단의 이름은 반드시 밝힌다. 암살 짓도 결국은 먹고 살자고 하는 짓거리다. 보다 높은 가치를 얻으려면 명성이 필수다. 그게 악명이라 할지라도.
“하하. 담담하군. 젊은 나이에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만큼 패기도 있군. 좋다. 알려주마. 우리는 암제(暗帝)다.”
“…암제라고?”
“하하. 역시 놀라는군. 그렇겠지. 우리의 이름은 코흘리개 어린애도 알고 있으니.”
암제(暗帝).
헬브리트 공작가를 몰살한 전설적인 암살자로 세간에 떠들썩하다. 헬브리트 공작가의 참사는 워낙 전설적인 일이었던지라 그 악명은 드높았다. 지금도 간간이 암제가 활동하며, 암제가 노린 인물은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한다.
그 전설적인 암살자, 암제의 정체는 유리아다.
“암제가 진짜 너희라고?”
“그렇다.”
“암제는 한 명이 아니었나?”
놈에게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 말을 비웃은 것이다.
“많이들 착각하곤 하지.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암살자 혼자서 헬브리트 공작가를 몰살하는 게 가능한가? 당연히 혼자선 불가능하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러니까 너희가 헬브리트 공작가를 몰살했다?”
“그렇다. 우리 암살단이 암제다. 우리에게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당당하게 사기를 치고 있었다.
암제가 사실 한 명이 아니라 암살단을 칭하는 단어다. 라는 것은 꽤 그럴 싸 했다. 암제의 정체를 몰랐다면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것 참 무섭군.”
화련비도를 들어 올렸다. 내 중심에서 마나가 움직인다. 칼날에 마나가 서린다. 화르륵 타오르던 푸른색 검기는 뭉쳐서 검강(劍罡)이 되었다.
검강.
오러 블레이드.
[신의 아틀란티스] 세계나 [광명승천도] 세계에서 이미 사용했는데도 [백환] 세계에서 사용하니 뭔가 새롭게 느껴졌다. 거기에 실제로 감각이 세계마다 조금씩 다르다.
“…우리를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포기해라. 그럼 유언을 쓸 시간 정도는 주지.”
“천하의 암제가 혓바닥이 왜 이렇게 길어. 나한테 질 것 같아서 쫄리나?”
“하…. 어린 나이에 오러 마스터가 되었다고 기고만장하군. 그 목숨을 끊어주지.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대체 어떻게 우리가 온다는 것을 알았지? 이 일을 알고 있는 건 우리와 의뢰주 뿐이다. 의뢰주 쪽에서 정보를 흘렸나?”
“올거라 예측했다. 내일은 아주 중요한 날이니까. 너희 의뢰주가 내가 생각하는 그놈이라면… 내가 본가에 도착하기 전에 노릴 테니 말이다.”
“…예측이라. 대단하군.”
그가 작게 감탄했다.
그리고 직후, 어둠 속에서 암살자 다섯이 튀어나와 내게 쇄도했다.
‘가속, 찰나.’
느려지는 세계에서 마나를 움직였다. 내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영천기공이 내 의지에 반응했다.
파지지직.
하체에 뇌기가 모인다. 나는 그 뇌기를 이용해 위로 점프했다.
시야가 변한다. 주변이 탁 트인다. 아래에 당황한 암살자들과 나무의 윗부분이 보인다. 나는 하늘로 20M 가량 솟구친 것이다. 나는 약간 당황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4배가량 더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오러 마스터가 되고 수련했을 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실전이라 그런지 몰라도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았다.
나는 추락하는 도중에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밤공기가 몸 깊숙이 들어온다. 그에 자극받듯이 몸 안의 뇌기가 꿈틀거렸다.
파지지지지직.
전신에서 푸른 전류가 꿈틀거렸다. 화련비도를 꽉 쥐었다. 뇌전은 화련비도로 향해 붉은 번개가 되었다. 나는 칼을 역수로 쥐었다. 칼끝은 지상으로 향한다.
영천류(影天流) 낙뢰(落雷).
온몸에 붉은 번개를 휘감고 지상으로 떨어졌다.
콰아앙!
지상으로 떨어지며 붉은 전류가 암살자들을 휩쓸었다. 전류에 당한 암살자들이 반항 한 번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저 번개는 위험하다! 떨어져라! 떨어져서 원거리에서 상대해라!”
암살자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모습을 드러낸 암살자는 20명. 아직 10명 정도가 여전히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
‘몇 명 놓쳤나.’
이 긴박한 전투 상황에서 상대를 전부 동시에 파악하는 건 힘들었다.
‘차근차근 줄여나가면 그만이지.’
콰르르르르르릉!
붉은 번개를 휘감고 가까운 암살자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몸이 유독 가벼웠다. 진짜 번개가 되어 몸의 질량이 사라진 것 같았다.
가장 앞에 있는 암살자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암살자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자신이 죽은 걸 알아차린 암살자의 두 눈이 뒤늦게 커진다. 동시에 사방에서 암기가 날아왔다. 단검, 손톱보다 작은 날붙이, 독이 발라진 표창.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사방에 뇌전을 내뿜었다. 뇌전에 닿은 암기가 땅바닥으로 수직 낙하에 파묻혔다. 자력을 이용한 것이다.
나는 적들을 향해 살의를 내비치며 땅 위를 내달렸다. 깃털보다 가벼운 칼을 휘두른다. 한번 칼을 휘두를 때마다 암살자 한 명이 죽어 나갔다. 붉은 번개가 포효하며 칼날의 뒤를 따른다.
‘느려…! 너무 느려!’
찰나를 쓴 적도 없는데 세상이 느리게 보였다. 뭐, 찰나를 쓸 때보다 조금 더 빠르다. 찰나를 썼을 때는 훨씬 느리게 보였으니까.
그래도 찰나보다 훨씬 낫다. 찰나는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원래대로 돌아오니까. 그런데 지금 나는 느려진 세상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여도 세상은 여전히 느리게 움직인다.
콰르르르릉!
암살자 7명을 베었을 때였다. 실제 시간으로는 몇 초가 지났는지 모르겠으나, 체감상 10초도 되지 않았는데 몸에 이상이 찾아왔다. 몸이 뜨거웠다. 다리와 팔이, 내장이 비명을 지른다. 두통도 지끈거린다.
그러나 나는 죽으면 죽었지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몸의 비명을 무시하고 움직였다.
콰르르르르릉!
독연기를 뚫고 지나 도망치는 암살자를 쫓았다. 참격이 땅바닥을 할퀴고 나무를 찢어낸다. 그을린 흔적은 번개의 흔적이었다.
26명의 암살자를 베었다.
한계가 찾아왔다.
진짜 한계였다. 느려진 세계가 다시 원래의 속도를 되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된 게 세계는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몸이 엉망이야. 색깔을 구분하기 힘들어. 내장은 이미 죽은 것 같고…. 심장은 지금 뛰고 있나?’
안 뛰는 것 같았다.
나는 정면에 있는 암살자를 쳐다봤다. 암살단의 리더로 보이는 그놈은 날 괴물 보듯이 보고 있었다.
“오러 마스터를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뭐냐, 이건… 대체 뭐냐…!”
영천류와 뇌전이다.
나는 단지 영천류에서 암영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것만으로 이 정도 위력이 나왔다.
‘…솔직히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지만. 위유. 당신의 말이 맞았어.’
몸에 힘이 빠진다. 유리아가 내 옆에 나타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뒷일은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쉬십시오,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