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33 3부 3장 20 진실의 대가
나쁜 건 성주다.
테라 사람들이든 20년의 지구 사람들이든, 성주에 대해 좋게 생각할 요소는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성주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에 대해 나는 나쁘다고 생각 안 한다.
성주가 아니었으면 신라도 만나지 못했을 거라고?
신라가 겪은 고통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성주라는 존재가 없는 게 더 낫다.
그러니 모든 잘못을 성주에게 뒤집어씌운다.
깨끗한 존재에게는 약간의 흠결이 오점이 될 수 있어도, 이미 더러워진 검은색에는 더 덧칠한다고 한들 달라질 게 없지 않은가.
어차피 놈들의 색도 검은색이고.
"그러니까 네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나보고 협조해달라고?"
"그래."
"앞으로 어떤 녀석들이 오든지, 성주라는 놈이 전부 나쁘다고 하면 되는 거야?"
"정답이야."
"흐음...."
암흑여신은 볼을 긁적거렸다.
나의 제안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니면 딱히 내키지 않았는지, 그녀는 좀처럼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내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데?"
"......."
솔직히.
암흑여신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
내가 '야동 공급을 끊겠다'고 말을 해도, 그건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싸우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암흑여신을 설득해야 한다.
설득하지 못한다면, 나는 야동 업로더가 되고 마니까.
"어떻게 하면 협조해주겠어?"
"협조는 무슨. 친구끼리."
"뭣...."
"우린, 친구잖아."
암흑여신은 내게 손을 뻗었다.
"평생 비밀로 할게. 만약에 그 '이계의 검은 존재'에게 누명을 씌우는 게 불가능하다면, 내가 대충 너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둘러댈게. 다들 이해할 거야. 나는...조금 음습해도 다들 그러려니 할 거라고."
설마.
설마 암흑여신이 나를 이렇게 도와줄 줄이야.
이 여자는 진짜로 친해져도 될 것 같은-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역시.
조건이 없을 리가 없다.
"뭔데?"
"진실을 말해줘."
"진실?"
"너에 관한 진실. 이계에서 온 어둠은 또 뭐고, 너는 어느 세계에서 왔고, 궁극적으로 너의 목적은 무엇인지. 그걸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나도 확실히 대답해주기가 곤란해."
암흑여신의 눈빛은 진지했다.
끓는 속을 간신히 토해낸 것 같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간신히 말한 것 같은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뭐야, 왜 웃어?"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과거.
나는 20년의 지구에 이런 상황이 되면 어떻게든 말을 돌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모두가 진실을 원했지만,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진실을 말하는 순간 일어날 변수가 두려워서.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게 끝인가? 조금 걱정되는군."
"...응?"
"내가 진실을 말해주면, 네가 몹시 혼란스러울까 봐."
"나를 걱정해주는 거야...? 그건 괜찮아. 나는 어떤 진실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 자, 어서 진실을 말해줘."
"그럼.... 지금부터 개쩌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그 전에."
로그아웃.
물어보기.
허가.
로그인.
"검은 존재는 이계에서 온 존재로 일곱 여신들을 타락시켰고,
그걸로 또 다른 세계 '지구'를 침략했고,
그걸 바탕으로 '게임'이 만들어졌고,
나는 그 게임을 플레이하던 플레이어였고,
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나는 그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불의 여신이 타락한 '창염의 피닉스'라는 히로인이 되었고,
나는 게임의 배경이 된 지구를 구했고,
원래 세계로 돌아와서 내가 사랑하던 사람을 구했고,
나의 세계에서 사랑하던 사람과 함께 살았고,
그녀의 과거 세계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로 왔고,
이제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다가 너를 만나게 되었어.
어때?"
"......."
암흑여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축약했나?"
"아니, 그, 뭐라고 해야 할까...음...."
암흑여신은 머리를 손으로 꾹 눌렀다.
"일단 뭐라고 말은 쉽게 못하겠지만...엄청 고생했겠다 싶어서."
"...그렇지. 진짜 개고생했지."
정신세계에서 죽은 횟수나, 현실에서 고통받은 거나 그런 걸 생각하면, 정말 미친 듯이 고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세한 설명을 듣기 전에 잠깐 질문."
"뭐든지 물어봐도 돼."
"...방금 네가 불의 여신이 타락한 존재를 구하고 구했다고 했잖아. 혹시 네 아내라는 여자가...."
"응. 맞아. 이 세계에서 불의 여신으로 통하는 존재지."
물론 엄밀히 따지면 다르다.
"지금 이 세계의 불의 여신과는 조금 달라. 나나 그녀의 입장에서 여기는 과거 세계라서, 이곳의 그녀는 나와 만나기 전의 상태거든."
언젠가 신라가 그렇게 비유한 적이 있다.
신라도 아니고, 창염도 아니고, 그 전의 자신이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
그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여대생과 여고생의 차이."
"...뭐?"
"자세한 건 나도 몰라. 만나봐야 알지."
신라 왈.
"여고생이 여대생으로 진화하기 전까지, 일단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더라."
마치 딸기 케이크를 먹을 때 딸기만 나중에 먹듯.
신라는 맛있는 건 원래 제일 나중에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니까.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어?"
"물론이지."
나는 천천히 암흑여신에게 모든 걸 설명했다.
"너는 타락해서 비처녀 걸레가 돼."
"...엣."
속 시원하게.
* * *
그 시각, 어딘가.
"회장님, 정말 괜찮은 겁니까?"
"뭐가?"
"저렇게 전부 다 까발리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하기는 무슨."
대머리는 옆 팔걸이, 고양이 가면처럼 생긴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내가 다 속이 시원한데 뭘?"
"예?"
"누구 때문에 말 못 해, 트롤링할까봐 신경 쓰여, 진실을 전부 다 말하지 못하고 짧게 말해. 어휴, 옆에서 보면서 답답해 뒤지는 줄 알았다."
"죽지도 않으시고, 또 죽어도 계속 살아나셨잖아요."
"그거야 뭐 살아나야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으니까 그러지."
대머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밖을 가리켰다.
"나는 말이야, 요즘 너무 기분이 좋아. 세상 사람들이 내 심정을 모두 알게 되었거든."
"예?"
"원래 놀이라는 건 말이야, 멀리서 구경하는 것보다 직접 옆에서 같이 참여하면서 봐야 꿀잼이거든."
"아, 예, 그렇군요."
"지도 옆에서 지켜봤으면서?"
"언제든지 탈출 스위치를 누를 수 있는 분의 입장과 달리, 저는 수틀리면 같이 죽을 수도 있는 진행요원의 입장과 비슷했습니다만."
"......."
대머리는 조용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고, 일단 우리들의 건설적인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보자고. 응?"
"건설적인 미래라 하심은...."
"피닉스 성주설."
"......."
노란 양복의 남자는 고개를 천장으로 치켜들었다.
"왜? 너도 나쁠 거 없다고 생각하잖냐?"
"확실히 이 지구에 계속 놔뒀다가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뭐가 아니야? 얼마나 좋구만. 이제 시대는 하렘순애의 시대라고."
"하렘과 순애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단어입니까?"
"시대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로구만."
"......."
노란 양복의 사내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순애를 일곱 명 모두 가지고 있고, 남자도 이걸 인정하고, 모두가 화목하게 서로 싸우지 않고 지내면 그게 순애와 뭐가 다를 바 있나?"
"회장님, 저와 순애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이 녀석, 너 건방져."
"건방지더라도 할 말은 하고 살아야겠습니다. 순애라는 건 일 대 일로 사랑을 나누는 것. 하렘과 순애라는 단어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거 참...."
대머리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노란 양복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자네, 그냥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순애라는 것은...."
"일 대 일로 사랑을 나누는 게 순애? 이미 즐길 만큼 즐기지 않았나? 지금부터는 하렘이 곧 순애가 될 거다."
"아니, 그런...."
"아, 너도 솔직히 좋잖아! 어차피 다른 거 다 떨쳐내고 가기에는 글렀어! 애 생긴 시점에서 이미 끝난 거라고!!"
"너도 손자 생겨서 좋잖아!!"
"손자라고 해야 할 지.... 그것 참."
노란 양복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봐야 자신은 을이었고, 저자는 자신보다 훨씬 더 위에 있는 존재.
애초에 통하지 않을 설득을 하는 게 어리석은 짓이다.
"회장님. 그거 하나는 확실히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회장님의 1픽이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때는 그냥 놓아주셔야 합니다."
"하, 그거야 당연하지."
대머리는 두 손을 비비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이 정도로 판을 깔아줬는데도 실패한다? 그러면 그때는 내 잘못 아니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그리고 저기 노란 날개를 달고 있는 떡볶이의 신과 고라니의 신이시여. 부디, 그 불쌍한 여자에게 하렘의 빛을...!!"
"...누구에게 기도하는 겁니까?"
"시끄러워! 이렇게라도 해야 가능성이 있다고!"
"........"
그저, 안타까울 뿐.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오직 하나.
그래.
말을 듣지 않았을 뿐이다.
* * *
"설명 끝났다. 됐지?"
"......."
암흑여신, 이제는 앙그라고 칭해도 될 법한 여인은 굳은 표정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럼 나도 친구의 아내가 될 수 있는 거야?"
"뭐? 잠깐. 그건 이야기가 다르지."
엄연히 다르다.
"내가 지금 비록 세 여자와 살림을 차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더 늘리겠다는 건 아니었어."
"그런가...."
"그래, 그런 거야."
갑자기 하렘에 들어오겠다고 하니 당연히 기겁할 수밖에.
그리고 여러모로 조금 그렇다.
딱히 앙그가 싫다기보다는, 아니, 조금 싫다.
"음...아니다. 조금 그렇겠네. 내가 한 행동들이 있으니까."
"그런 건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도, 네 아내들이 신경쓰일 걸? 나 같아도 나 같은 아내를 맞이하는 건 조금 그렇겠다."
"아니다, 그건 자기 비하다."
"아니야, 아니야. 사람은 자기 주제를 파악할 줄 알아야지. 나는 여신이지만!"
"......."
본인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뭐....
"아, 그 방법이 좋겠다. 지금 이 세계로 넘어왔다는 그 친구, 김누리라고 했지?"
"그런데?"
"걔한테 빙의하면 되겠는 걸?"
"뭐?"
"아, 아니다. 빙의가 아니라, 순서가 반대지."
앙그는 자신을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걔를 2세대 암흑여신으로 만들면 되겠는데?"
"......."
아니.
"아니, 왜?"
"네가 말했잖아. 이 세계가 멸망한 건 여신들이 간부들이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근데 과연 그냥 멸망을 받아들인 걸까?"
앙그의 눈에는 확신이 있었다.
"너희 세계의 표현을 빌리자면, 약간 그런 느낌이네. 환생세탁?"
"......."
"좋은 생각 아냐?"
"......."
왜.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며. 그러면 걸레를 새로 만들면 되지! 걸레가 되기 전, 순백의 하얗고 깨끗한 천으로! 어때?"
왜 자꾸만 한두 명씩 늘어나는 걸까...?
"네가 이 별의 주인이 되고, 다크 레기온이라는 거 대신에 여신들을 네 아내들로 만들면 되겠는데? 딱 되네!"
"......."
나는 정신이 아찔해져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작전 타임."
로그 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