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030화 (1,030/1,497)

EP.1030 3부 3장 17

"낯선 천장이다."

누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학교에서 눈을 떴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학교 그 자체.

'단장'을 믿고 4년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지만, 설마 그 장소가 학교일 줄이야.

"...쪼금 빡신데."

누리에게 있어서 학교란 그다지 좋은 곳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그렇다고 해도, 중학교 이후로도 계속 키가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작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많은 놀림을 받았다.

안 그래도 세상은 험악하고 위험으로 가득한 곳.

그런 곳에서 김누리라는 존재는 상대적으로 '약자'로서 알게 모르게 압박을 받던 곳이었다.

학교라는 곳은 누리에게 그다지 정신적으로 건강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걸 단장이 알고 있음에도 이런 환경을 마련했다면, 그건 아마도 누리가 이 환경을 극복하라는 의미일 터.

"...단장님은 의외로 사람 빡시게 굴린다니까."

청화단에서도 그랬지만, 능력있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많은 일을 부여하는 사람(?)이었다.

이건 그만큼 단장이 김누리를 믿고 신뢰한다는 증거.

그러니….

"좋아! 일단 학교부터 박살을-"

드르륵.

교실 문이 열렸다.

누리는 정장을 입은 여인의 등장에 전신이 굳어버렸다.

"...얄다바오트?"

"오랜만에 듣는 이명이네요. 개인적으로는 다른 이명을 쓰고 있지만."

금발청안의 여인은 누리의 앞에 출석부를 들고 섰다.

"지금부터는 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세요, 학생."

"...유나 언니?"

"선생님입니다."

"아니, 이게 무슨…?"

깡!

이유나는 출석부로 김누리의 머리를 때렸다.

"아악! 이거 아동학대임!!"

"학교를 파괴하려고 하는 여중생에게 이 정도 조치는 약과죠. 기껏 만든 시설인데 이걸 파괴하려고 하다니, 어휴."

누리는 유나의 말에 혼란스러웠다.

아니, 애초에 유나가 눈앞에 있는 것 자체가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된 거임?"

"이 세계의 대지모신과 하나가 되었어요. 이제 테라의 땅속성 정령...여신은 저랍니다."

"와."

누리는 감탄이 절로나왔다.

"언...선생님 그럼 이제 리얼로 여신 된 거임?"

"네. 땅의 여신이에요. 남편은 제 힘을 빌려서 땅속성의 이능을 사용한 거구요."

"...남편?"

"네, 남편."

유나는 고개를 치켜들며 우쭐거렸다.

"세계를 뛰어넘어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닿을 수 있었답니다."

"와…."

누리는 혀를 내둘렀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제일 먼저 올라간다더니, 딱 그 꼴 아님?"

"누가 얌전해요?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에요."

"때?"

"성인이 되는 때."

유나는 당당히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설정상 저는 일 년만 더 지나면 성인이 되는 사람이어서, 성인이 되자마자 바로 세계를 넘어 남편을 찾았답니다."

"...복잡한 것 같은데, 내가 알아야 하는 거임?"

"알면 이해하기 편하고, 몰라도 되고요. 다만…."

유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만약 남편 뒤로 또다른 부인 후보로 들어올려면 그만큼 각오를 해야 합니다. 알겠어요?"

"...부인 후보?"

"네. 저도 지금 3번 부인이에요."

"......허미, 씨펄."

"어허. 나쁜 말."

깡.

또다시 출석부가 누리의 머리를 때렸다.

"으 씨…! 마력 담아서 쳤지?!"

"욕을 했으니까요?"

"아니, 놀라서 욕 나오는 것도 죄임?! 21세기 현대 사회에 3번 부인이라니, 그게 무슨...잠깐."

누리는 순식간에 표정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럼 2번 부인도 있음?"

"하랑 언니요."

"...1번 부인은?"

"창염."

"?????"

누리는 혼란에 빠졌다!

유나는 누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칠판에 '창염의 피닉스'라는 문구를 썼다.

그리고.

"창염은 불의 정령. 피닉스는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가서 창염의 몸에 깃든 인간 남자 백 씨. 오케이?"

"......."

김누리는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후후. 걱정하지 마세요, 누리 양. 당신을 위한 고등학교 3년의 커리큘럼을 준비했으니까."

유나는 칠판을 두드렸다.

"일단 역사 과목. 회귀자 백 씨의 '창염의 피닉스 빙의기'부터 시작해볼까요?"

* * *

상대는 인류 최강의 석학들이다.

세계에서 단 한 명 존재하는 천재의 재능을 가진 자들로, 그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논리를 펼치기 시작하면 결국 밑천이 털리게 되어있다.

예를 들어.

여자친구에게 거짓말을 하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간 경우.

진실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한 번 시작한 순간, 거짓은 또다른 거짓을 낳게 된다.

그렇다고 진실을 말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술을 마시러 간 게 아니라, 실은 술을 마시러 가는 척 마법소녀로 변신해서 나쁜 빌런을 물리치는 거라면?

미친 소리같지만, 사람들에게 이런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전혀.

결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완벽한 거짓말로 상대를 속여야 한다.

설령 나중에 모순을 눈치채고 허점을 찌르고 오더라도, 지금 당장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터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니.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하게 나서기로 했다.

"은유하인가."

[...누구시죠?]

정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다.

게임에서 자주 건너듣기도 했지만, 이렇게 마도기어를 통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다.

"피닉스."

[거짓말.]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상대가 의심하는 틈을 노려 진실을 퍼붓는다.

이렇게 하면 마치 모든 진실을 말한 것처럼 상대의 오해를 유도할 수 있다.

"오랜만이군. 누리에게 그쪽 상황은 전부 전해들었다."

[잠깐만요. 정말 고객님이에요?]

"그래."

[남자였어요?]

"...지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정령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나는 정령이 아니었지."

마치.

다 끝났으니까 하는 얘기라는 듯.

"나는 회귀자였다."

[뭐라고요?]

"지휘관 '백청화'. 2025년, 지구를 구하기 위해 성주와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나는 과거로 돌아갔다."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는다.

"2000년으로 돌아간 나는 '창염의 피닉스'에 빙의했지. 이 정도면 충분한가?"

[잠깐만요. 그렇다면….]

유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무궁화 보이...당신이에요?]

"......."

아니다.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게임 플레이어로서의 나를 숨기려면 인정해야 한다.

"...한 때는 그런 존재였지."

[와….]

"누구나 인간에게는 흑역사라는 게 있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으니, 넘어가."

[아니, 뭐 그런 건…. 알았어요. 좋아요. 백 번 양보해서 당신이 저와 거래를 하던 고객님이라고 치죠. 그런데.]

은유하는 나를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 어떤 그림을 꺼냈다.

[이건 왜 눈치채지 못한 거죠?!]

"...크리슈나?"

[이거 저희가 보낸 차원탐지단말이었는데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진심이다.

이건 순도 100% 진심이다.

만약 누군가가 크리슈나의 실체에 대해 알았다면, 누구 하는 내게 귀띔을….

'일부러 말 안 했을 수도 있겠네.'

"수상할 정도로 눈이 별빛으로 반짝인다 싶더니 그게 그거였군."

[그게 제 아이덴티티인데 눈치채야 하는 거 아닐까요!]

"지금이라도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다행 아닌가. 유하."

[읏…!]

이렇게 된 이상.

"정말 오랜만이군. 못본 사이에 더 예뻐졌어."

[.......]

개연성으로 밀어부친다.

현실에서 신라와 하랑이가 궁시렁거리며 내 몸을 찌르는 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역시 칭찬 뿐이다.

"세계를 넘어오는 방법까지 깨우칠 줄이야. 히카리도 상당히 성장했는 걸."

[단장님! 질문 빠르게 하나!]

"뭐지?"

[거기, 과거의 테라 아니죠?!]

과거의 테라.

"맞는데?"

[나니? 손나, 바카나!]

"...이쪽도 다른 세계에서 과거의 테라로 넘어온 상황이다. 또다른 성주로 보이는 자가 여기를 공격하는 중이라고 들어서."

[아항.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군요! 으음, 간단하네요. 과거의 테라는 그냥 중계지점이고, 또다른 성주의 영향으로 저희 세계랑 단장님의 세계가 연결되었다는 거군요!!]

역시 프로페서.

짧은 정보로도 금방 바로 이해했다.

[그럼 단장님! 청화단으로서 저희가 최대한 지원을-]

"아냐. 괜찮다."

전력으로 사양이다.

"연락이 된 건 정말 반갑고 고맙지만, 이쪽의 일은 내가 처리할 수 있다. 염치없지만 너희는 그쪽에서 제어를 해다오."

[제어요?]

"이 세계로 넘어오는 사람이 없게."

김누리와 같은 일이 또다시 발생하면 곤란하다.

"이쪽에서 그쪽으로 보내는 방법을 알아보겠지만, 시간이 걸린다. 그쪽 지구에서 이쪽으로 사람들을 보내면 곤란해."

[흐음….]

유하는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고, 나는 괜히 긴장되기 시작했다.

[좋아요. 그래도 마도기어 계속 차고 있어요. ...누리는 어떻게 되었죠?]

"지금 이 세계에 적응하는 중이야."

내가 함부로 이 세계로 넘어오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 뿐이다.

"이곳은 지구와 마력의 농도가 달라. 평범한 인간이 넘어오면 상황이 심각해진다."

[어떻게요?]

"죽는다. 인간이 어느 날 갑자기 목성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야."

[...누리는요?]

"S급이라서 조금 버틴 거지, 내가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체내 마력이 전부 뒤바뀌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을 걸."

'정령'이라든가.

"한 가지 물어보지. 그…."

은유하에게 이런 질문을 하기에는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걱정되는 요소가 하나 있다.

"...혹시 누리 말고 실종된 사람이 있나? 내가 행방을 아는 사람은 하랑이와 유나다."

[하랑이랑 유나요?! 어떻게 알아요?!]

"이쪽으로 넘어왔다. 싱크로한 상태로."

[.......]

유하의 표정이 사납게 뒤틀렸다.

그 표정은 내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눈빛이었고, 왠지 모르게 등골이 저릿저릿했다.

"...그, 왜?"

[당신.]

고객님이...아니야?

[당신이 남겨두고간 호문클루스 때문에, 카르나가 비처녀가 된 거 알아요?]

"......."

[카르나가 이전까지는 후타나리로 자지를 박고 다녔는데, 당신 사라진 이후로는 당신이 남긴 피닉스로이드랑 마구 섹스하면서 매일매일 닭처럼 코어를 낳고 있다고요. 알아요?]

"그, 파트너에게 닭이라는 표현은…."

[싱크로하면!! 당신 곁에 갈 수 있는 거 아니야?!?!?]

아.

망가졌다.

"그…너 지금 싱크로 안 되나?"

[...피닉스로이드랑 섹스한 사람은 다 그래요. 박라온이, 아르엘이, 앙그, 카르나가 섹스를 했죠.]

"......."

안 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리고 했을 것 같은 사람의 이름이 없다.

나를 가장 두렵게 할 여자의 이름이.

"......천가을은?"

[실종이에요.]

"......."

좆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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