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029화 (1,029/1,497)

EP.1029 3부 3장 16

뭐지.

김누리가 왜 여기서 나와.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지만, 당황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

"어, 어…?"

뭔가 이상한, 이질적인 마력이 느껴져 단숨에 날아왔건만, 내 눈앞에는 김누리가 있었다.

두뇌 풀가동.

나는 나와 연동된 유나와 빠르게 현상에 대해 논의했다.

가능성 하나. '하리'처럼 이 세계-테라의 김누리일 가능성.

은 배제.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마도기어는 지구 출신임을 드러내고 있다.

가능성 둘. 원작 게임 속 세계에서 김누리가 이곳으로 떨어졌을 가능성.

도 배제.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마도기어는 내가 아는 그 어떤 마도기어와도 다른 형태였다.

굳이 말하자면 히카리 루트를 공략하고 난 뒤에 마도혁명 시대를 거쳐 새롭게 재탄생한 후세대 마도기어와도 같은 느낌.

가능성 셋.

정말 믿기 어렵지만.

[오빠, 얘 20년의 지구에 있던 누리 같은데요?]

청화단 간부 김누리.

이걸 생각해보면 김누리라는 존재가 테라로 넘어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히로인을 상대로 어떻게라든가, 왜라든가, 어째서라든가라고 생각을 하는 순간 지는 거다.

중요한 건 상황이 발생했고, 그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중요.

쾅!

나는 크게 발을 구른 다음, 땅을 일으켜 잠시 결계를 펼쳤다.

"히익?!"

"안심하라."

나는 깜짝 놀란 김누리를 향해 손을 뻗어 그녀의 마도기어를 잠시 붙잡았다.

치지직.

유나의 결계 덕분에 마력이 차단된 지금, 마도기어는 외부와 연결되지 않는다.

설령 이 결계 속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어딘가로 정보가 새나가지도 않을 터.

"너는 누구지?"

"......그러는 오빠야말로 누구세요?"

오빠.

누구세요.

일단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은 것부터 뭔가 이상했다.

이런 인성을 가진 김누리는 김누리 루트 후반부, 정신적인 시련을 극복한 야황이어야 도달할 수 있는 정도.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엄청나게 힘들게 정신교육을 해놓은 상태거나.

만약 전자와 후자 중 하나를 뽑으라고 한다면….

'후자지.'

보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이 누리는 내가 아는 누리라는 걸.

"물어보고 싶어하는 게 많은 것 같은데, 이쪽에서 먼저 질문하나 해도 되나?"

"...뭔데요?"

김누리는 과하게 긴장했다.

여차하면 나를 상대로 마력을 일으켜서 공격할 기세였고, 나는 그녀라면 알 수 있을 법한 화제를 꺼냈다.

다른 김누리와 달리, 20년의 김누리라면 분명 알고 있을 법한 화제.

"창염?"

"...개진?"

"갓 블레이즈."

"캐논."

"조덕배."

"대머리."

완벽하다.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아는 것으로 보아, 이 아이는 내가 아는 김누리가 맞다.

"...지구에서 이 세계로 넘어오다니."

"...진짜 단장님임?"

"단장님이라. 너무나도 오랜만에 듣는 칭호구나."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김누리에게 손을 뻗었다.

대지의 결계를 유지 중이라 아바타의 본래 모습은 드러낼 수 없었지만, 유나의 힘을 사용하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나를 증명할 수 있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푸른 불꽃. 만물을 비추는 유일한 태양. 태양신의 사도. 내가 바로 '창염의 피닉스'였던 자다."

"...였던 자요?"

"그래.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면 머리 아프니까, 그렇게 알도록."

게임이니, 플레이어니, 그런 복잡한 이야기를 알면 누리는 분명 정신적 쇼크를 받을 것이다.

이 누리는 아직 아가니까.

이 세계의 더러움을 보여주기에 그녀는 아직 너무나도 어리다.

"그, 진짜 지구를 '구원'해주신 피닉스님 맞으세요?"

"명왕성과 달을 불태워버린 그자라면 내가 맞다."

숨길 이유도 없다.

숨겨봤자 답답하기만 할 뿐.

"...잘 지냈나? 그때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군."

"어, 으, 그…. 저,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하나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좋다."

김누리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위아래로 가리켰다.

"그런 얼굴을 하고, 맨날 '푸흐흐, 딸기가 최고인 거시에요'하고 다녔던 거예요?"

"......."

...

"일단 상황을 정리해보도록 하지."

잠시 김누리의 일격에 큰 정신적 혼란이 오기는 했지만, 나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누리가 처한 상황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너는 검은 존재의 습격을 받아서 여기에 떨어졌고, 흑염룡이 너를 지켜주려다가 어둠에 휩싸였고, 지금 특별한 방법으로 지구와 연락을 할 수 있어졌다는 건가?"

"네. 연락한 지 얼마 안 됐어요. 방금 막."

누리는 벽을 가리켰다.

"이거 결계죠? 마력 차단하는? 그럼 유하 언니 또 난리 나겠네요…."

"........"

은유하.

게임 속 은유하가 아니라, 나를 전력으로 도왔던 회장 은유하다.

"유하 언니랑 히카리 언니 말에 따르면, 이계의 존재를 인지하고 차원을 넘어가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하더라고요. 이미 세상에 열려있던 흔적을 찾았다나 뭐라나?"

"가능성이 있군. 그건 분명 이전에 지구에서 여기로 넘어온 놈들일 거다."

가이아나를 가이아나치로 만든 자들.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일의 흑막일지도 모르는 검은 놈들.

'테라포밍이 아예 없는 설정은 아니었으니까.'

큐브의 힘을 이용하든, 아니면 히카리처럼 기술력으로 승부하든.

20년의 지구에서나 25년의 지구에서나 테라로 차원문을 여는 것 자체는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차원문이 이곳으로 연결된 게 조금 그럴 뿐.

과거의 테라를 오염시켜 정령들을 다시 간부로 만든 다음, 다시 지구를 침공하여 세계를 오염시키겠다는 저열한 계획으로 지구에 이곳을 연결한 것일 터.

"다시 지구는 위험에 빠진 건가…."

"그, 단장님?"

"그냥 말해도 된다."

"...혹시 하랑 언니는…."

"나와 함께 있다."

"!!"

누리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한때 누리의 보호자 역할을 하랑이가 대신했던 만큼, 누리는 사실상 석하랑과 의자매라고 봐도 무방했다.

"다행이다….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거든요. 정말 뜬금없이 사라져서."

"이쪽도 뜬금없이 나타나서 놀랐다."

"그럼 여기에도 하랑 언니가…?"

"...미안하지만 완전히 다른 곳이야."

석하랑까지 나온 이상 숨길 수는 없다.

게임이나 플레이어에 관한 이야기는 빼고, 따로 설명하는 수밖에.

"테라도, 그 지구도 아닌 다른 곳에 우리는 지금 지내고 있다. 나도 성주와 싸운 뒤에 여기로 바로 떨어진 게 아니야. 다른 세계에서 지금 이 세계로 온 거다."

"그럼 하랑 언니는 거기에 있겠네요?"

"그렇지."

"연락은…."

"안부는 전할 수 있다. 얘기를 주고받을 방법이 있긴 한데, 아직 그러려면 조금 다른 곳을 많이 돌아다녀야 해."

아직 석하랑은 우선순위가 높지 않다.

석하랑 개인의 요청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바로 물의 나라로 갈 수는 없는 법.

그리고.

"너는 일단 원래 지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네?"

"여기는 위험해."

김누리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나는 그녀와 시선을 맞춘 뒤, 머리에 손을 올렸다.

"네 능력은 잘 알아.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옆에 데리고, 이곳에서 네오 청화단의 간부로 쓰고 싶은 심정이야."

"...그런데요?"

"제일 큰 문제가 있어."

아무리 김누리가 야황급이라고 한들, 지금 당장은 결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요소가 있다.

"테라에 미성년자가 있기에는 너무나 힘든 곳이야."

"아니, 그게 무슨…."

"정서상 좋지 않아. 네가 여기에 있으면 여러모로 큰 문제가 생겨. 성적으로."

".......그, 멕시코에서 있었던 것 같은…?"

"그래."

나는 당시에 다른 곳에 있어서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누리가 청화단과 함께 멕시코 원정을 나갔을 때 조금 호되게 당한 게 있었다.

청화단 간부들, 어른들의 케어를 바탕으로 정신적으로 단단해지기는 했지만, 김누리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하랑이도 네가 여기서 상처 입는 걸 바라지는 않을 거야. 이곳은 지구보다도 더한 곳이니까."

"...단장님이 어떤 의미에서 저를 걱정하는지 알겠네요."

김누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해해요. 마치 너튜브에 전연령으로 성인물이 올라오면 검열되는 것 같은 느낌이라는 거죠?"

"미묘하게 다르지만 비슷하다고 해야겠는 걸."

"어떤 말씀이신지 분명히 알겠어요. 근데 문제가 있다면."

김누리는 자신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제게는 돌아갈 방법이 없어요. 갑자기 여기에 떨어진 걸요."

"그건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20년의 지구와 이곳이 연결된 게 유나를 통해 전해졌을 테니, 분명 좋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래,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빠.]

"누리야, 잠시만? 응, 왜?"

[방법이 있어요.]

"방법?"

[네.]

유나는 내게 어떤 방법을 전했다.

그 방법이란, 내게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눈 가리고 아웅 아닌가."

[아닌데요? 아무런 문제 없어요. 분명.]

"그렇다면 본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누리야."

나는 김누리에게 손을 뻗었다.

"성인이 되고 싶어?"

"...성인이요?"

"그래. 성인."

"성인이 된다면, 저도 단장님 따라서 움직일 수 있는 건가요?"

"...감당할 수 있다면."

일반적인 정신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방법은…."

"...와, 그거 진짜 힘들겠는데요."

하지만 김누리가 정말로 간절하다면, 절박하다면.

"할게요."

"위험할 수도 있어. 지구로 돌아갔는데 갑자기 성장해서 돌아가면 놀라지 않겠어?"

"괜찮아요. 마침 고등학교 어디 갈까 진짜 고민 많이 했는데, 고등학교 스킵하고 바로 사회인 데뷔할 수 있어서 좋네요. 흐흥."

"......."

테라의 위험성보다 누리에게 편법을 제공한 게 더 문제가 아닐까 싶었지만, 김누리를 알게 된 이상 함부로 다른 곳으로 보낼 수는 없다.

이제는 딱히 히로인이기 때문에 구하거나 신경 쓴다는 게 아니라, 나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킬 힘이 있는데 시도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일단 마도기어는 나한테 줄래? 그쪽 사람들한테는 내가 잘 설명할 테니까."

"단장님 정체 드러내면 막 다들 여기로 넘어오려고 할 걸요?"

"...그럴 상황이 일어나는 걸 막으려고 하는 거야."

무분별한 테라포밍은 테라 멸망의 지름길이다.

적어도 차원과 차원 사이에 교류할 수 있는 차원게이트가 열리지 않는 한.

"여기요."

누리는 순순히 내게 마도기어를 넘겼다.

착용자가 바뀌자마자 마도기어는 시끄럽게 울어댔지만, 나는 마력을 불어넣어 마도기어의 신호를 억눌렀다.

"누리야. 그러면 4년 뒤에 보자."

"단장님한테는요?"

"...4일?"

"킥, 그럼 뭐."

누리는 내가 만든 결계 속에서 어깨를 으쓱였다.

"4년 뒤에 성인이 되어서 봐요, 단장님."

누리는 결계 속에 갇혔다.

나는 대지모신의 힘을 이용해, 결계 속의 시간을 조작했다.

밖에서의 4일이 결계 안에서는 4년이 되겠지.

그러면 김누리는 성인이다.

만.

"...견딜 수 있을까."

4년의 시간을.

"유나가 고등학교 선생님 노릇할 텐데."

정신과 시간의 결계.

그곳에는 누리의 4년간 고등학교 생활을 책임질 유나가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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